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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124화 (124/201)

124화

목을 죄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무방비하게 누워서 받아 내기만 하자, 백루찬은 되레 흥미를 잃은 것처럼 내 위에서 비켜섰다.

막혔던 숨이 둑 터진 것처럼 몰려왔지만, 헉헉대면서도 나는 백루찬을 쳐다봤다. 등을 돌린 백루찬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마치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처럼 말하니까 미치게 불안해졌다. 비틀대면서 멀어지려는 녀석의 팔을 붙잡았으나, 백루찬이 거칠게 쳐 내며 나를 노려봤다.

붉게 달아오른 눈에 핏발이 잔뜩 선 백루찬은… 무척 괴로워 보였다.

“나는 형이 이해가 안 돼.”

“…루찬아.”

“왜 그렇게 살아? 남에게 갈 분노까지 모조리 혼자 받으면서도 반항도 안 하고.”

살기 어린 눈을 한 백루찬이 몸을 돌려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한 발 다가올 때마다 떠밀려서 뒷걸음질 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이젠 무서워요? 당신 손에 내 가족이 죽었다니까 무서워?”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서, 백루찬을 쳐다봤다. 무섭냐고? 그래. 미치게 무서워서 아무런 말도 못 하겠다. 두려웠다. 한 번도 매몰찬 적 없던 녀석이 나를 밀어내니까.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내 탓이라니까.

백루찬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뿜어내는 묘한 적대감에 숨이 막혔다. 목을 조르던 손은 풀렸는데 아직도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야… 루찬아.”

“각성자는 죽는 것도 어렵죠.”

“…그런 말 하지 마.”

“형이 해 주는 건 어때?”

차마 눈을 못 마주치고 있다가, 백루찬이 꺼낸 말에 거칠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백루찬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서, 속삭였다.

“형 손에 죽은 우리 엄마처럼.”

“…….”

“나도 죽여 주라.”

“…야.”

“할 수 있잖아. 형이라면 가능하잖아.”

백루찬이 내 손을 잡고 제 목에 들이댔다. 뿌리치며 뒤로 물러나자 백루찬이 내 어깨를 밀쳤다. 소파에 발이 걸려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나를 짓누를 것처럼 올라탄 백루찬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뺨을 쓸어내리는 손은 다정했지만, 나는 무서웠다. 제 감정 따위 한 번도 제대로 드러낸 적 없던 백루찬이 이렇게 선연한 분노를 드러내니까 더 그랬다. 놈은 충혈된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백루찬은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느리게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꺼져요, 형.”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매몰찬 말을 내뱉는다. 나는 녀석의 축객령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휘청이면서 놈의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복도를 거닐다가 벽을 붙잡고 허리를 숙였다.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려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사정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다. 말 못 할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그런데… 내 탓이라니.

백루찬은 그것을 언제부터 알았던 걸까. 처음 만남부터였나? 오래전 일을 떠올려 봤으나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나는, 웃기게도 녀석을 붙잡았고, 녀석은 그냥 흥미를 보였고.

그러다가….

“…하.”

쪼그려 앉아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감정이 물밀듯이 복받쳐 올라왔다. 빌어먹을, 진즉에 말이라도 하든가….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멍청하게 네 옆에 붙어서 허허실실 웃진 않았을 거 아냐.

***

백루찬은 소파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머리가 멍하고… 온통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과거의 그날.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보였던 악몽 같았던 그날.

성북동 게이트 때문에, 잊어버리려 애를 쓰던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고, 백루찬은 그날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을 보며 울 것 같은 눈으로 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못 했던 차해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스로도 알았다. 이건, 그냥 버티지 못한 자신의 화풀이라는 것을.

차해준이 잘못한 게 아니었다. 차해준이 죽인 게 아니다.

수없이 되뇌었던 말을 떠올려 보았으나, 가슴엔 울화가 쌓이는 것 같았다. 갈 곳 없는 분노는 어디에 풀어야 하는가. 열려 버린 게이트에? 빌어먹은 그 집단에?

검은해. 그때 엄마를 붙잡았던 놈들은 모두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엄마와 함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끄나풀이 나타났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신경은 이상하게도 계속 차해준에게 쏠렸다. 자꾸만….

‘내 사랑하는 아들.’

백루찬은 고개를 들었다. 희끗한 망령이 눈앞을 맴돌았다. 이제 다가와서 제 옆에 앉기까지 했다. 온기 없고 무게 없는 손이 저를 어루만진다.

