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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37)화 (137/201)

목을 조르는 손에 악력이 더해지면서 얼굴에 열이 올랐지만, 나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며 웃었다. 

누구냐니…. 네가 날 모르면 안 되지 인마.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백루찬이 물었다.

“너, 라온 길드 소속인가?”

나는 한껏 무해한 척 연기하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한야는 바닥에 쩔그렁 떨어져 녹아들 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눈을 보고 미심쩍은 듯 눈살을 찌푸린 백루찬은 여전히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야, 인마…. 이러다 진짜 숨 막혀 죽겠다. 심상 세계라 죽을 리는 없겠지만.

[간섭자는 물리적 피해를 입을수록 현실에도 피해가 반영됩니다! 주의하세요!]

시스템이 냅다 경고를 날렸다. 이 자식아, 그런 건 미리 말해 달라고!

아오, 어쩐지 목이 너무 아프더라.

“이… 일단 이것부터 좀 놔주고…. 내가 널 구해 줬는데 이러면 좀 섭섭하지.”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더니, 백루찬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실소했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보다 좀 더 어린 느낌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줏대 없는 나길태처럼 나도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뭐냐… 이 기분은.

“구해 줬다니, 간만에 재밌는 소리를 다 들어 보네? 라온 길드가 아니면 어디지? 유니스? 제릴?”

“다 들어 본 적도 없는 길드다.”

“처음 보는 사이에 말도 막 놓고.”

눈을 휘며 웃는 놈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지도 말을 놓았으면서요….

목을 콱 붙잡힌 채로 나는 어깨가 밀려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가로등에 등짝이 부딪쳤다. 그래도 바닥에 처박지 않은 게 어디냐 싶었다.

“어디 소속이냐니까. 말하기 싫어? 왜?”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그때였다.

“이 새끼! 동료를 데려와서 엿을 먹이다니!”

“아무리 마스터가 봐주는 놈이라지만, 이건 선 넘었다!”

쓰러진 나길태를 부축하던 라온 길드원들이 나와 백루찬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그들은 학습 능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지 힘도 못 써 보고 날아간 나길태의 상태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분노에 차 덤벼들려 했다. 나는 그들을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키면서 백루찬에게 살살 달래듯 말했다.

“일단 저놈들부터-”

그러나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백루찬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마자, 안광이 번뜩이면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번개가 여러 갈래로 나눠져 튀었다. 그것은 그대로 덤비려는 라온 길드원들에게 떨어졌다.

“으아아악!”

“아아악!”

“…….”

…무서운 새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여기서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이놈은 지금 나를 모르는 상태인 거 같은데. 내가 너를 구하러 왔다고? 지금 너나 나나 아주 급하다고?

여기는 너의 심상 세계이고, 우리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면…. 바로 목 졸라 죽일 거 같은데.

“누구냐니까. 어디 길드냐고. 어떻게 기척도 없이 다가올 수 있었지? 내 기감을 피하는 놈을 여태껏 마주한 적이 없는데.”

“하하….”

그야, 내가 너보다 강하니까. 물론 너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 길드야 하나밖에 더 있겠냐. 근데 말하면 알긴 하니. 나는 한숨을 삼키며 대꾸했다.

“모르젠트.”

“뭐?”

“모르젠트 소속이라고.”

백루찬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 듯 미간을 좁히며 나를 쳐다봤다. 내가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하려는 거 같은데 노려본다고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좋은 인상. 좋은 인상.

“뭐야. 게이트 벌써 공략됐어?”

그때 뒤에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이건 홍희 목소리인데. 그런데 어쩐지 평소에 듣던 목소리와 달리 한 톤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목이 꽉 잡혀서 고개를 돌리지 못해 눈만 굴려 홍희를 쳐다봤다.

칼단발의 소녀는 어디 가고, 긴 생머리에 일자로 똑 떨어지는 앞머리를 한, 약간 음울해 보이는 소녀가 교복에 무시무시해 보이는 건틀렛을 끼고 있었다. 홍희…라고? 분위기가 전혀 다른데?

살짝 놀랐다. 과거의 홍희 모습인가.

백루찬은 나를 흘겨보다가, 내가 더 반항하지 않자 느리게 손을 뗐다.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잡혔던 목을 쓰다듬으며 홍희와 백루찬을 살폈다.

홍희는 백루찬에게 가려져 있던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백루찬은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라온이 선수 쳤어.”

“아씨, 여기 정보 우리가 먼저 샀는데. 지분 판 놈이 이중 거래 한 건가?”

