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성북동 게이트
[오류로 인한 게이트입니다. 클리어런스가 나서야 합니다!]
시스템이 계속 경고 메시지를 띄웠다. 그래, 알아. 나도 알겠다고. 이거 진마하가 만든 거란 거.
확신이 들었다. 검은해와 진마하는 연관이 있고, 진마하는 게이트를 열 수 있다.
그놈은 메인 캐릭터를 노리고 있다. 세계의 기둥을 죽여야 세계가 멸망하니까. 그렇다면 이 게이트도 메인 캐릭터를 노리고 열린 것일까.
나는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쓰윽 훑었다. 이곳에 있는 각성자들은 무수히 많다.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이곳에, 다른 메인 캐릭터가 있는 것일까. 세 명을 찾았고 두 명이 남은 상태였다. 나는 게이트 앞에 있는 카리나와 송류진을 응시했다. 혹시 설마 카리나인가.
하지만 카리나는….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걱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백루찬이 영상을 보고 눈썹을 씰룩였다. 무언가 아는 눈치인데 설마 진마하를 아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나는 속으로 부정했다. 그는 진마하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보지도 못했다.
“다해에선 이들이… 그놈들이래. 내 생각에도 맞는 거 같아. 게이트 앞에서 이런 미친 짓을 할 놈들이 그놈들밖에 더 있겠나 싶고.”
홍희가 백루찬 눈치를 보며 설명했다. 백루찬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나는 한숨을 삼켰다. 하, 젠장 맞게도….
[긴급~~ 퀘스트!!
상위 차원의 간섭에 영향을 미치는 오류 게이트를 발견하였습니다! 클리어런스의 적극적인 해결이 필요합니다.
-게이트 ‘루미네스의 동굴’이 열렸습니다. 몬스터 ‘나비 여왕’을 죽이고 오류를 처리하세요!
난이도: 1+
보상: ???]
퀘스트가 떠 버렸다. 내가 해결해야 한단 소리다….
“…저거 내가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은데.”
내 말에 홍희가 이 뭔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입가를 씰룩였다. 이미 앞에서 진을 치고 준비하는 각성자들이 한 트럭인데 갑자기 끼어들겠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고 좀 그렇긴 한데….
어쩌겠냐. 휴. 나도 까라면 까야 하는 평범한 클리어런스…가 아니라 아무튼,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내가 처리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류이고, 안의 등급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이왕이면 제일 센 놈이 가서 한 방에 처리하는 게 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백루찬이 중얼거렸다.
“…영웅 놀이에 심취했어요?”
“…야.”
얀마,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거 알지만, 절대 아니란다. 누구는 가고 싶어서 가겠냐고. 나는 입술 끄트머리를 약하게 들어 올렸다.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내가 갈게.”
“못 가요, 형. 이미 다해 길드가 먹기로 했어.”
“재량으로 어떻게 처리 안 되냐?”
슬슬 움직이려 몸을 풀자 백루찬이 황당하게 쳐다봤다.
“형이 꼭 나서야 할 이유가 있나? 한국에서 열리는 모든 게이트 형이 처리해야 돼요? 그런 쓸데없는 사명감이 있었나?”
“그런 이유 아니라니까.”
“다해가 나섰고 예카테리나 길드장이 들어갈 거예요. 피해도 적을 거고. 저쪽도 우리만큼 등급 높은 베테랑들이라고요.”
막무가내로 뛰어 들어갔던 오염된 지하 도시 게이트랑도 다르다. 그때 다들 웬 미친 각성자 하나가 게이트에 밀고 들어갈 줄 몰라서 못 막았던 거지, 지금은 진입 준비까지 마친 상태다.
다 아는데…. 나는 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오류의 ‘확실한’ 제거는 클리어런스만 가능합니다.]
[클리어런스가 오류를 바로잡지 못할 시, 상위 차원의 간섭률이 올라갑니다.]
상위 차원의 간섭률. 마계와 연결된 게이트가 생겨 버린 이상, 만약 간섭률이 올라가면 게이트가 열려서 그놈들이 튀어나올 가능성도 농후했다. 더 큰 미래의 피해를 막기 위해선 어쨌든 나서야 한다는 소리다.
그래서 저 각성자들을 뚫고 어떻게 들어가지. 그 생각을 하며 슬슬 움직였다.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면 게이트는 어찌어찌 처리할 수 있겠지만, 나중이 위험하다. 백루찬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내 팔을 붙잡았다.
“형, 진짜 왜 이래.”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때였다. 백루찬이 나를 말리려 입을 열 때, 게이트 앞에서 진입을 시도하던 각본 공략팀이 당황해서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뭐라고요?”
“입장이… 안 되는데요?”
공략팀 요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반희를 바라봤다. 옆에서 보던 카리나가 요원을 밀치고 게이트 앞에 서서 몸을 냅다 날렸다. 보통이라면 쑥 빨려 들어갔을 텐데, 요동치는 검은 아가리는 카리나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았다.
“X발 뭐 이딴 게 다 있어?”
