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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126화 (126/201)

126화

백루찬이랑 무슨 사이냐고?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놈을 빤히 쳐다보자, 바탈은 실실 쪼개고 있었다. 음흉한 얼굴로 말이다.

가뜩이나 그 이름 들으면 지금 심장이 부담스러운데…. 나는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뭘 그렇게 물어봐. 그냥 길드장과 길드원 사이.”

“에이~! 내가 한국말 어눌하다고 놀려? 내 눈치는 미국인의 그것이야. 챙기는 게 그냥 프렌드라고 치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아. 미스터 백이 허니에게 신경 쓰는 것도 질투하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미스터 송도 이상하고?”

“…이상한 추측 하지 마라.”

“우리 허니, 인기가 너무 많아서, 나 좀 불안해?”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술이나 먹어.”

“그리고 내가 보기엔 지금 허니도 나사가 빠져 있어.”

“뭐라고?”

“다 받아 주잖아. 이것도, 저것도.”

“내가 뭘 받아 줘.”

바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봤다. 마치 가늠하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술 취했나…. 뜬금없는 말을 꺼내네. 나는 대충 무시하려 했으나. 바탈이 그다음에 꺼낸 말에 먹던 술을 내뿜고 말았다.

“둘 사이에서 재고 있는 중?”

“푸웁- 야!”

***

-…게이트 공략 완료에 힘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다 길드장님 덕분에….

“…인사치레는 됐습니다. 뒤처리하고 보고하세요.”

-넵. 알겠습니다.

통화한 상대방은 목소리만으로도 기압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백루찬은 통화를 끊고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복잡한 생각을 피하기 위해 나와서 일부러 3급 게이트를 홀로 처리했더니 게이트를 담당하던 공략팀 팀장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길드장이 나서서 처리해 버리니 되레 긴장한 것이다. 지난 며칠, 이런 식으로 직접 움직여서 게이트를 닫은 게 몇 개째였다.

어둡게 잠긴 눈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백루찬은 등을 돌렸다.

눅눅하게 젖은 땅을 밟으며 걸어가는데, 다시 호출기가 울렸다. 이번에 전화를 한 사람은 홍희였다.

“응.”

-찬, 그 게이트 우리 담당도 아닌데 굳이 나갈 필요는 없었잖아.

홍희가 투덜거리는 말에 백루찬은 습관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꿨다.

“빠르게 해결되면 좋은 거지. 공략이 빠를수록 길드에게 이득이잖아.”

-어차피 잘나가는데…. 그런 게이트보단 네 몸 상태가 더 문제라고! 비 오는 날엔 손 하나 까닥 안 하더니, 왜 갑자기 변했어? 어디 아파?

“그런 거 아냐.”

정신이 혼란스럽고, 눈앞에 자꾸 망령이 어른대니 신경을 돌리려 몸을 움직인 것뿐이다. 이것도 아프다면 아픈 거겠지만 백루찬은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홍희는 백루찬의 이상 반응을 금방 눈치챘다.

-이상해, 자꾸 숨기고.

악마의 눈동자 이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았던 자신을 옆에서 일일이 챙겼던 게 홍희였다.

모르젠트 길드가 만들어지기 전 홍희는 중소 길드를 운영하던 각성자 부부의 외동딸이었다. 소규모 인원으로 꾸려진 길드였으나 일 처리가 꼼꼼하고 빨라서 꽤 이름이 알려졌었던 길드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부모는 적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부모와 악연으로 얽혀 있던 한 각성자가 일부러 1급 게이트를 3급이라고 속였고, 당연하게도 홍희의 부모는 잘못된 정보를 믿고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수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중소 길드의 패망 요인과 비슷했지만 홍희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일이었다.

백루찬은 홍희가 자신을 처음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비가 왔었다. 교복을 입고 악에 받친 얼굴로 찾아온 홍희는 이제 막 S급으로 각성해 혼자 유명 길드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백루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고의 길드를 만들어 내 제 손으로 찢어 죽이겠다고 다짐하던 어린 얼굴을 백루찬은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 어렸지만, 뛰어난 머리와 빠른 눈치로 백루찬을 도왔고, 악마의 눈동자 사건 이후부터는… 그를 붙잡아 줬다. 죽으려는 자신을 붙들어 놓은 게 홍희였다.

좋은 애였다. 이제는 가족에 가까운 친애하는 조력자. 유일하게 꺼릴 것 없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이.

그런 홍희가 먼저 그 남자를 데려오자고 했다.

차해준을.

죽이든 살리든 일단 옆에서 두고 보자고. 삐뚤어진 마음을 알면서도 홍희는 그렇게 말했다. 홍희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길 잃은 증오가 엉뚱한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는 걸.

그럼에도 멈추지 못했다.

-…찬?

“…어.”

-…검은해 그놈들, 꼬리 또 찾았어. 다해 길드에서 연락 왔거든.

백루찬의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말해.”

-…네가 할 거야?

홍희의 걱정 어린 물음에 백루찬은 피식 웃었다. 비가 오지만, 들고 다니는 우산은 펼치지 않았다.

