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빗방울이 거세지고 있었다. 백루찬은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도로에 가로등만이 뿌연 빛을 만들어 냈다. 인기척이라고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백루찬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가 서 있는 도로 끝에는 커다란 표지판이 꽂혀 있었다.
-도로 끝
낡고 오래된 탓에 빗물에 녹이 섞여 흘러내린다. 표지판 뒤로는 빛이 없는 폐가들이 얼기설기 늘어져 있었다.
그는 저곳을 알고 있다. 2년 전 악마의 눈동자가 명동에서 열렸을 때, 서울 곳곳에서 크고 작은 게이트가 열렸다. 제로(0)급 웨이브로 인해 각성자들이 그곳으로 몰리고, 서울 외곽이었던 이곳은 게이트를 막지 못해 몬스터 웨이브로 짓밟혔다. 그런 지역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고, 개중 대부분이 재개발 지역으로 돌아갔지만 이곳만은 흘린 피와 정치적인 여러 이유로 인해 간신히 피해자 수습만 이루어졌을 뿐, 서울의 폐기 지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가로등조차 빛을 잃고 해가 뜨지 않는 유령 도시. 가약동.
백루찬은 무너진 도시로 향했다. 걷는 걸음을 따라 고장 났던 가로등에 하나씩 불이 켜졌다. 물기가 찰박한 아스팔트 도로를 걸을 때마다 노란빛 전류가 파파박 튀었다.
길게 난 도로를 꽤 오랫동안 걸어서 도시를 가로질렀을 때였다. 끝에서, 낯선 인영이 백루찬과 같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젖은 셔츠에도 남자는 뭐가 좋은지 고개를 까닥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뒷모습을 보고 백루찬이 멈춰 서자 그가 뒤를 돌아봤다.
갈색의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에 돋보이는 오드아이.
한쪽만 파란 눈이 퍼런 안광을 내뿜었다. 백루찬은 입꼬리를 올렸다. 서늘한 웃음이 입가에 맺혔다. 안면이 있는 얼굴이다.
“와아. 이게 누구야.”
설마 여기까지 혼자 올 줄 몰랐다는 듯 양팔을 벌린 진마하가 반가운 얼굴로 백루찬을 맞이했다.
백루찬이 조소를 내뱉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넌 대체 뭐 하는 새끼일까.”
묻는 어조였지만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투였다. 모르젠트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길드장실까지 올라와서, 저에게 공격을 가했던 놈이다. 따로 조사를 해 보았지만 등록된 정신계 각성자 중에서 저런 놈은 없었다. 전문 길드를 통해 찾아보아도, 그런 사람은 없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백루찬은 그 점이 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빡치기도 했다. 이 나라에서 제 손에 걸리지 않는 인간이라니.
그 순간 몸 안에서 들끓기만 하던 마력이 발끝을 타고 출력되었다. 비 오는 어두운 거리에 번개가 치듯 전류가 일렁이며 튀어 올랐다. 진마하를 향해 공격적으로 내려친 번개가 번쩍하며 사방에 조용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이렇게 냉대하면 나 너무 속상해? 그동안 우리 많은 대화를 나눴잖아.”
번개가 튄 곳에 있던 진마하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놈은 백루찬 앞,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실체가 따로 있는 건가. 백루찬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전류가 뭉쳐진 금빛 구가 손에 맺히면서 쏘아졌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아스팔트 도로가 튀어 올랐다. 그러나 반파되는 도로와 달리 진마하는 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백루찬은 망설이지 않고 놈을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목덜미를 움켜진 손에서 빗물에 의한 물기와 함께 전류가 튀었다.
다시 또 아스팔트가 터져 나갔다. 바닥에 처박힌 놈의 얼굴은 잡혔는데도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도 아니었다. 진마하는 재밌다는 듯 제 목덜미를 잡은 백루찬의 손등을 툭툭 쳤다.
“우리 사이에 이렇게 나오면 나 서운해.”
“같잖은 개소리만 하다간 진짜 혓바닥 뽑히는 수가 있어.”
“어우웅, 무섭다. 좋아했으면서.”
상대의 실없는 소리에 백루찬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그러자 진마하가 속닥거렸다.
-사랑하는 루찬아.
환청으로 들리던 목소리가 진마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백루찬이 눈을 부릅떴다. 손안에서 전류가 튀고, 옷깃이 검게 죽고 살갗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이번엔 진짜였는지, 말을 내뱉던 진마하가 캑캑거렸다.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이상하게 공격하는 백루찬을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백루찬의 눈이 번뜩였다.
“죽어.”
“그래, 그래. 그래야지.”
빗물을 타고 전류가 흘렀다. 백루찬의 안광을 마주 본 진마하의 파란 눈앞으로 새파란 마법진이 피어올랐다.