‘아들, 나는… 살 수 있었어.’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게이트에 맨몸으로 들어간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그 뒤로 몬스터들이 대거 튀어나왔다. 그들은 들어갔던 인간의 피륙을 짓밟고 나왔을 터였다. 그러나 망령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속삭였다.

‘루찬아… 엄마는 네가 구해 주길 기다렸단다.’

‘…이 게이트를 닫지 않았더라면.’

…게이트를 닫지 않았더라면.

‘네가 와서 나를 구해 주었을 텐데.’

망령이 울었다. 울부짖으며, 자신을 끌어안았다. 백루찬은 질식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망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꾸만 흩어질 것 같은 목소리는 꿈에서도 그리던 사람의 목소리를 닮아서, 자꾸만… 자꾸만 애원하게 된다.

“…가지 마.”

‘사랑하는 내 아들. 엄마가 네 옆에 있었더라면….’

“…가지 말라고.”

‘그 남자가 게이트를 닫지 않았더라면….’

망령이 속삭였다. 닫지 않는 온기는 서러웠다. 백루찬은 멍한 눈으로 희끗한 망령을 쳐다봤다. 천천히 사라지는 망령은 제 엄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얼굴로 피눈물을 흘렸다.

‘그놈 때문이야…. 네가 나를 구하지 못한 건.’

‘원망해….’

“하….”

‘네 유일한 숨통이었던 나를 구하지 못하게 만든 그 사람을 원망하고.’

끝끝내 사라지던 망령이 마지막으로 뺨에 손을 얻었다.

‘죽여 버리렴.’

백루찬은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환청으로 인한 분노에 가슴이 조이는 것처럼 괴로웠다. 죽이라고?

죽이면 편해지나, 차해준을?

처음 만났을 때엔 그것을 고민했었으나, 그런 마음은 어느새 괴롭힘으로 변질되었다. 그냥 더 괴로워하고, 더 아프고, 제 손에서 장난감처럼 다뤄지다 부서지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어느새….

어느새, 변했다. 시선이 가고, 자꾸만 보고 싶고, 자꾸만… 입을 맞추게 되고.

옆에 있게 되었다. 자꾸만 끌려서, 자꾸만 보게 돼서. 자꾸만, 생각나서….

그러면 안 되었구나.

그냥 처음 봤을 때, 고민하지 말고 죽였어야 했나. 흔들린 것은 그때부터였다.

얼굴을 봤을 때부터.

그 사람이 게이트를 닫았던 그 사람인 걸 알았을 때부터.

백루찬은 허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망령은 사라졌지만, 환청은 계속되었다.

‘루찬아, 엄마를 구해 줘.’

백루찬은 이제 이것이 누구 때문에 생긴 것인지 잊어버렸다. 그저 과거에 잠겼다. 자꾸만 자신을 부르며 구해 달라는 목소리에 잠겨 버렸다.

눈을 감으면 그날로 되돌아간다.

악마의 눈동자가 열린 그날로…….

***

카페 창밖에는 비가 내렸다. 꼭 우울한 마음처럼 말이다. 이럴 때 날씨까지 이럴 필요는 없는데….

“…하아.”

“오우, 허니! 나와 있는데 왜 한숨? 슬퍼? 왜? 비가 와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숨 한번 내쉬니 바탈이 아이스 라테를 쪽쪽 빨다가 다급하게 벌떡 일어나 얼굴을 들이밀었다. 심각해 보이는 놈의 표정을 보며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날씨가 슬퍼? 그럴 수 없어. 최강, 최고의 각성자는 이딴 것에 Depression? 하지 않는다고! 나를 봐! 그리고 웃어, 허니. 나같이 잘생긴 얼굴을 보면 원래 웃음이 나오지. Handsome guys are the best for a change….”

바탈이 내 뺨을 양손으로 꾹 잡고는 입가를 엄지로 끌어 올렸다. 나는 짜증이 났지만 놈의 손을 쳐 낼 기운도 없어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놈을 쳐다봤다. 해맑은 이놈은… 백루찬, 아니, 모르젠트가 내게 맡긴 짐 덩어리였다. 내가 우울하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거대한 짐 덩어리. 미국의 일인자…. 지금은 ‘닫히지 않는 게이트’ 사건의 미국 측 대표자. 아주 받들어 모셔야 하는 놈이었다.

