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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36)화 (136/201)

혼자 멍하니 서 있다가,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에 서둘러 정신 차렸다. 우울해하지 말자. 그건 지금 할 게 아니다. 지금은 백루찬을 구하기 위해 나서야 할 때다. 

그 생각을 하며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평범한 도로에선 횡단보도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와, 여기서 백루찬을 어떻게 찾지.

그놈이라면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 없는 놈이니 찾다 보면 찾을 수 있겠지. 더군다나 모르젠트 길드장이니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으로 거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백루찬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제한 시간이 있지만, 그건 심상 세계에 간섭했을 때 흐르는 거라 아직 24시간에 멈춰 있었다. 

그래도 빨리 백루찬을 이곳에서 깨어나게 해야 하는데 정작 놈을 찾지도 못하고 있다니…. 이러면 구해 준다고 호언장담한 스스로가 좀 쪽팔려지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일단 모르젠트 길드 빌딩으로 가 보기로 했다. 이쪽 거리는 자주 와서 익숙했다. 

익숙한 커피숍. 익숙한 상점가를 지나 빌딩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빌딩도 뭔가 낡아 보이고, 무엇보다 앞에 대문짝만 하게 써 놨던 간판이 사라져 있었다.

“진짜 뭐지…?”

설마 심상 세계에선, 모르젠트가 만들어지지도 않았나?

혹시나 해서 간섭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곤 이상하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간섭이란 게, 심상 세계에 내 존재가 드러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허망하게 건물 앞을 서성이고 있자니, 멀리서 지켜보던 경비원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다가왔다.

“거… 뭐 하러 오신 분인가?”

“아, 저… 그냥 지나가다가, 근데…. 여기 모르젠트 길드 아닌가요?”

“모… 모르, 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가쇼. 여기 영화 그룹 본사인데 뭔….”

…결국 쫓겨났다. 간판이 없을 때부터 이상했는데 모르젠트가 아니라고? 

아니 뭐야. 이러면 대체 백루찬을 어떻게 찾아! 일단 간섭 시도를 해제하니 줄어들었던 제한 시간이 멈췄다. 하씨, 백루찬 대체 어디 있느냐고! 

홀로 머리를 싸매 쥐고 이 녀석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고민할 때 였다. 건물 외벽에 설치되어 있던 전광판에서 경고음이 터지며 빨갛게 불이 들어왔다.

-3급 게이트 출현 안내.

현목로 사거리 일대에 계신 분들은 대피 바랍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이 허둥지둥하며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현목로면… 빌딩 바로 앞 거리였다. 

“하….”

나는 잠깐 고민하며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결국 게이트가 터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또 문제가 생기면 백루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여긴 녀석의 심상세계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더 상관이 없으려나…. 고민되었지만 일단은 가 보기로 했다. 

나는 게이트가 터졌다는 길목으로 향했다.

도착한 현목로 앞에는 시꺼먼 게이트가 도로 위 허공에 떠 있었다. 둥글게 이어지는 마력 파장을 보다가 갑자기 들린 괴성에 고개를 돌렸다. 

-키에엑!

기다란 꼬리를 가진, 파충류를 닮은 몬스터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아스팔트 도로가 박살이 나고, 줄지어 늘어져 있던 텅 빈 자동차들이 폭발을 일으키며 터졌다. 

벌써 몬스터 웨이브가 터진 건가? 괴물의 노란 눈이 내 쪽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야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선 뒤늦게 떠올렸다. 아 맞다. 나 지금 간섭을 꺼서 인식 안 되는 상태지.

공격이 닿을 리 없는 상태였다. 몬스터도 내가 아닌 내 뒤를 보고 있었다.

“아… 징그럽게.”

그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몸을 돌리자, 나는 볼 수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흰머리. 잔뜩 구겨진 미간을 하고 있지만 그것조차 섬세하게 예쁜 얼굴.

키가 큰 남자는 회색 눈을 빛내며 몬스터를 보다가, 귀찮은 듯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파지직 소리와 함께 황금빛 전류가 흘러나왔다.

- ---!!!

그것은 몬스터에게 적중했고, 몬스터는 몸을 떨며 전기 통구이가 되어 버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백루찬이다. 동화되어 보았던 과거의 백루찬이 아닌,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백루찬.

백루찬은 나를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언뜻 시선이 스친 것 같았지만 그것만으도 나는 바짝 굳어 버렸다. 분명 나를 보지 못하는 상태인데, 왜 이렇게 떨리냐.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홀린 듯 녀석의 얼굴을 쳐다봤다. 백루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통구이가 된 몬스터를 보다가, 게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들어가려고? 그런 생각을 했지만, 백루찬은 게이트에 진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때마침, 게이트에 이미 진입해 있던 다른 공략팀들이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왔다.

녹색 피가 묻은 무기를 들고 있는 헌터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나왔다가, 앞을 지키고 있는 백루찬을 보고 멈칫했다.

“…저놈, 걔 아냐?”

“누구?”

“길마가 요즘 공들이고 있는 각성자. 말로는 S급이라던…….”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 S급인데. 게이트에서 나온 헌터들은 백루찬을 보고 알은체를 해 왔다. 그들은 비슷한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허리에 찬 테크 웨어 느낌의 작은 스냅백에 라온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라온 길드 소속인가?