망령도 보이는 이때야말로 놈들을 짓밟아 버리기에 좋은 때였다. 방향을 잃은 분노를 풀어낼 수 있으니까.

“내가 해야지. 그럼 누가 하겠어.”

환청이 들린다. 계속. 구해 달라는 엄마의 목소리와 자신이 구하지 못하게 게이트를 닫아 버린 매몰찬 그 남자를 죽이라는 환청이.

다 죽이면 사라질까? 그 남자도?

차해준도 죽여 버리면, 엄마는 사라질까? 그리워하던 그 목소리가 사라질까?

백루찬은 통화를 종료하고, 조용한 거리를 홀로 걸었다.

끝에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하지만 괴로움은 지긋지긋했고….

그는 이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

“…….”

나는 말없이 바탈을 빤히 쳐다봤다. 순진한 척 눈썹을 들어 올리며 방실거리는 게 한 대 패 주고 싶다. 내가 둘 사이에서 재고 있다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냥, 모두를 구하고 싶었고, 구해야 해서 움직이고 있는 거라고.

그러나 말은 목구멍 밖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말해 봤자… 알아듣지도 못한다. 무슨 웃기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는 똥멍청이로 보는 거 아닐까. 입을 닫고 술이나 들이켜자 바탈은 히죽히죽 웃어 댔다. 아오, 얄미워.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우리 허니가 너무 똑똑해서 가지고 노는 줄 알았는데.”

“헛소리 좀 하지 말고 그냥 닥쳐라….”

가지고 놀긴 뭘 가지고 놀아!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나. 나는 그렇게 똑똑한 놈도 아니고 두 사람에게 원하는 것도 없다. 다만… 내가 빚진 게 많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송류진이 메인 캐릭터라서, 그리고 오염된 지하 도시에서… 내가 끌고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나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더라면. 차해준의 유일한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생각도 든다. 하지만 메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진마하는 언제고 송류진을 노렸을 거다.

그걸 아는데, 알고 있고, 계속해서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자꾸만 빚진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하, 또 백루찬이 떠올랐다. 혼자 있을까. 되도록 홍희에게 붙어 있으라 말했지만 백루찬이 내쫓으면 홍희가 붙어 있을 방도가 없다. 시나리오 진행에 대해서도 걱정이 되어 미치겠는데, 여러 사정이 끼어 버리다 보니 쉽게 찾아가지도 못한다.

진짜… 내가… 해친 걸까. 차해준의 과거 기억을 엿보았지만 차해준은 누군가를 해칠 만한 인물은 아니다.

휩쓸린 거겠지. 정의감에, 알 수 없는 부채감에 휘둘려서 게이트를 혼자 닫으려 애쓸 때 말이다. 악마의 눈동자도 그래서 나섰으니까. 하필 거기에 검은해도 얽혀 있었고… 하필, 하필 그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명치에 돌이 얹힌 거 같다. 이걸 대체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방도를 모르겠다. 어느새 바탈이 했던 말은 뇌리에서 잊혀 버렸다.

그런 나를 바탈은 미묘하게 쳐다보다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다.

“흐으으음.”

“또 헛소리할 거면 호텔로 가고.”

“오우 그 말 좀 위험했어. 알아? 아무튼 난 허니뿐이야.”

“일어나라.”

“와이? 헛소리로 생각하는 거야? 내 진심인데! 역시 허니는 지금 우리를 손에 쥐고 농락하는-!”

“이게 진짜….”

또 비실비실 웃으며 늘어놓는 헛소리에 놈의 입에 오징어를 잔뜩 처넣어 틀어막았다. 허니라고 따라다니는 건 넌데 왜 내 탓이야? 송류진이 했던 말이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새끼 생각보다 교활하다. 지 멋대로 상황을 꼬는 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여지가 충분했다.

놈의 입을 틀어막고 남아 있는 맥주를 원샷 하는데, 호출기가 울렸다. 홍희 이름이 떠서 나는 바탈을 노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 왜?”

- 해준 지금 어디야?

목소리가 어쩐지 다급했다. 불안감에 얼굴이 굳어졌다.

“나 여의도.”

-지금 검은해 집단 잡겠다고 길마가 혼자 갔거든?

“…뭐라고?”

- 아씨, 나는 그냥 진행 상황만 알려 주려고 한 건데 혼자 나섰어! 다해 길드가 말하기론 검은해 놈들이 모이는 장소를 알아냈다고 했거든. 근데 지금 다른 곳에 2급 게이트가 떠서 공략팀 애들 데리고 그쪽으로 가 봐야 해. 해준 네가….

“갈게.”

- 부탁해! 다해 길드도 지금 움직이고 있으니까 카리나랑 연락하면 될 거야. 자세한 위치는….

나는 홍희가 말해 주는 곳을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따로 무언가 통화하던 송류진이 때마침 다가왔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해준 씨?”

“얘 좀 부탁합니다.”

“어디 가시려고-.”

“부탁하겠습니다.”

송류진이 할 말 있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바탈이 허망한 얼굴로 오징어를 입에 물고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더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잠시만요.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해준 씨…!”

송류진이 뒤에서 불렀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바로 홍희가 알려 준 곳을 호출기로 확인하면서 걷다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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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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