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강성찬과 걷던 중 이번엔 김현석을 만났다. 또다른 내 친구였다.
“오올, 오프라인으로 얼굴 보는 게 백 년 만인 거 같네.”
손을 흔들며 히죽 웃은 김현석이 강성찬을 힐끔 쳐다봤다.
“야… 근데 넌 왜 턱이 두 겹이 됐냐. 나랑 얘는 변한 게 없는데.”
“뭐래! …야 진짜?”
강성찬이 제 턱살을 조몰락거렸다. 어쩐지 좀 찐 거 같긴 했다. 나는 혀를 찼고 우리 셋은 웃으며 캠퍼스를 걸었다. 날이 봄날같이 좋았고 지나치는 학생들의 표정에도 생기가 넘쳤다. 나는 더욱 헷갈리기 시작했다.
여기… 환각이 아닌가. 나 설마, 진짜로 돌아온 건가?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게이트를 넘어 현실로 돌아왔다고? 솔직히 빙의도 갑자기 된 터라,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그러면 백루찬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오랜만에 학식 고?”
“가자, 가자.”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나를 끌고 가며 말을 거는 강성찬과 김현석 때문에 깊이 생각을 잇지 못했다.
학식을 먹고, 얼떨결에 수업 오티까지 참여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는 때였다.
“4학년… 벌써 졸업이라니.”
“그리고 금방 중간고사고.”
“씨바알 넣어 둬 넣어 둬.”
“당당히 맞서라.”
만담하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피실피실 웃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주변을 살펴봤다. 그러자 김현석이 나를 쳐다봤다.
“넌 왜 이렇게 몸을 가만히 못 냅둬? 원래 이랬나?”
“쟤 정신 빠졌다니까.”
“오우 너만 할까.”
“이 자식이… 나와. 싸워. 싸워.”
“아니 근데 무슨 일 있어? 너 지금 근심 걱정이 가득하다 얼굴에.”
역시 내 불알친구들. 눈빛만 봐도 기분을 파악하는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뭐 없어. 그냥 신기해서.”
“뭐가 신기해?”
“네놈들이 신기하다.”
“너무 잘생겨져서 신기해?”
“투턱은 닥쳐 주세요….”
“…둘 다 일어나. 싸우자.”
우린 또 투닥대며 낄낄 웃었다. 너무 평화롭고, 좋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늦게까지 친구들과 수다 떨고 카페도 가고 놀다가, 내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내 집 말이다.
걸어오는 거리도, 매번 지나쳤던 골목도 모든 게 내 기억 속 세계와 똑같았다. 매번 걸어왔던 길을 지나 도착한 내 집도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잘 아는 익숙한 ‘내’ 공간이었음에도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꼭 번지수를 잘 못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적막한 거실을 보다, 내 방으로 들어갔다.
차해준의 어두컴컴한 모노톤 집과는 달리 베이지 톤으로 맞춰진 방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진짜 돌아온 건가.”
시스템을 불러도, 그런 게 있었냐는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모든 일이 되레 환상이라는 것처럼, 지금 내 방도, 친구들도, 모든 것이 현실성 넘쳤다. 이럴 수… 있는 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침대에 털썩 누워 멍하니 눈만 깜박이다가,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PTSD처럼 불안감이 엄습해서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게이트에 빨려 들어간 백루찬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데…. 정신은 돌아왔을까. 진마하랑 떨어졌으니 그놈도 제정신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야 게이트를 벗어나지.
아니면, 혹시 백루찬도 이곳으로 온 걸까?
‘초전 박살 게이트’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하아….”
여러 가설과 생각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나는 한참 동안 방 안을 서성이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다.
***
이 세계는 지루한 듯하지만 평화로웠다. 초전 박살 게이트의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곳에선 맨날 게이트가 다발로 터지고, 대피 방송은 일상이었는데….
나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생활감 넘치는 내 휴대폰 또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배경 화면으로 해 놓은 귀여운 강아지 사진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벌써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학생처럼 지낸 지 일주일이 흘렀다.
“…….”
나는 강의실 맨 뒤에 앉아 열정적으로 수업하시는 교수님의 빤짝거리는 대머리를 바라보며 멍때렸다. 하, 저 교수님 진짜 목소리에 수면제 섞으신 건 변하지 않으신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대부분이 몰래몰래 조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일주일 동안,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
그동안 시스템을 계속 불러 보았지만 시스템은 그런 게 원래 있었냐는 듯 사라졌고, 집 밖의 도시나, 모든 것이 내 원래 세계와 똑같았다.
혹시나 싶어 한야를 꺼내려고도 해 봤지만, 빙의했던 때와 달리 몸 속에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로, 차해준이 아닌 예전의 내가 된 것이다.
백루찬과 게이트 걱정에 계속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했지만 현실성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이 세계를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이젠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진짜로, 게이트가 검은해 집단이 말하는 신세계로 가는 문이었던 걸까… 하는.
“커어어….”
옆자리에서 고개를 꺾고 코를 골기 시작하는 강성찬의 뒤통수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고는, 깜짝 놀라 깬 놈을 비웃다가 교수님 몰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교양 수업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인터넷 서핑이나 하다가, 나는 슬쩍 헌터X헌터 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다.