잘생긴 놈을 보면 기분 전환에 최고라고? 지 얼굴에 금칠을 떡칠하네, 아주 그냥…. 무엇보다 바탈의 얼굴은 내 취향이 아니다. 즉 바탈을 본다고 내가 기분 좋을 일은 없다는 거다.

이렇게 말하면 바탈이 또 난리를 피울 테니 나는 그냥 닥치고 앉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오우 그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보면 I'm so excited that I kiss you.”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손 떼세요.”

바탈이 은근하게 덧붙이면서 얼굴을 들이밀 때, 주문했던 커피를 받아 온 송류진이 놈의 이마를 턱 하니 밀어내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바탈이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송류진을 쳐다보고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그는 바탈이 호텔에서 나와 나에게 연락하자마자 달려왔다. 솔직히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좀 궁금했지만… 그게 더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이놈을 나 혼자 감당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표정이 아까부터 좋지 않으신데, 어디 아프십니까?”

송류진이 나를 살피며 상냥하게 물었다.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았나…. 나름 티 안 낸다고 노력하긴 했는데.

“아뇨. 그냥… 피곤해서.”

“아아…. 모르젠트에서 일이 많으신가 봐요.”

“뭐… 그것보단.”

대충 말을 얼버무려 버리자, 송류진은 나를 잠시 빤히 보더니 더 묻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이럴 땐 참 눈치 빠른 게 좋다. 말 못 할 사정이란 것을 잘 알고 있잖아.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탈이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며 여기 가자, 저기 가자 떠들고 있지만, 내 귀엔 카페에 흐는 음악보다 못한 소음이었다. 개무시했다는 소리다.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차해준 인생 참 기구하다. 갑자기 든 생각은 그런 거였다. 인생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면 하나가 또 생기고, 또 생긴다. 물론 그것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와 얽혀 있고, 또 예전의 자신이 뿌려 놓은 씨앗에서 발아한 거긴 하지만…. 또다시 한숨이 푹 나왔다.

백루찬은 그때 이후로 만날 수가 없었다. 벌써 삼 일이 지났다. 닫히지 않는 게이트에 관한 회의는 백루찬에 의해 다음 주로 미뤄진 상태였다. 그걸 핑계로라도 어떤지 살펴보고 싶었는데 원천 차단 당했다…. 혼자 두는 것도 걱정되는데 얼굴도 안 보여 주니 마음이 무거워서 미칠 것 같다. 그런데 나 같아도 보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누가… 누가 그런 짓을 한 사람을 보고 싶어 해. 자신의 가족을 해친 사람을.

과거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말 백루찬의 가족이 내 손에 죽은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사람을 해친 적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나.

의식하지 못하고, 위협을 끼쳤을 수 있다. 한라동에서 각성자 폭주로 인해 아버지까지 죽였으니까. 흔적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가족이었던 사람이 떠올랐다.

순간 잠깐 손이 떨려서, 잡았던 아이스커피 잔을 내려놨다.

한라동 사건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가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그것에 더 겹쳐서 백루찬의 일까지 알게 되니 더 미칠 것 같았다.

더 괴로운 점은, 그럼에도 백루찬은 나에게 잘해 줬다는 거다.

수상쩍고, 어딘지 모르게 괴롭히는 것 같았어도 계속 내 옆에 있었다.

내 옆에서 챙겨 주고, 부르지 않아도 의식하다 보면 옆에 있었다.

…걔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며 나를 보았던 걸까.

아무것도 모르고 웃는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착잡한 얼굴로 앉아 있으니 옆에서 계속 눈치를 보던 송류진이 내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해준 씨?”

“…아, 네.”

“다른 사람 생각만 하시니까 서운하네요.”

“…네?”

“…얼굴에 보여서.”

송류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을 껌벅였다. 그는 테이블에 한쪽 팔을 괴고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저었다.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탈 씨가 게이트 마력 파장을 조사해 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그쪽으로 가 볼까요?”

“으음, 내가 언제?”

송류진의 말에 바탈이 인상을 과장되게 찌푸리며 반박했지만 송류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만 쳐다봤다. 나는 그 뚫어지게 보는 눈빛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송류진이 씨익 웃었다.

“좋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살펴보는 건 아주 좋은 행동인 거 같아요. 가기 전에 밥도 먹을까요?”

송류진이 일어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고? 멀뚱하게 보다가 손을 잡고 일어났다. 손을 빼려 했지만, 송류진이 꽉 붙잡는 바람에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송류진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나를 이용하지 마, 미스터 송…! 그리고 허니에게서 손 떼!”

바탈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우리의 뒤를 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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