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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123화 (123/201)

123화

되풀이되는

“흐으음~”

한쪽만 푸른색 눈동자 앞에 기묘한 수식들이 황금빛을 내며 얽히다가 눈동자로 훅 빨려 들어갔다. 진마하는 눈을 깜박였다. 잠깐 눈물이 맺혀 소매로 콕콕 찍어 닦았다.

“과거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옭아맨다니까?”

노래하듯 중얼거린 말은 다른 풍경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눈앞의 다 쓰러져 가는 폐건물이 아니라.

그의 눈에는 백루찬이 보였다. 혼자서 망령에 짓눌려 가는 남자의 모습이 자신의 마음에 쏙 들었다. 물론, 모든 건 진마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정신 깊숙이 박혀 있는 트라우마를 꺼내고, 그것을 키웠다. 그리고 종국에는 잡아먹히도록 만들었다.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으니… 스스로 뛰어들게 만들어야지.”

진마하는 홀로 중얼거리면서 낡은 철문을 열었다. 녹슨 경첩이 끼이익 울어 댔다. 안에는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오래되어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계단을 밟아 위로 올라갔다. 꼭대기에 도착한 진마하는 누군가 일부러 뜯어 놓은 듯한 문을 넘어 옥상으로 향했다. 거기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며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고, 그 앞에 있던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교법사 두 명이 진마하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진마하는 감흥 없는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다가 물었다.

“준비는 잘하고 있었나요?”

웃음기 어린 물음에 교법사 한 명이 주춤주춤 일어나 말했다.

“제물만 있다면 모든 준비는 끝납니다…!”

“아아-”

진마하는 교법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난간이 있는 끄트머리로 향했다. 이제 해가 지는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진마하는 난간 앞에 서서 멀리 반짝이는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곳은 지금 서울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도시의 외곽이었다.

“제물은… 이제 곧 준비가 될 겁니다.”

그의 말에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교법사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흰옷을 입고 멍한 눈으로 앉아 있던 무리도 광기에 얼룩진 얼굴을 하며 기쁨에 절여진 듯 손을 위로 뻗어 울부짖었다.

진마하는 그들을 쓰윽 보고, 다시 도시로 시선을 돌렸다.

제물이 있어야 게이트를 연다고 얘기했지만… 사실 제물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는 얼마든지 게이트를 열 수 있었다. 물론 대가는 필요하다. 그게 사람 따위가 아닐 뿐. 진마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과하게 힘을 쓰다 보니 손끝이 미약하게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경고 문구가 잔뜩 떠올랐다.

[더 이상의 차원 간섭은 위험합니다.]

진마하는 그것을 보며 파안대소했다. 이놈의 시스템은 포기하지도 않고 끈질기게 자신을 불러 댔다.

“왜? 너희가 선택한 놈이 이 세계를 무너트릴까 봐 걱정돼?”

진마하가 홀로 중얼거리자 교법사들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들은 발작하는 것 같은 흰옷 입은 무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오류는 위험합니다.]

[경고!]

[경고!]

[……는 차원 간섭을 멈추고, 오류를 삭제하십시오.]

오류를 삭제하라는 건, 저보고 죽으라는 말이다. 자기들이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 말이다.

“…좆같은 새끼들이….”

그럴수록 분노는 타오른다.

선택한 건 시스템이 먼저였다. 아니 세계가 먼저 진마하를 선택했다. 무너져 가는 차원을 구하라고. 그래… 차해준처럼 말이다. 시스템은 자신에게 먼저 나타났고, 자신에게 먼저 의무를 부여했다. 세계를 구하라고.

“하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진마하의 표정은 웃고 있지 않았다. 과거는 이렇게 사람을 옭아맨다. 그건 백루찬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고,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없이 싸늘하게 굳은 얼굴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봤다.

***

백루찬은 어찌나 빠르게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아서, 나는 홍희와 함께 길드로 향했다. 저기압이라고 하니까 걱정된다. 백루찬은 게이트 안에서 뭘 보았던 것일까. 나비 여왕의 능력은 나에게 통하지 않았다. 비록 그 개소리에 지금 이렇게….

“…해준?”

걷다가도 정신 못 차리고 있지만. 나는 멀쩡하게 웃으며 홍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중요한 건 몬스터의 헛소리가 아니라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메인 캐릭터와 멸망할지도 모르는 세계다.

과거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어쩐지 홍희가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날 쳐다봤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가장했다.

“게이트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

“뭐가?”

“어쨌든… 모르젠트가 해결했으니까. 원래 다해 길드에게 배정된 거라며. 뭐 이득 보는 그런 거 없나?”

그냥 말 돌리려고 꺼낸 말에 홍희가 피실피실 웃었다.

“뭐야~ 이제 길드 이익도 생각해 주고. 진짜 모르젠트에 마음 둔 거야~?”

“뭐래냐…. 그냥… 어쨌든 내가 힘썼으니까 물어보는 거지.”

“그게 그 말이지~! 뭐야, 뭐야. 진짜~!”

홍희가 수줍게 웃으며 내 팔뚝을 퍽 쳤다. 방심하고 얻어맞아서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야 인마 넌 왜 스스로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거냐.

