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일촉즉발
“젠장…!”
비가 무섭게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어두운 도로를 가로질렀다. 어둠의 포식 스킬을 이용해 공간을 접어서 이동했다. 어둠 속에 몸이 스며들자 시야가 휙휙 변한다. 연기 같은 잔상이 내 등 뒤에 따라붙었다. 나는 연속으로 스킬을 전개하며 이동했다.
호출기가 삑삑 울려 댔다. 아까 분명 홍희가 2급 게이트가 떴다고 했는데….
-강남 서초 2급 게이트 발생.
-연남동 3급 게이트 발생. 공략이 지체되어 게이트 터졌습니다. 주위에 계신 헌터분들은 시민들 비상 대피를 도와주십시오.
어찌 된 게 한꺼번에 터진 게이트가 5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동하면서도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깔렸다. 비 오는 검은 도시. 사이렌 소리. 괴물이 튀어나오는 게이트. 미친, 무슨 SF 영화도 아니고…. 현실은 영화보다 심각했다. 전화가 울렸다. 다해 길드 유하늘이었다.
“어딥니까.”
-다 왔어요?
“거의.”
나는 빌딩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통화를 이어 하며 몸을 날렸다. 어두운 골목을 내달리며 골목을 벗어나는 순간 스킬을 전개했고, 몸은 다시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4층짜리 건물 옥상에 착지한 후 가볍게 젖은 머리를 털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자 불빛에 환한 도시와 달리 어두컴컴하게 잠긴 도시가 보였다. 저기가 가약동이구나.
한 번도 와 본 적 없던 곳이다. 서울에 이런 곳도 있었나.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몸을 날렸다.
-검은해 신도로 보이는 사람들이 잔뜩 있어요.
“뭐라고요?”
-몰라. 다들 이상해. 눈빛이 맛이 갔어!
“신도라면… 각성자는 아니란 얘기죠?”
-그것까진 모르겠고 다들 정신 나간 것처럼 보여요. 가약동 중앙 쪽 가락로 38번지에 짓다 만 폐아파트가 있어요. 다들 그쪽으로 이동하는 중인 거 같아요. 일단 다해 길드원들이 도로 지나다니면서 주워서 모으고 있으니까 발견하면….
“백루찬은요?”
-확인 안 돼요. 으아앗! 지금 꼬리와 접촉!! 일단 통화 끊읍시다!
유하늘이 다급하게 통화를 종료했다. 꼬리라면 검은해 교단 놈들을 말하는 것일 터다. 신도가 아닌, 교법사라 불리는 교단과 깊이 관련된 내부 인물들.
멀리서 오토바이가 부릉대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 보니 한 대가 아니다. 나는 유하늘이 말해 준 위치를 확인하며 뛰었다. 가로등도 점멸한 도시 사이사이로 다해 길드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요란하게 도로를 가로질렀다.
나는 지나가는 그들을 보면서 몸을 날렸다. 그들은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빠져나갔고, 나는 건물을 뛰어넘으며 중앙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전에 보았던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신도 무리가 교법사들을 따라 게이트 앞으로 이동했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진짜 욕지거리가 흘러나와 입술을 짓씹었다. 시나리오에 나왔던 장면은 꼭 눈앞에 나온다. 악몽의 참견도 그렇고, 한일고 게이트도 그랬다.
게이트 앞에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던 흰 코트 자락이 떠올랐다. 백루찬이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에 미칠 것 같았다. 백루찬 이 녀석은 내가 그렇게 혼자 다니면 안 된다고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왜 혼자 나선 거야!
진마하가 검은해 놈들과 있을지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이동할 때였다.
-콰앙!
갑자기 한 블록 떨어진 거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나는 재빨리 그곳으로 향했다. 낮은 건물 옥상에 착지하자, 폭발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한 낫을 든 여자. 카리나가 검은해 로브를 입은 자들을 썰고 있었다.
화염이 휘두르는 낫의 궤적에 따라 퍼졌다. 그와 함께 연쇄적으로 작은 폭발들이 일어나면서 놈들이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카리나가 가까이 다가온 나를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여어.”
“여어는 무슨…. 도와줘요?”
한야를 빼어 들고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카리나가 어이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도와줘? 헛소리 오진다, 너.”
“예….”
“얼굴은 급해 보이는데… 근데 왜 네가 왔어?”
“백루찬 보셨어요?”
“여기까지 와서 S급 걱정이나 하고 있네. 그럴 시간에 새빠지게 구르는 내 길드원들부터 생각해 줄래?”
그녀는 백루찬이 여기 왔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낫을 어깨에 걸친 카리나가 순간 건물의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또 발견.”
“…즐거워 보이시네요.”
“비 맞으면서 야근하는데 기분이라도 좋아야지.”
“예… 그럼 저는.”
“웬만하면 혼자 다니지 마. 자칭 A급.”
내가 홀로 이동하려 하자 카리나가 경고했다. 자칭 A급이라…. A급으로 전혀 안 보고 있으면서.
“그래서 찾으려고요.”
