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헤이~”
바탈이 송류진을 보며 손을 들었다. 주변에 몰린 사람들은 각본의 송류진이 다가오자 힐긋힐긋 눈치를 보며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보라고, 내 인기~ 이 정도야.”
“위험한 짓은 그만하시고, 이제 가시죠. 시간이 늦었습니다.”
“오우 벌써?”
“게이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할 것도 있고….”
송류진이 멀찍이 서 있는 차해준을 힐끔 보자 바탈이 알겠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러곤 주먹으로 가볍게 송류진의 가슴팍을 툭 쳤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한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뭡니까?”
날카로운 표정에도 바탈은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 웃었다. 그러고는 친한 척, 송류진의 옆에 바짝 붙었다.
“미스터 류.”
“…송류진입니다, 저는.”
“그래, 미스터 송. 이번엔 너무했어. 나의 허니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I can't believe you're talking bad.”
송류진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데 집중하고 있어서 들을 줄 몰랐지만, 역시 S급이라 다 들었나 보다. 바탈은 코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송류진의 안색을 살폈다. 눈빛이 미묘하게 날카로웠다. 송류진은 저런 눈빛을 아주 잘 알았다. 자신 또한 바탈을 그렇게 보고 있었으니까. 견제, 경계,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한, 약간의 오만함이 섞인 그런 눈빛.
“혹시 그거야?”
바탈이 왜 저런 눈으로 보는지, 그가 왜 한국에 왔는지, 노리는 게 ‘정말’로 무엇인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송류진은 가만히 바탈을 쳐다봤다. 바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질투?”
송류진은 참지 못하고 결국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바탈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우리는 광화문에서 벗어나 모르젠트 길드로 향했다. 이제 슬슬 백루찬이 걱정되기도 했고, 바탈뿐 아니라 송류진에게도 너무 많은 신경을 써서 정신머리가 빠질 것 같았다.
신경 쓰인다니… 대체 왜. 뭐 때문에? 송류진이 한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혹시 뭔가 생각이라도 난 건가. 떠오른 게 있나. 이걸 물어볼 수도 없고….
녀석을 힐끔 쳐다봤지만 아까보다 표정이 굳어 있어서 말 걸기가 더 쉽지 않았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했길래 바탈은 희희낙락하고 송류진은 표정이 저러지. 뭔가 바탈이 속을 뒤집었을 것 같긴 한데….
“가라.”
“허니~ 내일도 나를 데리러 와!”
“개소ㄹ… 아니 내가 왜….”
“허니는 미스터 백에 의해 선택된 나의 가이드이니까~”
“…….”
이놈이랑 얘기하면 머리가 다 아프다. 나는 자꾸 찝쩍대는 놈을 호텔에 밀어 넣고 송류진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길드로 가시는 거죠?”
“네. 아무래도….”
“…다음에.”
“네?”
송류진은 걷다 말고 멈춰 서 나를 바라봤다. 일렁이는 눈빛에 걱정이 담긴 거 같은데… 웬 걱정이지. 그러나 송류진은 금세 표정을 지워 내고 옅게 웃었다.
“아뇨. 다음에도 바탈이 불러내면 저도 불러 주세요. 혼자보단 둘이 감당하기 쉬울 테니.”
“아하하, 그쵸…. 감사합니다.”
송류진은 다른 것을 말하려던 것 같았지만, 말을 돌렸다. 우리는 모르젠트 앞까지 와서 헤어졌다. 이거 꼭… 나를 일부러 데려다주는 것 같네. 호텔하고 그렇게 멀지도 않았는데. 나는 멀어지는 송류진의 뒷모습을 보다가 길드로 들어갔다.
당연하게 길드장실 먼저 들렀는데, 백루찬과 홍희가 같이 있었다. 그래도 진짜 홍희가 같이 있었던 건 맞네…. 백루찬 혼자 있는 건 불안했는데.
“해주운~ 잘 놀아 주고 왔어?”
“끌려다니다 왔다….”
백루찬과 무언가 얘기하고 있었던 홍희가 책상에서 몸을 떼고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와, 기가 쪽 빨린 것 같다….
그나저나 카리나랑은 얘기 잘 했나. 백루찬은 아까 왜 그렇게 무섭게 변했던 걸까…. 검은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싸늘하게 굳었던 얼굴이 아직 눈에 선했다. 백루찬을 힐끔 살피니, 지금은 아까와 다르게 평소의 모습대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인데… 다행인가?
“왜 그렇게 봐요?”
책상에 앉아 있던 백루찬은 조용히 일어나 소파에 드러누운 내 옆으로 왔다. 머리맡에 놈이 앉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시선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왜 그렇게 보긴 뭐… 내가 어떻게 봤다고.
“내가 그렇게 신경 쓰이나?”
…완전히 돌아왔구만. 슬슬 신경을 건드리는 어투로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나는 내 위로 얼굴을 들이민 백루찬의 뺨을 턱 잡아서 밀었다.
“신경 안 쓰이겠냐.”
“흐음.”
“그렇게 보지 마라….”
왠지 모르게 민망하니까. 그윽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백루찬이 웃는데, 홍희가 그 모습을 요상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넌 또 왜, 뭐.
“둘이 모야아~?”
은근하게 몸을 배배 꼬며 말하는 홍희를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거, 저거 봐. 무슨 생각 하는지 얼굴에 뻔히 보인다.
“아니거든.”
“뭐가아?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무튼… 아니라고.”
“응, 응. 알겠어어~”
전혀 듣고 있질 않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휴, 바탈 상대하다가 이놈들이랑 있으려니 또 기 빨리는 거 같다.
백루찬이 내 표정을 보고 쿡쿡 웃었다. 에이씨… 무시하고 눈을 감으려는데, 홍희가 나를 불렀다.