팔뚝을 매만지며 홍희를 길드장실로 보낸 나는 펜트하우스로 올라왔다. 명색이 대한민국 5대 길드 길드장이라는 놈이 갈 만한 곳이 길드뿐이라니…. 생각해 보니 나도 그렇긴 하지만 그놈도 참 그놈이다. 그것도 집하고 길드장실. 자기가 고양이야 뭐야, 제 영역에서 벗어나지도 않고.

그런 생각을 하며 펜트하우스로 들어갔다. 항상 밝게 불이 켜져 있던 집 안은 어두웠다.

“백루찬?”

시야가 어둡다고 안 보이는 것은 아니라서, 빙 둘러보니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 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팔뚝으로 얼굴을 가리고 늘어져 있는 백루찬은 어딘지… 좀 지쳐 보였다. 아까 표정도 심상치 않았는데, 진짜로 뭘 본 것일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인기척에 움찔할 만도 한데,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 상태가 안 좋나…. 아까 혹시 다쳤던 건가?

“야… 너 괜찮아?”

대답이 없어서 조심스럽게 놈의 얼굴을 가린 팔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나는 내 팔을 붙잡은 백루찬에 의해 몸이 돌려졌다.

“윽…!”

어깨를 붙잡아 누르는 힘 때문에 그가 누워 있던 소파에 처박혀 버렸다. 백루찬은 그대로 내 위로 올라탔다. 잠깐 놀라 얼떨결에 감았던 눈을 떴다. 녀석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깨어 있었으면 말을 하지, 뭔 거칠게….”

어색하게 웃으며 꺼낸 말에도 백루찬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빤히 보는 시선이 어쩐지 부담스러워서 눈을 돌렸다.

“불은 왜 안 켜고 있었어? 말 안 듣고 게이트 들어가서 그렇게 빡이 쳤냐…. 어쨌든 무사히 잘 닫았으니까….”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백루찬이 내 팔을 붙잡아 누른 덕에 나는 머리를 대고 도로 누웠다. 팔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루찬아?”

빤히 쳐다보는 얼굴이, 창백하다. 진짜 어디 다쳤나?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백루찬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 괜찮아?”

“…형은 그 안에서 뭘 봤어요?”

묻는 말에 고저가 없었다. 어딘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눈을 깜박였으나 백루찬은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보스 몹을 만났을 뿐 나는 본 것이 없었다. 나비 여왕이 기억이 잠겨 있어서 통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했지. 역시 백루찬은 무언가 본 것이다.

“아무것도 못 봤어.”

“…아아.”

백루찬은 입술을 비틀며 실소했다. 팔목을 잡아챘던 손이 풀어졌다. 백루찬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다가온 손이 뺨을 쓸어내리더니, 점점 턱 선을 타고 내려가 목덜미를 감쌌다.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백루찬은 슬며시 웃었다.

“내가 저번에 말했던 적이 있었죠.”

“…….”

“각성자는 쉽게 죽을 수가 없다고. 특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오염된 지하 도시에 들어갔을 때, 나를 따라오던 백루찬이 혼자 떠들다가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네가… 무슨 말을 했더라. 그 뒤로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서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떠올랐다. 죽으려고 여러 번 노력해 봤다던, 하지만 쉽게 죽지 못했다던 그 말. 너 인마… 왜 또 갑자기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건데.

“루찬아.”

“나 사실… 노력을 꽤 많이 했는데, 그게 진짜 어렵더라고.”

놈을 불렀지만, 백루찬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얼굴은 나를 보고 있었으나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백루찬은 내 목을 감싸 쥐고, 무언가 가늠하는 듯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피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 음험하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며 웃는다.

“안 무서워?”

“뭐가.”

“내가 숨도 못 쉬게 만들어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목이 졸렸다. 목줄기를 압박하는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세게 움켜쥔 백루찬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엔 웃는 것같이 보이지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데도 어쩐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백루찬이 걱정이 되었다. 너 진짜 무엇을 봤길래 이러냐. 과거도 무엇도 다 잃어버린 나는 제대로 기억하는 것도 없는데. 그래서 더 혼란스러운데….

너는 마치 선명하게 기억해서 더 괴로워하는 것처럼.

“윽….”

목을 압박하는 손에 괴로워서 놈의 팔을 잡았다. 백루찬은 내가 괴로워하는 얼굴을 망막에 새기듯 쳐다보면서, 조곤조곤 말했다.

“게이트를 신의 부름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는 거 알아요?”

“…으…!”

“그런 놈들이 있어. 생사람을 제물로 삼아서 게이트에 바치는 놈들이.”

안다. 그런 미친놈들이 누군지. 검은해. 유하늘과 홍희에게 들었던 이름이다. 백루찬이 과민 반응하던 것과 홍희가 숨기려 애쓰는 것을 보며 무언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나는 숨이 콱 막혀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기 힘들었다. 놈의 손을 떼어 내려 버둥대다가,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버둥거리는 것을 멈췄다. 너 인마… 그렇게,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형 알아?”

“…….”

“형이 세상을 구한 날….”

형 때문에 내 하나뿐인 가족이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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