두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 이놈이 위협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보다 정신 지배 때문이다. 놈이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백루찬은 그동안 들어왔던 환청이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깨달았다. 하, 역시. 그렇지…….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나타난다는 게….
백루찬은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강한 반발력 때문이었다. 백루찬은 튕겨 나가며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자세는 바로잡았지만, 몸은 아스팔트 도로를 미끄러졌다.
백루찬은 다시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번쩍이며 사방에 번개가 치고, 진마하가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내리꽂히는 번개를 짧은 거리를 순간 이동 하듯 피하는 진마하에게 백루찬이 들러붙었다.
코트자락이 나부끼며 둔탁한 소음과 함께 두 사람이 얽혀들었다.
백루찬은 멈추지 않고 진마하를 몰아붙였다. 자세를 낮춰 품으로 파고들며 팔목을 잡아 밑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대로 진마하를 엎어치기 했다.
-쾅!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도 굉음이 울렸다. 진마하의 몸이 바닥에 꽂혔고, 백루찬은 놈의 머리를 구두로 짓밟았다. 밑에서 앓는 소리 대신 놈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서늘하게 굳은 얼굴이 진마하를 내려다보며 발끝에 힘을 줬다.
“아- 진짜 냉정한 새끼라니깐. 그러니까 지 엄마가 죽어도 내버려 두기나 하지.”
“주둥이 닥쳐.”
“왜에? 입만 살아 있어서 할 수 있는 게 떠드는 거밖에 없네?”
백루찬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전류가 파지직 터지면서 머리카락을 태웠지만 백루찬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전류를 가감 없이 풀고 있는데, 놈은 겉이 조금 탄 것 빼고는 영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비가 와서 백루찬에게 더욱 최적의 전투 조건이었는데도 말이다.
아까 연기처럼 사라졌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것도 혹시… 환영인가.
“넌 뭐 하는 놈이지?”
“나? 글쎄. 뭐 하는 놈일까….”
진마하는 웃고 있었다. 백루찬은 이놈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놈은 부차적이고, 본래 목적은 검은해를 잡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좆같은 환영과 환청들로 괴롭혔던 놈치고는 무언가 허술했다. 정신 계열, 특히 환각을 사용하는 놈들이 근접으로 가면 힘도 못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백루찬은 미미한 의심의 시선으로만 놈을 쏘아본 채 다시 마력을 돌렸다.
“네 시체에 대고 물어볼까 봐.”
“우와, 잔인해라….”
응축해서 벌을 내릴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끌고 와서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히게 한 벌을.
백루찬의 눈이 번뜩이더니 하늘이 쿠르릉- 울었다. 백루찬은 스킬을 전개하려고 했다. 가장 강하고, 단번에 죽일 수 있는 것으로.
“…….”
그런데 어딘지 이상했다.
백루찬은 진마하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쏟아지던 빗방울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쿠르릉 울리던 하늘도, 하물며 차게 불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멈췄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이었다.
발밑에 짓밟혀 있던 진마하의 육신이 순식간에 부피를 줄이며 녹아내려 갔다. 그것이 형체를 잃고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백루찬의 앞에 멀쩡한 진마하가 공중에서 멈춘 빗방울을 헤치며 한발 다가왔다.
“하-”
백루찬은 실소했다. 능력에 대해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겠다. 보고 있는 것이 환각인지, 방금까지 몰아붙였던 놈 또한 환각이었는지, 지금 눈앞에 비조차 맞지 않고 서 있는 놈이 환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 발짝 다가온 진마하는 순식간에 얼굴을 갈아 끼웠다.
“루찬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날 그대로의 모습을 한 여자가 백루찬 앞에 있었다.
“엄마는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핏기 없는 하얀 얼굴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백루찬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점점 다가온 여자가, 슬픈 눈으로 뺨에 손을 댔다. 백루찬은 바짝 굳어 버렸다.
온기가… 느껴졌다.
“우리 루찬이. 엄마를 구하러 와 줬구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에서, 백루찬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여자의 한쪽 눈이 새파랗게 빛났지만, 백루찬은 그것을 의식할 수 없었다.
“엄마는… 우리 아들만을 기다렸어.”
여자가 뺨을 더듬거리다가, 한 발짝 더 다가와 백루찬을 끌어안았다. 그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체온과 숨소리, 실체가 있는 여자의 손길에 입술을 악물었다. 하… 빌어먹을 새끼가….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이게 환영인지 망령에 사로잡힌 건지 아니면 자신이 정말 미쳐버린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백루찬은 복받치는 감정을 느꼈다.
밀어내야 하는데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을 아는데도, 여자 앞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내가….”
백루찬은 입술을 달싹였다. 환각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엔 내가 지켜 줄게.”
이게 거짓이라도… 잡으면 안 되나.
그러면, 안 될까.
한 번이라도….
멍하게 감겨 가는 백루찬의 눈을 보며 여자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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