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 씨….”
토할 것 같다.
어제 술을 너무 처마셔서인지 속이 쓰려 미칠 것 같았다. 같이 마셨던 강성찬과 김현석은 연락도 되지 않았다. 이것들… 너희는 다 재수강 예약이다, 새끼들아… 형님 먼저 졸업 간다.
나는 핼쑥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등산로 같은 학교 둔덕을 올랐다.
여긴 아무리 봐도 한국대랑 똑같았다. 이 빌어먹을 등산로도 말이다. 우리 학교가 원래 이랬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편의점에서 헛개수 하나를 사서 원샷 때리고, 어찌어찌 간신히 수업을 들었다. 다 죽어 가는 얼굴을 보고 동기들이 ‘작작 마셔라~’ 떠들었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느냐…. 나는 별 대꾸도 못 했다.
죽어 있다가 점심때가 돼서야 간신히 살아났다. 해장을 하고 뒤늦게 친구 놈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선 교정 벤치에 앉아 파란 하늘을 보면서 멍때렸다.
게이트도 뭣도 없는 세계는 평화롭다. 가지고 있는 휴대폰은 평범한 거였고.
이제 호출기가 울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도 없다. 좋다.
그때, 누가 내 등을 퍽 때렸다. 뒤돌아보니, 나와 같이 안색이 허옇게 뜬 김현석이었다.
“수업 들었냐?”
“오냐.”
“치사한 새끼… 지 혼자만 살아남아….”
“그러니까 일찍 일어났어야지.”
“하….”
김현석이 한숨을 내쉬고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일어나란 소리였다. 우리는 남아 있는 공강 시간을 때우기 위해 도서관 자습실로 향했다. 여기가… 잠자기 제일 좋아서 온 거다.
“베개 가지고 옴.”
“이응이응.”
자리를 잡아 놓고 두껍고 베면 꿀잠을 잘 만한 책을 찾기 위해 일어났다.
긴 책장 사이를 걷다가,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어제 봤던 초전 박살 게이트가 떠올랐다.
갑자기 고민이 된다. 그것을… 다시 봐도 괜찮을까.
봐도 될까.
그런 생각에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결말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봐 주지 않으면, 그런 유명하지도 않은 소설 따위 누가 기억해 주겠냐.
나라도 결말까지 보고 기억해 줘야지. 나는… 나는 그들을 기억하니까.
몸을 돌려 지나쳤던 책장 앞으로 향했다.
두껍고 커다란 책 사이에 초전 박살 게이트가 꽂혀 있었다. 어제 내가 껴 놓은 그대로인 것을 보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이런 유치한 제목의 책을 누가 봐. 그것도 학교 도서관에서. 혼자 피식 웃고는 책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났겠지? 요즘 해피엔딩 아니면 욕 오지게 먹는데.
루찬이… 게이트 잘 깨고 나왔겠지. 스스로 깨고 나왔겠지. 환각이든 뭐든. 그 녀석은 강하잖아. 강해서, 좀 기대고 싶은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섬세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능글맞게 굴던 백루찬.
송류진도 떠올랐다. 녀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우반희는. 한솔이는. 새벽이는… 홍희와 카리나는… 참, 걔는 그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혼자 상대했었는데 무사하려나.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왔지만… 이 세계는 대체, 뭐였을까.
책을 휘리릭 넘겼다. 중간중간 읽어볼까 했지만, 일단 가장 궁금한 결말부터 확인하려고 마음먹고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들었다.
[……외면한 세계는 멸망했다.
세계의 기둥은 모두 무너졌다. 기둥이 무너진 세계에서 그 누구도 버티지 못했다. 다들 죽어 버리고 만 것이다.
차원이 뚫려서 상위 차원이 침략을 거행했다. 식민지가 된 지구는 전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자원은 갈취당했고,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을 내질렀다.
최종 장이었다.
이것이… 세계의 끝.]
“…….”
나는 그대로 얼음처럼 멈춰 버렸다. 순간 내가 뭘 읽었나 싶어서, 다시 처음부터 읽었으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이게, 이게 말이 돼?
세계의 끝이 이런다고? 이렇게, 아니…이런 결말이라니.
소름이 돋았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외면이라니, 누가. 누가 외면했는데.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과 함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대체, 이게… 이게 뭐야.
“하… 말… 말도 안 돼.”
이거 누가 보면 작가 멱살 잡고, 욕을 바가지로 처먹어도 부족한… 그런… 그런 엔딩인데.
아 X발 왜 이렇게 손이 떨려. 왜, 소설 속 세계가 멸망했다는데 왜 내가 이러는 거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바닥에 나뒹구는 책이 무척이나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들이, 모두가 죽었다고?
이게 결말이라고?
몸을 돌렸다. 자습실을 지나치는 나를 보고 김현석이 불렀지만, 돌아보지 못했다.
복도를 빠르게 걷다가, 구석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면대에 물을 틀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수를 했다.
소설책이다.
그냥 소설책이었다.
흠뻑 젖은 채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숨을 내쉬었다.
“그냥… 소설이 아니잖아.”
그 세계는.
울컥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빌어먹을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누가 보면 미쳤다고 비웃을 만한 그런 행동인데,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세계다. 나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내가 겪은 것은….
…진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일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의 내가 비친다.
“…아.”
창백한 얼굴. 차해준의 모습이다. 다른 얼굴이 아니었다. 검고 그늘진 눈매. 음울하게 잠긴 눈동자.
나다. 그리고… 차해준이다. 내 얼굴은 그와 똑같이 닮아 있었다.
-파삭.
그 순간 거울이 금이 가며 깨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 무너진 거울 조각들이 세면대에 떨어졌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그 뒤로 차해준이 있었다.