“와, 이게 누구야. 콧대 높은 S급 아니셔.”

개중 상급자로 보이는 한 명이 입매를 비틀며 나섰다. 그는 위협적으로 무기를 돌려 댔는데, 누가 봐도 위협하는 모양새였다. 저거… 뭐 하는 행동이야. 눈살을 찌푸리며 놈을 쳐다봤다. 초월자의 눈이 여기서도 발동되나.

[상태창

이름: 나길태 

칭호: 날뛰는 벼락

클래스: 창술사]

…되네. 거참, 신기하네. 아무튼, 나길태는 껄렁이는 태도로 백루찬에게 다가왔다.

백루찬은 시큰둥한 얼굴로 나길태를 쳐다봤다. 그저 그렇게 쳐다봤을 뿐인데, 나길태는 백루찬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새끼가… 앞으로 선배 될 몸 앞에서도 고개가 뻣뻣하네? 마스터가 좀 잘해 줬다고 뭐라도 된 거 같냐?”

역시 라온 길드. 예전에 학교에서 만난 놈도 혼자 급발진하지 않았었나…. 허리를 부러트릴 뻔한 놈이 떠올랐다. 이름이 반… 반휘혈이었나…. 

[반휘열입니다><]

대뜸 시스템이 끼어들어서 이름을 알려 줬다. 그딴 거 지금 중요하지 않거든?

백루찬은 가만히 나길태를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와, 내가 봐도 방금 진짜 시건방진 웃음이었다.

“누가 선배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길태가 움찔 떨었다. 백루찬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도 S급의 위압감이 그대로 풍겼다. 각성자는 더욱 예민하게 그것을 느낄 수 있을 텐데…. 나길태는 잠깐 쫀 듯하다가도 이내 목을 빳빳하게 펴고 백루찬을 쳐다봤다. 짜식…. 줏대 있는 건 인정해 주마. 근데 너무 상대가 안 좋지 않냐…. 

“라온에 캐스팅되었다고 우쭐대지 마라. 네 앞에 라온 이름이 달리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고.”

“누가 선배냐니까.”

“지금처럼 싹수없게 구는 것도 나중에 가서 후회….”

“내 말 못 들었냐. 누가 선배냐고.”

“뭐?”

나길태가 떠들다가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백루찬은 위협적으로 나길태에게 한 발 다가갔다.

평온하고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어딘지 살벌함을 풍기는 백루찬을 보며, 나길태가 뒷걸음질 쳤다. 

“수준 안 맞는 길드에, 내가 왜 가? 너 같은 놈들만 깔린 저급한 곳에.”

“너… 너 지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냐?”

“별 거지 같은 길드 이름에 기생해서 사는 너 같은 놈들과 내가 같을까? 수준도 맞아야 상대를 해 주지. 너는 너무….”

백루찬이 살짝 눈매를 휘었다. 살포시 웃는 얼굴은 아주 잘생겼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감정을 숨기던 녀석치고는 비웃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허접하잖아.”

“이 새끼가!”

결국 나길태가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들고 있던 창을 앞으로 빠르게 찔러 들어왔다. 창의 뾰쪽한 날 위에 파지직하며 전류가 맺혔다. 백루찬은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뛰는 벼락이라더니, 백루찬처럼 전격을 다루는 놈이었다. 백루찬도 그것에 살짝 놀란 듯 보였다.

놀란 것은 놀란 거고, 백루찬은 가볍게 몸만 틀어 공격을 피해 냈다. 놈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아, 저거 너무 위험한데?

“네가 믿는 수가 있었구나?”

근데 어쩌지…. 백루찬이 작게 중얼거린다. 나는 다급하게 나길태와 백루찬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러다가 진짜 위험해진다! 백루찬 말고, 나길태가!

“피했다고 안심하지 마라!”

나길태가 창을 뒤로 당기더니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휘두른다. 창의 움직임에 따라 전깃불이 튀어 올랐다. 백루찬이 싱긋 웃었다. 

위험하다, 저 웃음…! 바로 간섭을 시도했다. 나는 실체가 드러나며 변화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으나, 갑자기 등장한 나를 보고 백루찬이 눈을 좁히는 게 보였다. 나는 나길태와 백루찬이 부딪치기 전에 한야를 빼들어 나길태의 창을 밀어냈다.

- 카카칵!

창날과 검날이 만나 쇠 긁는 소리가 퍼졌다. 창의 방향을 틀고 나길태에게 파고들어 놈의 가슴팍을 퍽 밀쳤다. 가볍게…. 

“으아악!”

나길태가 가볍게 친 내 손에 뒤로 날아가서 나동그라졌다. 나는 뻗었던 손을 힐끔 보고 뻘쭘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가볍게 쳤는데… 왜 이렇게 쉽게 날아가. 

“뭐야, 이건?”

백루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목덜미가 콱 틀어 잡혔다. 백루찬의 손이었다.

“어떻게 끼어든 거지? 분명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게.”

하하…. 무서워 지리겠네. 나는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악력에 어색하게 웃었다. 백루찬은 더없이 살벌했다. 아… 이 녀석 나를 못 알아보는구나.

알아볼 리가 없다는 것을 깜박했다. 

“그… 일단 놓고 말할까?”

“너 누구야.”

내 말이 경계심을 오히려 더 키웠다. 백루찬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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