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내 능력은 침입자들의 기억을 헤집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꺼내 놓는 거란다.
나비 여왕이 속닥거리듯 말했다. 나는 표정 없이 한야를 털어 냈다. 그딴… 개 같은 능력도 다 있구나. 하여간 정신 계열 놈들이 다루기가 어렵다. 케이든도, 진마하도. 이놈도.
그런데 뭐… 나한테는 통하지 않으니까.
나는 검을 늘어트리곤 놈에게 다가갔다. 주변에 들러붙은 작은 것들은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가루 때문에 코를 간지럽히는 거면 몰라도.
여왕이 요사스럽게 웃었다.
-궁금하지 않느냐? 네가 왜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지.
“안 궁금해.”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차해준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것도 있고. 아니, 애초에 몬스터의 말 따위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 대충 대답하며 놈의 앞에 섰다.
그냥 내버려 둬도 죽을 것 같긴 하지만 확실하게 처리해서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내 검이 여왕의 목을 단숨에 갈라 버리려 했다.
-차해준이 너인지, 네가 차해준인지.
검이 놈의 목 앞에서 멈췄다.
-회귀를 반복하던 그 박복한 인간이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여왕은 사악하게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스스로 기억을 잠그고, 다른 자가 되어 살아간다고 해서 네 업보가 사라질까? 그럴 수 없단다, 아해야.
“…미친 소리를 지껄이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제대로 알아듣질 못하겠다. 그런데, 내 검은 꼼짝없이 잡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여왕이 목덜미에 놓인 검을 손으로 밀어내며 속삭였다.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네가 했단다. 이 상황을 만든 건 너란다.
“…….”
-너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차해준이고, 너란다. 네 스스로 잠근 것이다. 감당하기 버거워서. 잊고 싶어서. 하지만 그런다고 있었던 일이 사라지겠니?
검을 잡았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놈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굳었다.
나는 차해준이다. 나는 우연히 책을 보다가 그 책에 빙의되었고, 책 속의 세상에 떨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세계를 구하라는 시스템의 종용을 받았다. 그래서 열심히… 열심히 했다.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시스템은 말했다. ‘차해준’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고…. 동기화 어쩌고 그런 말도 했었는데…. 나는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잠깐, 돌아갈 곳이 있었나?
“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눈앞에 시스템창이 미친 듯이 떠올랐다.
[경고!]
[경고!]
[원활하지 못한 %$#….1!***!!]
[( ˃̣̣̥᷄⌓˂̣̣̥᷅ )]
[안ㄴㄷ도ㅑㅐ!]
경고 문구에 눈앞이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깨어나야지. 언제까지 꿈속에서 살 수는 없잖니. 피할 수 없단다. 모든 건 네가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니.
여왕이 웃었다. 입이 찢어져라 웃는다.
-이제 시간 축을 되돌리는 것도 그만하려무나. 네 정신이….
여왕이 밀어내던 검이 움직였다. 나는 그대로 놈의 목을 단칼에 베어 냈다.
목이 떨어지며 여왕에게 붙어 있던 나비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파드득대는 날갯짓 소리가 머리를 아득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더 듣고 싶지 않다. 혼란에 혼란이 가중될 뿐이었다. 여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고 더 듣고 있다간 미칠 것 같았다.
하여간 정신 공격하는 놈들… 머리를 헤집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고.
“하….”
자꾸… 떠올리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하지만 모르겠다. 뭘 잊었던 건가…. 내가 내 기억을 잠갔다니. 하하…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들었다. 나는… 단순히, 차해준에게 빙의를 했고….
[클리어런스가 오류를 바로잡았습니다!!
‘루미네스의 동굴’ 보스 몬스터 ‘나비 여왕’을 처리했습니다!!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빠져나가세요!]
[게이트 ‘루미네스의 동굴’ 오류가 수정되었습니다!]
넋을 놓고 정신 못 차리는 내게, 시스템이 신경을 돌리려는 듯 텍스트를 띄워 댔다. 그리고 날아올랐던 나비들이 환영처럼 사라지고, 푸르게 잎사귀를 늘어트리던 나무가 순식간에 시들어 말라비틀어졌다.
“…….”
온화한 빛에 가득 차 있던 동굴의 풍경이 축축하고 어두운 공간으로 단번에 바뀌었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놓았다. 한야는 어둠 속에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개소리였어.”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몬스터가 떠든 개소리였다. 진중하게 들을 필요가 없는.
그런데 왜 이렇게… 정말 내가, 어떤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깨어나야지. 언제까지 꿈속에서 살 수는 없잖니.’
여왕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꿈, 꿈이라고.
무엇이 꿈이라고 말하는 건가.
… 모르겠다.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속이 잔뜩 꼬인 것처럼 울렁거렸다.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
처리한 게이트에서 나가자, 일대엔 여전히 사람들이 가득했다.
“해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홍희가 재빠르게 다가와 나를 살펴봤다. 어디 다치지 않았나 조목조목 확인하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괜찮아. 안 다쳤어.”
“그래? 길마가 나오고 나서 완전 저기압이라서 난 또 해준이 크게 다친 줄 알고!”
“…루찬이도 게이트에 들어왔었어?”