“그놈이 누군데.”

“건대 쥐새끼 있어. 주기적으로 족쳐 주는데도 버릇은 변하질 않네…. 근데, 누구야?”

나를 턱 끝으로 가리킨 홍희의 말에 백루찬이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모르젠…인가 뭔가 하는 길드 쥐새끼.”

“모르젠? 처음 들어 보는 길드인데. 또 캐스팅? 이젠 별 X도 안 되는 것들이 다 들러붙고 지랄….”

“아니. 캐스팅은 아니고….”

내가 끼어들며 대답하자 홍희와 백루찬이 나를 돌아봤다. 모르젠트 길드가 너네 건데 캐스팅은 무슨. 나는 방긋 웃었다.

“제가… 그….”

“…….”

“…그.”

“…말 줄이는 애들 중에 수상한 새끼가 아닌 놈이 없더라.”

홍희가 눈을 번뜩이며 어깨를 돌렸다. 살기가 넘치다 못해 뚫어질 것 같다.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패, 팬입니다!”

“…….”

“조져.”

“진짠데….”

홍희의 말에 백루찬이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손끝에서 파지직 소리와 함께 전류가 둥글게 맺혔다. 이것들이 진짜…. 왜 이렇게 거칠어. 한숨을 삼키며 일단 몸을 내빼려고 할 때였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사람 없이 텅 빈 도로로 뛰어들었다.

“허, 허억…! 루찬아!”

“…엄마?”

심히 마른 여자였다. 등 뒤로 가볍게 묶은 머리끈이 풀리며 긴 머리가 나부꼈다. 연약하고 아파 보이는 인상을 가진 그녀를 보고, 나는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백루찬에게 동화되어 보았던… 그 사람이었다.

백루찬의 어머니.

[상태창

이름: 김세영

칭호: (비어 있음)

클래스: 비각성자]

초월자의 눈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읽어 냈다. 김세영. 백루찬에게 동화된 상태로 그녀를 보아서일까. 실제로 만나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슴이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세영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와 두리번거리며 백루찬을 찾다가, 홍희와 같이 있는 녀석을 발견하고 이내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가 풀린 것처럼 휘청이는 그녀를 백루찬이 황급히 다가가 부축했다.

“여긴 또 왜…! 어떻게 온 거야?”

“어, 엄마는, 네가… 네가 또 게이트에 들어갈까 봐….”

김세영은 심각한 게이트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아들이 S급 전격계 각성자가 되었지만 공포증은 제아무리 아들이 각성자라 해도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김세영이 사람들이 모두 대피한 게이트 앞까지 뛰쳐나온 건 아들에 대한 집착과 불안함 때문이었다.

“뭐?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아까 희야에게 연락했었어. 이쪽에 있다는 말 듣고 혹시나 해서 와 봤어. 게이트… 들어간 거 아니지?”

“…아니야. 라온 길드가 정리했어.”

“그래… 그랬구나. 하아….”

김세영은 아들의 말에 뒤늦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백루찬이 홍희를 슬쩍 째려보았고 홍희는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래, 들어가지 마. 안 돼 루찬아.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엄마는… 엄마는 그 꼴 못 봐….”

김세영은 무사한 백루찬이 기꺼웠는지, 눈썹을 늘어트리며 옅게 웃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그녀의 왼쪽 팔을 살폈다. 접히지 않는 어색한 손 모양. 의료 기기를 끼운 모습이었다. 자꾸 시선이 가서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가슴이… 아프다. 동화를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속성으로 두 모자의 일생을 훑어본 느낌이어서, 그녀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내가 위험한 짓 안 한다고 했잖아. 엄마 아들 못 믿어?”

“믿지. 우리 아들 내가 못 믿으면 누가 믿어.”

“그런데도 여기를 찾아오면… 하. 앞으로 경보 발령 나면 바로 피해. 몇 번이나 말했었지? 엄마 다치면 제일 아픈 거 누구?”

“우리 루찬이.”

“알면 됐어. 이번만이야. 진짜 제발 피해. 나도 피할 테니까. 게이트 안 들어가. 알지? 엄마 아들 엄마 말 잘 듣는 거.”

“그럼 알지.”

김세영이 뺨을 쓰다듬자 백루찬의 표정이 아까와는 정반대로 풀어져 있었다. 살가운 아들 역할을 하며 시무룩한 척, 화난 척하는 얼굴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서 나는 눈동자만 굴렸다. 이거 상황이… 정리가 좀 안 되긴 하는데. 어떡해야 하지. 고민하고 있을 때, 김세영이 나를 발견했다.

