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 세계에 진입하여 백루찬과 동화되었습니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시스템이 경고를 띄웠다. 텍스트가 분해되며 공중에서 녹아내린다. 시선을 다시 돌리자, 이번에도 백루찬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손안에 온기가 느껴졌다. 옆을 보니, 따뜻한 얼굴로 눈을 맞춰 오는 여자가 있었다. 아, 백루찬의 엄마구나….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또다시 나는 백루찬에게 잠겨 들어갔다.
“애가 이상해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여자는 화를 내며 백루찬을 껴안았다. 어린이집 앞에선 교사와 원장이 단호한 얼굴로 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질린 표정으로 백루찬을 힐끔 쳐다보곤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아드님께서 다른 애들하고 좀 다르다니까요? 성격 검사 해 보시라고 저번에 권유 드렸었는데, 해 보셨나요?”
원장의 말에 교사가 동조했다.
“솔직히 좀… 애 같지 않아요. 이런 말 드리기 교사로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말씀드릴 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루찬이는 꼭….”
소시오패스 같아요. 교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가 교사의 머리채를 잡았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가 뭘 알아! 뭘 안다고 그렇게 지껄여?”
“다른 애들도 무서워한다니까요! 꺄악!”
“어머니! 이러지 마시고!”
“니들 다 내가 교육청에 신고할 거야!”
“하세요! 하시고 여긴 다시 오지 마세요! 미친 여자 아니야! 지가 잘못 낳아 놓고!”
원장이 어린이집 가방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씩씩대던 여자는 그들을 힘껏 노려보며 멀뚱멀뚱 서 있는 백루찬의 손을 잡고 휙 등을 돌렸다.
유독 꽉 잡은 손이 아렸다. 백루찬은 고개를 들어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 소시…가 뭐야?”
“알 필요 없는 거야. 네가 특별해서 저러는 거야. 너무 잘나서. 다른 애들하고 비교되니까.”
여자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백루찬은 그런 여자를 바라봤다. 교사가 꺼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무서워하는 건 눈치로 알아챘다.
그러는 엄마도… 가끔은 내가 이질적으로 보이면서. 무서우면서.
백루찬은 웃었다. 순진무구하게.
“저런 말 기억할 필요 없어. 잊어버려. 알겠지, 아들?”
“응.”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자가 단호하게 말했지만, 백루찬은 한번 들은 건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교사가 했던 모든 말이 새겨졌다. 그렇게 어린아이는 울분에 차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를 보며 함께 걸었다.
도망치듯 떠나온 어린이집을 지나고, 도착한 곳은 반지하 셋방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곤,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췄다.
“엄마 일하고 올 테니까, 집에 혼자 있을 수 있어? 가스 불 만지지 말고. 티브이 보면서. 응?”
둘은 원래 이곳에 살지 않았다. 여자의 남편은 백루찬을 제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혼을 요구하며 떠나 버린 터라, 형편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집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필 집이 있던 곳에 게이트가 터져버린 것이다.
한순간에 살만했던 형편이 어그러져 버렸다. 풍비박산이 나 버린 집은 유일한 재산이었다. 게이트로 인해 셋방으로 쫓겨나고, 정부는 게이트로 인한 재산 피해에 제대로 지원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던 여자는 고왔던 예전보다 피로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루찬은 그런 여자의 얼굴을 보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여자는 눈물을 참고 있었다. 아주 많이 슬퍼하고 있었다. 그게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백루찬은 이제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자신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린아이였지만 조금이나마 알았다. 자신의 손을 놓으면 여자는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쉬는 날 없이 나가서 고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아까처럼 유치원 교사에게 무시를 당하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유일한 온기. 추웠던 벤치로 다시 돌아왔던… 나의 엄마.
“루찬이는 괜찮아. 혼자서도 잘해.”
“그럼. 누구 아들인데. 엄마는 믿어.”
백루찬 씩씩하게 대답하며 엄마를 배웅했다. 그리고 백루찬은 생각했다. 본모습을 숨겨야겠구나. 어디서도 자신을 이상하게 보지 못하도록. 무서워하지 못하도록.
저 때문에 고달파진 한 여자의 인생을 위해 자신을 숨기고 강해져야겠구나.
게이트 따위가 안온을 깨지 못하도록.
백루찬은 결심했다.
시야가 물에 번지듯 어지러워졌다. 또다시 풍경이 바뀐다.
무수한 기억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더 이상 단순한 일로는 생계를 버텨내기 힘들었던 것일까. 여자는 결국 게이트 서포터가 되었다. 게이트 공략팀이 들어가고 난 후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면, 게이트가 닫히기 전까지 안에서 던전 부산물을 수거하는 일을 하는 직업이었다.
위험하지만 보수가 높았다. 그래서 자진해서 들어갔다.