“…….”
뜨는 건 동일 제목의 만화책뿐이다. 무언가 씁쓸해져서 한동안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니, 뭐가 씁쓸해. 원래대로 돌아온 건데.
한숨을 푹 내쉬고, 이번엔 초전 박살 게이트를 검색했다. 한창 유행하던 소설이었으니 당연히 검색이 될 줄 알았다.
“…뭐야?”
“…큼, 뭐, 뭐?”
내 목소리에 꾸벅꾸벅 졸던 강성찬이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나는 놈을 다시 책상에 엎드리게 하고는 소설 사이트에서도 검색을 시도했다.
하지만 초전 박살 게이트에 대해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게… 왜 없지. 분명 내가, 봤는데. 나는 그 세계로 들어가기까지 했다고! 설마… 내가 다시 돌아와서 사라진 건가.
결말을, 결말을 보고 싶었는데.
무척이나 찝찝하면서도 이상하게 서운해서 나는 그대로 검색을 끝냈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점심을 챙겨 먹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제… 진짜 때가 되었다.”
“뭐래냐….”
“이제 진짜 ‘공부’라는 것을 할 때가 되었다고!”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안 드냐?”
“재수강만 아니면 돼.”
“허허….”
강성찬과 김현석과 함께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자습실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와서 공부는… 좀 많이 늦긴 했다. 원래 깊게 파면서 공부하진 않았고 대학 생활 놀자 판으로 보내긴 했지만…. 진짜 졸업하려면 하긴 해야지.
“자료 찾아서 온다.”
“어. 내 것도.”
“유치원 때 배웠죠? 자기 일은 스스로 하기.”
“아, 내 것도~!”
“꺼져.”
냉정하게 강성찬을 무시하고, 레포트에 쓸 자료를 찾기 위해 책장 사이를 뒤졌다. 교양 과목 레포트라서 그다지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 혼란스럽게 떠오르는 초전 박살 게이트 때문에 그것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책을 찾았다.
길게 늘어진 책장 사이를 걸으며 책들을 살펴봤다. 하나같이 복잡하고 두꺼운 책들을 보면서 기가 질렸다. 그냥… 구글 뒤질까. 그럼 다 나올 텐데.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정석보다 샛길로 돌아가는 게 편할 때도 있는 법.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들을 살피다가, 다른 책들보다 얇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건.”
멋들어진 타이포가 써진 ‘초전 박살 게이트’. 그 소설이었다. 절로 눈이 크게 뜨였다. 뭐야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아니, 그보다 웹 소설 아니었어? 단행본이 있다고?
황급히 책을 꺼내 들었다. 표지는 아무것도 없이 초전 박살 게이트라고만 쓰여 있었다. 낡은 표지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거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결말이 궁금하다. 백루찬은 게이트를 잘 벗어났을까. 다들 어떻게 되었을까.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어서, 계속 책을 펼치지 못하고 표지만 바라봤다.
이걸 열면… 내가 경험했던 세계가, 들어 있으려나.
활자로 적혀 있을까. 그 세계가.
나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야, 뭐 해?”
“어?”
책을 열려 했으나, 갑자기 강성찬이 다가오자 놀란 마음에 다시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 넣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자, 자료 찾지. 뭐 하긴.”
“오늘은 텄어. 현석이가 저녁 쏜대. 오랜만에 소주 먹고 뒤져 볼까?”
강성찬은 어깨동무를 하고는 은근하게 웃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 자식, 어지간히 공부하기 싫었구만.
가자고 재촉해 대는 강성찬 때문에 나는 다시 꽂아 놨던 책을 힐끔 보곤 고개를 돌렸다.
“그래. 가자, 가.”
“앗싸~.”
내일… 그래, 내일 꼭 결말을 보자. 그 애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세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이미…. 돌아왔으니까.
친구들과 죽어라 마시고, 진탕 먹고 뻗은 놈들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리고 코를 훌쩍이며 고요한 밤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 왔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실 불을 켰다. 여전히 적막한 집 안이 나를 반겼다. 여기서도 나는 혼자였다.
나는 알딸딸한 기분에 히히 웃으며 내 방으로 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하아….”
적막에 내 숨소리만이 섞여서 들렸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상하네.”
그렇게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왜 보고 싶지.
나는 혼자 헤헤 웃었다. 소설 속 이야기였는데, 내가 겪었던 것들이 너무 생생하고, 잊히지가 않아서 기분이 울적했다. 내가 했던 건 뭐지.
키스는… 나눴던 마음은 뭐였지.
붙잡아 줬던 손은, 함께하던 많은 이들은.
씁쓸했다. 백루찬이 떠올랐다. 자식아, 잘 살고 있냐….
게이트 잘 벗어났니. 네가 죽을 놈이 아니란 건 아는데….
그래도 걱정된다.
스르륵 눈을 감았다. 원래의 세계로, 나는 돌아왔다.
아니,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아예 어디에도 가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모든 게 내 꿈일 수도 있어.
졸음이 몰려왔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무래도 평생 잊지 못할 거 같다. 이 기이한 일들을.
나는…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 같아.
그렇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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