“백루찬? 그놈이 당할 것 같은 얼굴은 아닌데…. 걱정이 되긴 하지.”
나는 카리나가 어떤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검은해 교단은 게이트를 열기 위해 각성자를 제물로 사용한다. 카리나도 S급에 존나… 존나 강하긴 하지만 안심되는 건 아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혼자여도 괜찮으시겠어요?”
“쓸데없는 걱정 하네.”
카리나는 코웃음을 쳤고, 저 멀리 건물 사이에서 유하늘과 다해 길드원 몇이 손을 흔들며 등장했다. 하긴 지금 여기 다해 길드원이 몇 명이나 와 있는데, 엄청나게 오지랖 부렸다.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그 녀석뿐이다.
“저는 이만-”
그리고 그때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돌아갔다. 가약동 한가운데, 높다란 건물 위였다.
멀리서도 아주 선명히 보일 만큼 거대한 마력 파장이 검은 허공에 둥근 원을 그렸다. 카리나가 욕을 내뱉었고, 나는 빳빳하게 굳어 그것을 쳐다봤다.
게이트였다.
***
“제물이 준비되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신의 음성은 교법사를 들뜨게 했다. 한쪽만 푸른 눈이 이질적인 빛을 발하며 웃었다. 교법사는 감격에 찬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아아…!”
그의 앞엔, 기절한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비에 젖어 어둑한 빛을 띠는 흰 코트를 입은 남자는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을 아주 잘 알았다. 이 나라에서, 어쩌면 세계에서 그를 모르면 이세계에서 왔냐고 농담을 지껄일, 아주 강하고, 유명한 각성자였다.
S급이라면, 엄청난 크기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신세계로 가는 통로를 말이다. 교법사가 환희에 차 엉금엉금 쓰러진 남자에게 기어갔다. 그의 신은 이렇게 대단한 각성자조차 손쉽게 제물로 잡아 왔다. 역시, 세계의 주인이자, 이상향으로 인도하는 신의 사도. 아니, 그는 신이다. 교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난간으로 향하는 진마하의 뒷모습을 좇았다.
“하아.”
진마하는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한 것이, 백루찬이 확실히 S급을 뛰어넘은 각성자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그리고 놈이 세계의 기둥이자 메인 캐릭터라는 것도.
백루찬이 가약동에 들어서자마자 진마하는 그가 있는 공간을 환각으로 비틀었다. 그동안 놈의 정신력을 갉아먹고 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백루찬은 너무 손쉽게 걸렸다.
마치… 일부러 걸려 준 것처럼 말이다.
진마하는 작게 실소했다. 설마 그럴 리가. 진마하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가, 몸을 돌려 백루찬에게 다가갔다. 잠들어 있는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진마하는 쪼그려 앉아 백루찬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좋은 꿈을 꾸고 있니?”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놈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미동도 없는 얼굴에 진마하는 웃었다.
지금 이 세계는 미쳤다. 이렇게 약점 많은 놈들에게 기둥이라는 사명을 주었으니 말이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세계가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다.
[경고! 이 이상의 오류는 멸망을 앞당깁니다.]
[허락되지 않은 힘은 사용을 멈추십시오!]
[차원 간섭을 멈추고 오류를 삭제하십시오.]
[경고!]
[경고!]
시스템이 요란하게 경고를 날렸지만, 진마하는 가뿐히 무시했다. 저것들은 경고만 해 댈 줄 알지, 실제로 나서서 제가 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
뭐… 막으려고 다른 놈을 선택하긴 했지만.
진마하는 입술을 비죽이며 차해준을 떠올렸다.
세계에 의해 선택받은 유일한 동족.
차해준을 떠올리면 혐오가 일기도 했고, 한편으론…….
진마하는 머리카락을 잡아챘던 손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시작할 때였다. 때라는 건 사실, 그의 기분에 따라 정해졌다.
“흐음, 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난간 가까이 선 진마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오류!]
[오류!]
차원에 간섭을 시작하자 손끝에서부터 저릿한 고통이 타고 올라온다. 온몸이 분해되어 흩어질 것 같은 감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진마하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으나, 뒤에 있던 신도들과 교법사들은 보지 못했다.
“오오…!”
“신이시여…!”
신도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한 방향으로 몸을 휘청댔다. 무릎을 꿇은 그들은 무척이나 신성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이지가 상실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교법사 중 한 명이 거세게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거칠고 퀭한 얼굴에 광기가 스며들었다. 교법사는 마치 홀린 것처럼, 진마하가 일으키는 기적을 응시했다.
폐건물 옥상, 진마하의 손끝에서부터 허공에 푸른 마력 파장이 들불처럼 둥글게 퍼져 나간다.
교법사가 환희에 물든 얼굴로 꿇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양손을 들어 올렸다.
비가 거세게 내리는 검은 도시 위 선명한 푸른 원형의 게이트는, 그 모습대로만 보면 정말 신이 만들어 낸 입구 같았다.
신세계로 인도하는.
교법사는 한숨같이 말을 내뱉었다.
“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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