“어머. 뒤에는… 누구셔?”

“아.”

그제야 백루찬이 나를 돌아봤다. 너 아직도 있었냐라는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나는 그가 김세영에게 했던 것처럼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 루찬이…랑 친한… 아는 형입니다.”

“어머.”

김세영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고, 홍희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백루찬이 김세영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매섭게 눈을 번뜩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나는 굴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들과 그냥 헤어질 수 없다. 간섭도 진행 중인데… 어떻게든 백루찬에게 여기가 심상 세계라는 것을 알리고 깨워야 한다! 사명감을 가지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이렇게 뵙는 건 또 처음이네요, 어머니. 저는 차해준, 이라고 합니다. 루찬이랑 같은 학교 다녔습니다. 친해요, 친구. 친구.”

싹싹하게 다가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김세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친구? 진짜야? 아들? 세상에…!”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김세영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백루찬이 뺨을 씰룩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 친…하지.”

“우리 아들한테 이런 멋진 형이 있었어? 세상에, 왜 나에게 한 번도 소개시켜 준 적이 없니! 희야만 있는 줄 알고,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었는데! 물론 희야도 너무너무 좋은 친구지만….”

“에이, 그렇게 말씀 안 하셔도 알아요. 루찬… 오빠한테 저만한 친구 없는 거.”

“얘는, 참.”

홍희가 넉살 좋게 받아쳤다. 서늘한 기운을 내뿜던 홍희도 말 잘 듣는 고양이처럼 온순한 표정으로 김세영을 보고 있었다. 김세영이 기쁜 얼굴로 웃었다.

“아참, 엄마가 집에 가서 고기 구워 주려고 장을 잔뜩 봤어.”

“뭘 이런 걸 사 와. 사 먹으면 되지.”

“얘는, 요즘 물가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장난스럽게 다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리고 내 눈에는 보였다. 백루찬이 손수 지진 라온 길드 놈들과, 몬스터 사체가 안 보이도록 기민하게 김세영의 시야를 가리는 백루찬과 홍희를. 둘 다 진심으로 김세영을 위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분에 일일이 맞춰 줄 정도로.

그리고… 백루찬이 저렇게 그 나이대 청년처럼 웃는 모습 처음 본다. 그게 신기하면서… 왠지 가슴이 욱신거렸다. 나는 결말을 알아서일까.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일까. 울컥하는 기분에 괜스레 더 밝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김세영이 나를 힐끔거리면서, 말했다.

“친구면… 같이 가서 밥 먹는 건 어때? 엄마가 맛있게 해 줄게. 응?” 

“아니 뭘….”

“가고 싶습니다! 제가 또 고기면 환장하거든요. 루찬이가 그러길 어머니께서 또 된장찌개를 그렇게 잘 끓이신- 윽.”

백루찬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보이지 않게 힘을 주었다. 나는 신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꾹 눌러 참았다.

그는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기민하게 캐치하고 이름을 슬쩍 속삭여 줬다. 나 차해준이야, 인마. 근데… 형이라고 해라. 형.

강요의 목소리에 백루찬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야…. 혀…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밥 먹고 싶으면 너네 집 가서 처먹으면 되잖아.”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김세영이 크게 웃었다. 백루찬 말투가 진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친근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좋아. 같이 가자, 해준아.”

“어휴, 너무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희야도 가자. 오랜만에 아줌마랑 밥 먹자.”

“저도 껴도 돼요?”

“얘는, 가족 같은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어?”

백루찬이 내 어깨를 잡아끌었지만, 손을 내치고 김세영 옆에 딱 달라붙어 순진한 척 웃었다.

결국 백루찬도, 홍희도 나를 떼어 내지 못하고 함께 집으로 향했다. 희희낙락 웃는 나를 보며, 백루찬이 어깨동무를 하는 척 내 옆에 붙어서 귓가에 속삭였다.

“너…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는데, 허튼짓하면 죽여 버린다.”

허튼짓은 무슨…. 이게 다 너 살리려고 하는 짓이다. 나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허튼짓 안 해. 믿어 봐라.”

“자꾸 말 놓는다?”

“아까 말했는데. 내가 형이라고.”

“이게 진짜.”

“믿어 줘. 난 너를 구하려고 온 거거든.”

진심이 튀어나왔다. 백루찬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미친놈이네, 이거.”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나는 킥킥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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