“아, 해주운~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갑자기…? 뭐, 그래.”
홍희가 나를 끌고 길드장실을 나섰다. 이렇게까지 할 얘기야? 백루찬을 힐끔 보니 웃는 얼굴로 무언가 생각에 빠진 표정이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아직 추스르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이 그렇게 타격이 컸나…. 다해 길드장은 대체 왜 그런 얘기를 꺼낸 거지.
“무슨 얘기야?”
홍희는 나를 끌고 아예 자기 사무실로 데려갔다. 지금 백루찬 혼자 있는데…. 좀 걱정돼서 머뭇댔더니 홍희가 벌컥 문을 열었다. 사무실엔 따분한 얼굴의 유하늘이 앉아 있었다. 다해 길드 아직 안 갔네?
“이제 오면 어떡해요? 나 너무 오래 기다렸잖아.”
유하늘이 시큰둥하게 말하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았다. 홍희는 그를 째려보고는 나를 끌고 소파에 앉혔다.
“할 얘기가 뭔데…. 이분이 들어도 되는 얘기야?”
“어, 그게 좀 복잡해졌는데. 아무튼.”
홍희는 대충 내 말을 끊고 심각한 얼굴로 나와 유하늘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까 얘기 들었지? ‘검은해’라고.”
카리나가 말한 이름 아니었나. 또다시 꺼내진 이름에 조용히 귀를 열고 들었다. 백루찬이 이상하게 반응하던 이름. 검은해가 대체 뭐길래 그렇게 과민 반응 했던 걸까. 홍희는 왜 이렇게 심각하고.
“설명해 줄게. 해준이 궁금한 것들.”
“…좋아.”
안 그래도 궁금했다. 다해 길드장이 그 말을 백루찬 앞에서 일부러 꺼낸 것도, 그것을 위해 찾아온 이유도 말이다. 홍희는 설명을 시작했다.
“‘검은해’는… 해준은 잘 모르겠지만 2차 제로 웨이브가 터지기 전, 2035년쯤에 한번 크게 이슈가 된 적 있던 사이비 종교 집단이야.”
“사이비… 종교?”
“세기말에 별별 사건이 다 터지잖아? 1차 제로 웨이브가 터지고 나서 생긴 그 집단도 그런 단체였어. 그들은 게이트가… ‘이상향’으로 가는 문이라고 말하면서 신도를 모았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는데… 원래 그릇된 믿음이 가장 무서운 거 알지? 생각보다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나오는 변화된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런 얘기를 믿는 신도가 많아졌어. 언론에 이슈가 될 정도로.”
언론에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는데… 나는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물론 차해준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테지만. 홍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늘진 속눈썹 아래 차게 식은 눈동자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고작 믿음 가지고 이렇게까지 얘기하지 않아. 문제는 그다음이었지. 그들이 진짜로 게이트를 열었거든. 문을 여는 제물이랍시고, 사람까지 죽여서 말이야.”
“…뭐?”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어서, 홍희를 바라봤다. 방금 제물이라고? 내가 봤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 제물. 그 앞에 쓰려져 있던… 백루찬.
“사람을 죽였어. 더 큰 문제는 진짜 게이트가 열렸다는 거야. 상지동 주택 밀집 구역에서 하필. 하지만 그땐 게이트가 4급 정도밖에 되질 않아서 각본에서 막을 수 있었어. 실제 그들이 제물을 받쳐 게이트를 열었던 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아무도 몰라. 각본도, 다른 길드도. 이게 소문이 퍼진다면 여론이고 뭐고 가뜩이나 게이트 때문에 난리인 상황에 더 문제가 될까 봐 그 일을 각본이 숨겼어. 그 단체 이름까지 싹 다 여론에서 지워 버렸지. 알려지면, 눈에 띄면 더 문제가 될까 봐.”
각본이 그렇게 숨기고자 노력했는데도, 검은해 제물 사건은 알음알음 사람들 입을 타고 퍼졌다. 검은해 집단은 박해받는 신앙인처럼 신도를 모으고자 했고, 비밀리에 검은해 집단은 세력이 더욱 커져 갔다.
“…게이트를 열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하는 건데?”
이해가 되질 않아서, 떠듬떠듬 되물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유하늘이 홍희 대신 입을 열었다.
“문을 열었으니 들어가야죠. 검은해 신도 중 뽑힌 자들이 은혜를 입었다며 열린 게이트로 들어가요. 그들에겐 게이트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을 테니까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런… 미친 짓을 한다고? 각성자도 아닌 일반인들을 데리고?
“아무튼 상지동 때는 미수로 그쳤지만.”
홍희는 이걸 정말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더욱 집중해서 홍희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건… 내가 들어야 했다. 앞으로 있을 시나리오 진행 내용과도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교법사가 뭔가 했더니, 교의 법을 설파하는 자. 이제 알 거 같았다.
“교법사 그놈들은 10년 뒤에 또 하나 큰일을 터트렸어. 이건 해준도 알 거야. 게이트 ‘악마의 눈동자’.”
눈이 부릅떠졌다. 바짝 굳어 버린 나를 똑바로 보면서, 홍희가 말을 이었다.
“제물이라는 명분하에 수십 명을 죽인 다음, 악마의 눈동자가 열렸어. 정말… 그들이 제물을 바치고 연 것처럼.”
차해준이 부동의 1위로 이름을 알리게 된 사건. 악마의 눈동자 게이트. 2번째 제로 웨이브이자 많은 희생자가 있었고, 거기서 보스 몹이 튀어나왔다.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게이트 때문에 차해준은 회귀를 반복했다. 오직 악마의 눈동자를 닫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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