여기저기 다쳐 왔지만, 백루찬 앞에선 티 내지 않았다. 여자는 루찬이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한번 버린 일. 그러기로 했었던 일. 그래서 모든 것을 백루찬을 위해 바치듯 키우고, 백루찬은 그것을 알아서, 학교생활을 더욱더 열심히 했다.
누구도 깔보지 못하도록, 위에 서도록.
매번 전교 1등을 차지하고, 선생님들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같은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는 특별함을 감추지 않는다. 무섭게 느껴지지 않지만, 일반 사람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영악하고 약아빠진 모습으로 학생들 사이를 선동하고, 조종하며 자신을 높이 드러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여자를 위해서.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누구보다 사랑해 주는 자신의 엄마를 위해서.
항상 아래를 향했던 여자의 시선은 어느새 자신과 눈을 맞출 정도로 훌쩍 자란 아들을 보고 있었다. 백루찬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엄마, 괜찮아?”
백루찬은 여자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서포터 일을 하면서 계속 다쳤다. 험한 일이었다. 미처 죽이지 못한 새끼 몬스터가 남아 있을 땐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여자는 웃었다. 그녀는 아들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당연히 괜찮지. 우리 아들은 공부만 열심히 해. 엄마가 다 해 줄게.”
그리고 그다음 날, 게이트에 들어갔던 여자는 한쪽 손을 잃고야 말았다.
졸업식 날이었다.
꽃 하나 받지 못하고, 졸업식이 끝나 학교가 파하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까지 여자가 올 것을 기다렸던 백루찬은 뒤늦게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 괜찮아. 아들, 미안해서 어떡하지…. 졸업식인데…. 우리 아들 졸업식인데….”
여자는 꺼이꺼이 울었다. 진심으로 미안해서. 백루찬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각성자 한 명이 게이트에 남아 있다가 서포터들을 죽이려 했다고 했다. 이번 게이트에서 꽤 큰 크기의 마석이 나왔다고 했다. 그래서 놈은 서포터가 챙긴 마석을 혼자 가지고 도망치려고, 모두를 죽이려 했다.
여자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여자는 놈의 공격을 피해 마석을 챙겨서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마석만 버렸다면, 손을 잃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이것을 자신이 꺼내 가지 않으면 아들 대학 등록금도 마련하지 못할까 봐 무서워서, 그래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정말 간신히 살아남았다.
“운이 좋았어…. 우리 아들 생각하면서 버텼잖아. 우리 아들이 복덩이야. 엄마가 우리 루찬이… 다 해 줘야 하는데…. 또 이렇게…. 엄마가 미안해.”
그녀는 자신이 손을 잃은 것 따윈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실제로 그녀는, 백루찬이 졸업식에서 부모 없이 꽃도 받지 못했다는 것에 가슴을 쳤다.
응급실에서 파리하게 잠든 여자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비어 버린 한쪽 손을 보고. 백루찬은 비가 내리는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하늘에 번개가 쳤다. 백루찬은 어쩐지 좀 서럽다고 생각했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솔직히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었고 버릴 수도 있었는데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게 대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서.
그럼에도 무슨 감정인지 알 것 같아서.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백루찬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때, 종합 병원 공원 구석에서 황금빛 전류가 터져 나왔다. 백루찬의 손에서였다.
하늘에서 번개가 자신의 주인이 태어났다고 알리듯 번쩍였다. 천둥이 몰아치고, 비바람이 억세게 불어닥쳤다.
백루찬은 그 가운데 서서 자신의 힘을 받아들였다.
검었던 머리가 잿빛으로 세어 버리고, 눈동자엔 과한 마력으로 인해 안광이 넘쳐흘렀다.
각성이었다.
그리고 백루찬은, 각성하자마자 게이트에서 서포터들에게 난동을 부렸던 그 각성자부터 찾아서 죽여 버렸다.
❖ ❖ ❖
“…하.”
눈을 깜박였다. 백루찬과 동화되었던 나는 이번엔 어느 오거리에 서 있었다. 길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데도, 사람들의 시선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진짜… 빌어먹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도 나를 못 보는 심상 세계에서, 백루찬의 심상 세계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백루찬과 동화되면서 느꼈던 그 감정들. 여자가 주었던 마음과 그걸 바라보고 있던 백루찬의 심경. 모든 것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서 더없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결국 제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무너져 버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랬구나.
네가 그래서, 나를 그런 얼굴로 봤구나.
네가 그래서….
왜 어쩌다가, 백루찬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게 된 것일까. 왜 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걸까.
백루찬의 심정이 이해가 돼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았다. 미안하고 너무 슬퍼서… 미칠 것 같았다. 왜 하필 나였을까. 네게 그렇게 소중했던 사람을. 왜 하필… 내가.
대로변의 사람들은 각자 바쁜 길을 서둘러 걸어갔다. 그 틈에서 나는 서럽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