깨진 거울 속 차해준이 나를 보며 말했다.
- 꿈 깨.
꿈…이라고.
- 넌 계속 꿈을 꿨던 거야.
자꾸 꿈이라는데, 대체 뭐가 꿈인 건데.
어느 세계가 꿈인 거야. 나는 모르겠다. 구분하지 못하겠다고.
울먹이면서 거울 속 차해준을 쳐다봤다. 차해준이 흐릿하게 웃었다.
-알잖아. 어느 세계가 꿈인지.
“이… 씨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비 여왕의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 잠갔다고 떠들었던… 그 목소리가.
피할 수 없다. 내 스스로 기억을 잠그고 도피에 도피를 거듭해도, 필연은 거스를 수 없었다. 운명이었다.
모든 게, 조각조각 나 있던 기억들이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맞춰졌다. 회귀를 반복하던 박복한 인간, 차해준.
그 인간은 나였다.
- 피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잖아.
도피했다. 너무 괴로워서. 나는 버티지 못해서… 이 세계를 만들어 냈다.
꿈을 꾸는 세계를.
평화롭고. 친구가 있고….
모든 것을 꾸며 냈고.
- 네가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아.
만들어 냈다. 숨기 위해서.
눈을 깜박였다. 맺힌 눈물에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나를 보는 차해준이 무척이나 쓰린 얼굴로,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앙다물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빙의가 된 게 아니었다. 나는 고통스러운 현재를 등지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잠갔던 거다.
스스로의 나를. 잠가서 꿈을 꿨던 거다.
세세하게 짜였던 것들은 다 시스템이 꾸며 낸 것이다. 무너져 가는 내 정신이 꿈을 꾸면서 무너지지 않도록.
거울 속 차해준이 물었다.
- 포기할 거야?
내가,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도망쳤잖아. 세계의 결말은 이미 정해진 거 아니야?
-네가 여기서 포기하면 그렇게 되겠지.
무서워.
- 어쩔 수 없어.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쉽게도 말한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우는 것처럼, 거울 속 차해준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발개진 눈가를 한 놈을 보며, 손등으로 내 얼굴을 문질렀다. 우는 얼굴이 처량해서 보기 싫었다. 나도 저럴 테지. 저놈은…나니깐.
- 구해야지.
그래. 백루찬을… 나의 세계를 구해야지. 정해진 결말처럼 그렇게 되게 만들지 말아야지.
내가 고통스러워도. 내가 피하고 싶어도, 나는 피하면 안 돼.
나는… 이제는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아.
- 그래.
거울 속 차해준이 웃었다. 손을 들어 거울을 매만지자, 거울 속 차해준도 손을 맞댔다.
- 해낼 거야, 너는.
차해준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것이, 내 두려움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겠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너는 나니까.
차해준은 여전히 흐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후, 내가 있던 풍경에 쩌저적 금이 갔다. 이제 진짜 깰 때구나. 나는 더욱더 흐려진 거울 속 차해준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서, 깨져 나갔다.
[…두 번째 방은 ‘심상 세계의 방’]
[깨어나셨나요?]
그제야 시스템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 ❖ ❖
“하아.”
깊게 숨을 내쉬었다. 시야가 온통 백색으로 물들었다. 다시 눈을 다시 뜨자 나는 사방이 어두운 곳에 서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눈을 깜박였다. 끝도 밑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 게이트였다.
돌아왔구나. 아니, 깨어났다고 해야 하려나.
[차원 균열을 일으키는 거대 게이트를 닫아야 합니다.
긴급 퀘스트!
게이트 ‘허구의 왕 가르디오스의 두 번째 방’이 열렸습니다!
심상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가르디오스는 당신을 진짜가 아닌 세계에서 영원히 헤매도록 만들 것입니다.
클리어런스로서 보스를 잡고 오류를 바로잡으세요!
난이도: ???
보상: ???]
X발… 진짜 극악무도하다. 영원히 헤매? 나는 눈앞에 뜬 시스템창을 꼼꼼히 읽어 넘겼다.
[메인 캐릭터 백루찬이 위험합니다.]
번쩍이며 뜬 경고 문구는 연달아 눈앞을 잠식했다. 알겠어, 알겠다고. 이제 진짜… 내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겠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밟고 있는 바닥 이외엔 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백루찬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 몸 주변과 백루찬 몸 주변만 희미하게 빛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이트에 들어오면 이렇게 되는 건가?
나는 서둘러 백루찬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완전히 기절해서 미동도 없었다. 하… 다시 보니, 왜 이렇게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너 인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꿈에서도… 걱정했다고.
“루찬아. 백루찬.”
몸을 흔들어 봤지만,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녀석을 살펴봤다. 비에 젖은 몸은 그대로였고,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코끝에 손을 대자 미약한 숨결이 느껴진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며 서늘한 뺨을 쓸어내렸다.
나는 이곳에서 내 현실을 깨달았다. 심상 세계를 통해 진실을 보았고, 내 스스로의 선택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약하고, 재수 없는 게이트다. 보고 싶은 것을 보여 주고 그것이 거짓된 것이라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니까.
“나는… 그런 결말을 볼 수가 없어서 돌아왔어.”
네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
이 세계가 끝나지 않게 하려고.
[백루찬의 심상 세계에 진입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이 물어 왔다. 시스템 이 자식에게 따질 것도, 물어봐야 할 것도 많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단 백루찬부터, 이 녀석부터.
[백루찬의 심상 세계에 진입하시겠습니까?]
급하다는 것을 티 내는 것처럼 연속으로 뜨는 시스템창에 나는 바로 대답했다.
“진입한다.”
네가 무슨 세계에 있든, 내가 구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