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송류진은 나와 바탈을 끌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자리가 세팅된 것을 보니 꼭 미리 예약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주문하기도 전에 음식들이 나왔다. 송류진은 식기를 쥐며 환하게 웃었다.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라는 말도 있잖아요.”
“…….”
정말… 송류진답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대꾸할 의지까지 사라져 버렸다.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리고 있으려니 눈치를 힐끔 본 송류진이 제 앞에 나온 스테이크를 썰어 내 접시와 바꿨다. 그걸 본 바탈이 와인 잔을 흔들며 한 모금 마시더니 그것을 식탁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얀마… 사 주는데 깨트릴 일 있냐….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어 바탈을 흘겨보곤 포크를 들었다.
“이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감사합니다.”
“뭘요. 별거 아닙니다.”
상냥하게 대답하는 송류진을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보던 바탈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게 그건가? 남자가 한다는 폭스 짓?”
“말 좀 가려서 하십시오.”
“행동은 미스터 송부터 가려서 해야겠는걸?”
올, 받아치는 것 보소. 한국에 죽치고 있더니만 한국어 실력이 더욱 일취월장하는 거 같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눈빛으로 으르렁대는 둘 사이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자꾸 투닥대는 건데. 왜…. 말릴 이유도 없지만 그럴 힘도 없어서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둘이 내 눈빛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사이좋게 지내야지. 게이트도 같이 들어가잖아.
내가 아무런 말 없이 고기를 뒤적거리자 그제야 송류진도 바탈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바탈이 열심히 눈싸움을 걸고 있었지만 그는 가볍게 무시했다.
조용한 식사 시간은 한참을 이어졌다. 그러나 할 말도 없고 입맛도 없던 나는 깨작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몇 입 먹고 포크를 내려놨다.
송류진은 계속 나를 보고 있었는지, 포크를 내려놓자마자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네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예, 뭐. 각성자가 아플 일이 있나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데리고 온 성의가 있는데 너무 못 먹어서 눈치가 좀 보였지만 억지로 먹기엔 체할 것 같았다.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는데,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송류진은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스테이크…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서둘러서 말했지만 송류진 안색은 펴질 줄을 몰랐다. 나는 멋쩍게 뺨을 긁었다. 왜 이렇게 실망한 얼굴이야.
“걱정이 되네요. 평소 같지 않으셔서.”
미간을 좁히다가 툭 내뱉는 말에 흠칫해서 송류진을 쳐다봤다. 시선에 묻은 다정함이 보였다. 참… 기억도 못 하면서 왜 이렇게 친절하냐, 넌. 꼭 예전에 일일이 챙겨 주던 녀석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혹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모르젠트 쪽에서 회의도 미루고… 여러모로 일이 있었던 거 같아서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물어 온다. 아, 회의가 미뤄져서 더 걱정했던 거구나. 나는 또 무언가 떠올랐나 싶었지만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받은 느낌에 그냥 웃었다.
“아뇨. 진짜 괜찮습니다. 모르젠트에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나와 백루찬 사이에 일이 있었긴 하지만 그건 둘만의 일이었다. 회의는 계획대로 진행될 거고 백루찬은 일을 잘 마무리할 거다. 공사 구분 못 하는 성격도 아니고…. 너무 칼 같을까 봐 걱정되긴 하는데.
“‘그’ 게이트 건은 회의했던 대로 진행될 겁니다. 저도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있는 상태이고….”
“부담스럽게 하려고 여쭤본 건 아닙니다. 그냥.”
송류진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를 보고 옅게 웃었다.
“모르젠트가 아니라 해준 씨를 걱정한 거니까.”
바탈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애꿎은 냅킨을 우그러트렸다. 한없이 다정한 말에 면역이 없어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송류진도 대답을 바란 게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이번 닫히지 않는 게이트 진입 건은 언론에도 일부 공개가 될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시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으니 밝히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S급 각성자가 대거 자리를 비우다 보니 각성자에게 곤두서 있는 언론에게 뭐라도 던져 주려고 해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S급 각성자들만 노리고 쫓아다니는 파파라치들도 많았기 때문에 아예 숨기는 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파파라치 같은 기자들이 엉뚱하게 파고들어서 위화감 조성하는 것보다 이쪽에서 말을 꺼내 놓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각본에서도 한 것 같다. 나도 동의하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안전과 평화보단 이슈에 미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해준 씨에게 여러모로 부담을 지워 드린 거 같아서 마음이 무겁네요.”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죠.”
어차피 닫히지 않는 게이트에 내가 들어가야 한다. 오류를 제대로 잡아서 상위 차원의 간섭… 어쩌고 한 시스템의 말대로 그것을 줄이려면 확실하게 해치우는 게 낫다. 처음으로 들어간 각성자가 아니면 입장도 안 된다니까.
더군다나 반대편 ‘마계’에서 게이트를 통로 삼아 넘어오면 진짜 끔찍해져 버린다. 아직은 그때까지 15일이 넘는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그것도 금방이었다.
하, 또 퀘스트와 게이트 해결할 생각을 하니 속이 답답해졌다. 아직 진마하에 대해 제대로 알아낸 것도 없고, 사람을 제물 삼는 미친 종교도 활동을 시작했다. 거기에 진마하가 관련되어 있을 거란 심증도 있었다.