카리나가 열이 뻗쳤는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나는 백루찬의 팔을 뿌리치고 게이트 앞으로 향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웨이브가 일어날 때까지 지켜봐야만 한다는 거야?”
“설마…!”
다들 당황해서 책임자를 찾아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나는 각성자들을 헤치고 게이트 앞에 섰다. 나를 발견한 우반희가 소리쳤다.
“…차해준! 너 꼼짝도 하지 마!”
나는 고개를 돌려 우반희를 쳐다봤다. 내가 뻗은 손은 게이트를 쑥 지나쳤다. 야… 어쩌냐. 이건 내 의지가 아니라고.
우반희가 나를 막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내가 한야를 꺼내 잡는 게 더 빨랐다.
“아니… 되는 사람이 해결을 해야지.”
그 말을 끝으로, 놈이 나를 붙잡기 전에 게이트 안으로 넘어갔다.
***
차해준의 옷자락 끝이 손끝을 스쳤다. 우반희는 자신을 틀어막는 게이트 앞에서 빡침을 간신히 눌렀다.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경고를 했건만!
물론 이 상황이 차해준이 의도한 상황이 아니란 건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화가 났다. 저놈이 자꾸 나서 대는 것이.
게이트가 사람 차별하는 건 듣도 보도 못 했다. 저번에 입장하고 나갈 수 없던 적은 있었으나, 그런 경우는 주로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면 게이트가 도로 열렸고, 간혹 있는 패턴의 게이트였다. 그런데 이런 게이트는 처음이었다.
우반희가 한껏 당황에 빠져 있을 때 그 뒤를 백루찬이 지나쳤다. 우반희가 흠칫해서 백루찬을 쳐다봤다. 백루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게이트에 손을 뻗었다. 입구 앞에서 투명한 막에 막힌 것처럼 들어가지 못하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백루찬에게도 게이트가 열렸다.
“…어쩔 수 없네.”
백루찬이 중얼거리며 우반희를 돌아봤다.
“게이트 처리하고 나올 테니, 대충 상황 정리나 하고 있어요.”
백루찬은 심드렁하게 말하고 게이트로 들어갔다. 카리나가 방방 뛰었다.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뭔데!”
우반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옆에 있던 송류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게이트에 다가가려 한 발 움직이자 우반희가 그를 잡아챘다.
“너까지 지랄하지 마라.”
싸늘하게 일갈한 우반희가 뒤돌아서 다른 각본 요원들과 현 상황에 대해 무어라 명령했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돌발행동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건 좋지 않다. 송류진은 우반희의 말을 이해했고 납득했다. 자신은 여기서 뒤를 준비해야 한다. 허나….
송류진은 우뚝 멈춰 선 채 게이트를 바라봤다.
이상한 박탈감이 몸을 잠식하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송류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옆에… 있지 못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나는 게이트에 들어오고 나서야, 왜 이 게이트가 입장자를 차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게이트 ‘루미네스의 동굴’에 진입했습니다!]
[오류로 인한 게이트 진입 제한이 걸려 있습니다.
진입 가능한 공략자: 차해준, 백루찬]
그러니까… 애초에 오류로 진입할 수 있는 사람을 둘로 정해 버린 거다. 진마하 그 새끼, 게이트를 열면서 이런 술수까지 부릴 수 있다니, 대체 능력의 한도가 어떻게 되는 건가 싶다.
이런 걸 조작할 수 있으니 오류인 건가.
그런데… 대체 무엇을 노리고, 나와 백루찬만 입장할 수 있게 한 걸까?
놈이 메인 캐릭터를 죽이려 하고 있고, 이번에 위험에 빠지는 사람이 백루찬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시나리오상에서 백루찬이 위험한 순간은 이런 게이트가….
아니지. 그 앞의 상황 같은 것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니 여기서 검은해에게 납치를 당했던 것일 수도 있다. 진마하가 나섰을 수도 있고.
하, 백루찬이 나를 쫓아왔던 거 같은데, 그놈 설마 자기도 들어오진 않겠지. 제발 밖에 있어라. 제발.
온갖 생각이 그득그득 차올랐고, 그와 함께 걱정도 차올랐다. 나는 손에 쥔 한야를 더욱 꽉 쥐었다.
게이트는 상상했던 것과 달리 다큐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동굴이라더니, 둥글게 파인 곳은 그 시작점처럼 보였다. 내 앞엔 얕아 보이는 연못이 있고, 그 위로 천장에서 햇빛이 길게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몇십 미터는 될 만한 높이의 까마득한 구덩이. 나는 가장 밑에 있었고, 그 위에는 푸른 하늘이 보였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위를 올려다보다,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종유석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 달린 동굴은, 은은하게 빛이 새어 들어와서 어둡지 않았다.
뭔가… 굉장히 평화로운 풍경인데.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몬스터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사방이 고요했고, 내가 걸을 때마다 물기 어린 이끼를 밟는 소리만 났다.
풍경은 볼만했지만 게이트 특유의 불길함이 있어서, 감상은 길게 하지 못했다. 빠르게 처치하고 나가야지.
나는 천천히 동굴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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