“해준이 들어가자마자 따라 들어갔어. 하긴 해준이 다쳤으면 길마가 부축해서 나왔겠지…. 근데 왜 저렇게 저기압이지? 안에서 뭔 일 있었어?”
“어… 아니.”
게이트 안에서 백루찬을 마주친 적은 없었다. 바로 따라 들어왔으면 분명 만났을 텐데, 뭐지? 동굴이 여러 갈래로 나눠져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 옆에서 홍희가 다행이라는 얼굴로 내 등을 팡팡 두드렸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백루찬을 찾았다.
멀리서 사람들 사이에 머리 하나 큰 백루찬이 보였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기자들과 각본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제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안에서 어떤 몬스터가 나왔습니까?”
“저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막혀 있던 게이트가 어째서 모르젠트 길드원들에게만 열린 거죠? 뭐 아는 게 있으십니까?”
“아니, 저도….”
나는 당황해서 말을 삼켰다. 진마하가 오류를 일으켜서 만들어 낸 게이트라 놈이 선택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리고 그때 우반희가 몰려든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와 내 팔을 붙잡아 당겼다.
“너 얘기 좀 하자.”
“게이트 들어갈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거라면 나도 몰라.”
“들어간 놈이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내가 어떻게 알아! 게이트를 내가 열었냐고…!”
거칠게 잡아당기는 통에 잠깐 비틀거렸다. 우반희가 서늘하게 굳어 있으니 요원들이 알아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들 눈초리가 영 곱지 않다…. 일단 해치웠으면 다행인 거 아냐? 게이트 터졌으면 더 문제였다고…!
“그렇다고 그렇게 날름 들어가 버려? 문제 일으키지 말라고 내가 경고했다. 네놈 머리통이 그것을 싹 다 잊은 거 같으니 아주 새겨 넣어 주지.”
“이럴 땐 문제를 막았다고 보는 게-.”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하자, 우반희가 서늘하게 노려봤다. 야이… 못된 놈아. 내가 나 위해서 들어간 거냐고….
“…형, 기자들이 많아요.”
우반희를 말리려 다가온 송류진이 조용히 말하며 우반희가 잡은 내 팔을 빼냈다. 우반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너 설마-.”
“나중에 따로 얘기하면 돼요. 모르젠트에 요청하면 되고. 어차피 이틀 후에 게이트 문제로 회의 잡아 놨잖아요.”
송류진의 말에 우반희는 입가를 씰룩거리다가, 몸을 휙 돌렸다. 이제 막 닫히려는 듯 마력 파장이 작아지는 게이트 앞으로 향한다. 저건 또 왜 저렇게 화가 났냐. 자꾸 문제아 취급하는데, 이 게이트 내가 안 닫았으면 더 큰일이었다고…. 공략을 못 하니 당연히 터졌겠고 일대는 마비가 되었을 거다. S급들이 몰려와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막았겠지만 그래도 피해가 없을 순 없었을 거 아냐.
나는 우반희를 막아 준 송류진을 힐긋 보곤 말했다. 송류진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라, 조금 쫄았다.
“…감사합니다.”
“…인사 받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이틀 후에 다시 보는 건 맞으니까. 그런데….”
“네.”
“괜찮습니까?”
“네, 뭐… 다치지도 않았고.”
나비 여왕의 말이 계속 머리에 남아 거슬렸지만, 그것 빼고는 괜찮았다. 힘도 별로 안 들었고.
송류진은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잠시 침묵했다. 왜… 왜 그렇게 보냐.
“안색이… 별로 좋지 않네요.”
송류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내 뺨을 더듬었다. 티가 났나. 이상한 소리를 잔뜩 들었더니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감동이네요.”
“…너무 그렇게 웃지 마세요.”
“…예?”
“…아무렇지 않은 척도 하지 마시고요.”
송류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말에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유일한 친구였던 놈은 다르다. 기분도 얼굴만 보고 파악하고 말이야.
“저희가 해결했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번 게이트가 처음 보는 유형이라 당황스럽긴 했어요. 진입 자체가 불가라니….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고. 아마 반희 형도 알고 있지만, 걱정돼서 거칠게 나왔던 것일 겁니다. 이해해 주세요.”
우반희는 그냥 제 생각대로 일이 안 풀려서 성질을 내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포장해 주다니. 어차피 탓할 생각도 없었다. 나 같아도 이상하게 느껴질 테니까.
게이트는 진마하가 만들어 낸 거고, 놈은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 두 사람만 진입이 가능하게 만들어 놨다. 즉, 나와 백루찬을 노리고 꾸민 일이라는 건데…. 정작 안에서 만난 몬스터는 괴상한 헛소리나 지껄이는 약해 빠진 놈이었고.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죠. 맡은 일이 있으니. 그럼, 저는 이만….”
걱정인 건 백루찬도 게이트에 들어왔는데, 나는 놈을 보지 못했다는 거다. 보스 몹은 나쁜 기억을 불러서 보여 주는 몬스터였다. 백루찬이 뭘 봤을지 걱정이 되었다. 혼자서 사라진 놈을 찾아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인사하고 가려고 하는데, 송류진이 다시 한번 나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묵묵히 나를 보다가 잡았던 손을 놓았다.
“…아닙니다. 다음에, 또 봬요.”
“…예.”
송류진의 굳어진 안색이 좀 걱정스러웠지만, 지금은 백루찬이 먼저였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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