할 일이 끔찍하게 쌓여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는 기분이 참 별로였다. 거기다가 진마하가 연 게이트를 들어갔다가 백루찬과 사이도 틀어져 버렸다.
잊고 있었던 과거를 들춰낸 것처럼 백루찬은 나를 밀어냈고, 나는…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중이고.
진마하 그놈이 뭘 노리고 나와 백루찬이 게이트에 진입하도록 조절한 건지 모르겠지만, 혼란과 불화를 노렸다면 성공이다.
백루찬이 게이트 안에서 본 건 뭐였을까…. 가족을 잃었던 그 순간이었을까. 내 손에…. 하 빌어먹을. 생각만 해도 토할 것같이 속이 울렁거린다.
녀석은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온 걸까. 나라면, 만약 내가 백루찬이었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거다. 원망과 분노를 모조리 토해 냈겠지.
생각에 잠긴 나를 보던 송류진은 인상을 설핏 찡그렸지만,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바탈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무 말 없이 와인만 홀짝거렸다.
셋 다 거의 먹지도 않은 채 식사가 끝나 버렸다. 이후 원래는 신당 5동으로 가 게이트를 점검해 보려 했지만, 바탈이 갑자기 한강이 보고 싶다며 난리를 부린 덕에 우리는 한강 둔치로 향했다.
비가 계속 내려서인지 온통 어둑하고 흐려서 제대로 볼 것도 없었다. 그런데 바탈은 그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든 눈치였다.
사실 나도 꽤 마음에 들었다. 계속 혼란스럽던 마음을 잔잔한 풍경을 보며 정리할 수 있어서였다.
운치 있는 풍경을 보며 우리는 편의점 앞에 깔린 파라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송류진은 잠시 통화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주가 다양해서 좋아. 맛은 가격 값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바탈이 양손 가득 술을 사 가지고 와서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 자식이 편의점 맥주 무시해? 이거 다 세계 맥주라고… 물론 미친 물가 때문에 가격이 올라서 좀 그렇긴 한데.
나는 장난스럽게 투덜대는 바탈을 흘겨보고 맥주 캔을 하나 꺼내 땄다. 한 모금 마시고, 비 오는 풍경을 보며 또 입을 다무니까 바탈이 슬금슬금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치워라….”
쳐 내기도 귀찮아서 가만히 치우라고 말하니 그냥 웃기만 한다. 농담 같냐…. 하도 이리저리 들러붙으려 하니까 솔직히 일일이 쳐 내기도 귀찮긴 했다. 바탈이 실실 웃었다.
“우리 허니, 무엇이 그렇게 고민인지 모르겠지만 같이 알코올을 마시다 보면 풀리게 되어 있지. 내 잘생긴 얼굴을 안주 삼으라고.”
어이가 없어 콧등을 찡그렸다. 뭐래냐. 너 내 취향 아니거든? 나는 맥주가 담긴 봉투를 뒤적거렸다. 바탈은 그렇게 말해도 버터 오징어를 사 왔다. 땅콩은 왜 이렇게 많이 산 건지 모르겠네. 오징어를 뜯어서 질겅질겅 씹으면서, 나는 바탈에게 물었다.
“한판 붙을래?”
“이렇게 갑자기?”
바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국에 왔을 때 놈이 인터뷰한 걸 봐서 묻는 말이었다. 나를 보러 왔다는 말. 발렸던 게 그렇게 마음에 남으셨었나…. 뭐 물론 게이트 얘기를 하면 안 되니 내 핑계를 댄 거겠지만.
“나를 보러 왔다며. 다시 붙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와우… 우리 허니는 진짜 눈치가 없구나. 그런데 싸우자고? No. 나는 다시 처발리기 싫어.”
“그러냐.”
별생각 없이 물었던 거라, 시큰둥하게 넘겼다. 바탈은 그런 나를 빤히 보며 가늘게 눈웃음 쳤다.
“목적이 있긴 했지. 게이트 말고.”
“뭔데.”
“허니랑 미국 가는 거.”
“…뭐래.”
“허니. 진짜로 나랑 미국 안 갈래? 잘해 줄게.”
“각성자는 출국 절차 까다롭다.”
까다로운 것도 까다로운 거지만 미국은 무슨…. 지금 갈 때도 아니었다. 해결할 게 얼마나 많은데. 여전히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바탈은 내 팔뚝을 잡고 어린애처럼 졸라 댔다.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미국 가면 여기보다 더 대우받을 수 있는 거 알아? 내가 있는 길드로 와도 좋고. 허니라면 뭐든 가능한 기회의 땅이 미국이야. 돈 원해? 아니면 명예? 다 해 줄 수 있어! 알고 있지 않아?”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다.”
지금 죽느냐 사느냐 메인 캐릭터를 구해서 세계 평화를 이루느냐 멸망으로 가느냐 갈림길에 서 있는데 돈이 중요하겠냐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 말에도 바탈은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샅샅이 훑어봤다.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뒤로 빼며 놈을 밀어냈다.
“그렇게 보지 마.”
“내 뜨거운 시선을 느꼈어?”
“술이나 드세요.”
더 쓸데없는 소리를 꺼내기 전에 오징어 다리를 놈의 입에 물렸다. 바탈은 맥 빠진다는 얼굴로 그것을 씹다가, 또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어.”
“미스터 백이랑은 무슨 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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