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우… 나는 진짜 왜 따라왔는지 이해, 할 수 없어. 허니와의 데이트인데!”
“누가 데이트야….”
혼자 씩씩대며 걷는 바탈을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잔뜩 삐진 티를 내며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양손 가득 쇼핑백 들고 하는 말 따위 신빙성이 전혀 없거든? 너 지금 존나 신나 보이거든?
“허튼 소문이 퍼질까 봐 우려되어 따라온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경 쓰여! 완전 신경 쓰여 미치겠다고!”
송류진의 차분한 말에 바탈이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너 그러면서 은근슬쩍 쇼핑백 나한테 넘기지 마라….
하, 진짜 어쩌다가 여기까지 나온 거지.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있는 곳은 광화문 한복판이었다. 바탈은 나를 끌고 여의도 백화점부터 들러서 싹 털고, 경복궁을 돌았다. 내가 진짜 애인하고도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궁궐 데이트 코스를 바탈과 돌았단 말이다…. 벌써 시간은 저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바탈은….
“저 사람이 바로! 대왕 세종! 크으! 사진 찍겠어! 남겨야 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신나 있었다. 나는 놈이 사진 찍는다며 집어 던진 쇼핑백을 들고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송류진도 상당히 지친 얼굴이었다. 따라왔는데 설마 이럴 줄은 몰랐던 거겠지…. 서울 구경이라길래 대충 뭐 하려는지 예상은 했지만 말이다….
“허니! 나와 셀카를 찍지 않겠어? 나의 숨겨 두었던 마음, 이제 모두에게 보여 줄 거야.”
“…이상한 소리 그만하면 찍어 준다.”
“무엇이 이상? 나의 마음! 나는 I mean it!”
“너 그 입 좀 닥… 닫아라. 좀.”
이제 나는 바탈에게도 말을 놓았다. 하도 옆에서 정신 사납게 들러붙고 말을 걸어 대는데 이걸 진정시키다 보니 은연중에 놓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바탈은 외국인이라 그런지 그런 거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뭐 나야 편하지만…. 그래도 미국 히어로 취급받는 유명한 헌터에게 이래도 되나 싶은 기분은 든단 말이지….
“해준!”
“알았어, 알았다고.”
항복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바탈이 신나서 나를 끌고 이번엔 이순신 동상 앞으로 갔다.
“이순신! 내가 준견하는 강한 남자! 허니 다음으로 준경해!”
“준경이 아니라 존경. 존, 경….”
“오우, 존?”
“…….”
천진난만하게 쳐다보는 얼굴을 보고 나는 그냥 닥치고 들이밀어지는 카메라를 향해 손으로 브이를 했다.
어쩔 수 없이 웃어 준다는 듯 입꼬리를 억지로 틀어 올리고 말이다. 바탈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뺨을 바짝 밀착하곤 연신 사진을 찍어 댔다. 찰칵, 찰칵, 찰칵…. 야, 인마 몇 장을 찍는 거야, 이제 그만해!
놈의 얼굴을 밀어내고 있을 때, 멀리서 지켜보던 몇 사람들이 다가왔다. 교복 입은 남자애들이었는데 그들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저… 혹시… 사진… 찍어 주실 수 있나요?”
바탈이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나는 놈 대신 교복 소년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죠. 찍어 줄게요.”
소년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다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래, 이맘때쯤이면 미국 히어로 무비에 뻑갈 만하다. 바탈이 한국에서도 인기가 있었군. 속으로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줘 봐요. 내가 찍어 줄게.”
“아… 음, 네. 감사합니다.”
교복 소년들이 무언가 아쉽다는 얼굴로 나를 힐끔 보고는 바탈 옆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뭔가… 내가 놓친 게 있는 거 같은데.
눈치를 보다 웃으며 사진을 찍어 줬다. 바탈은 신나서 자신이 보기에 멋져 보이는, 정말 아메리칸 스타일의 포즈를 취했고, 소년들도 덩달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저… 혹시… 사인 좀….”
“사… 사진 저희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뒤로, 지켜만 보던 몇몇 사람들이 자신감을 얻었는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어휴, 당연히 되죠. 나는 충실히 사진 기사 역할을 수행해 줬다.
근데 다들 어쩐지 나를 쳐다보는 눈이 아련한데… 내 착각인가. 아무튼. 바탈 주변으로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왔다.
바탈이 할리우드 스타처럼 일일이 인사하며 사인을 해 주었다. 바탈이 생각보다 쉽게 바운더리를 허락하자 너도나도 달려드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식은땀을 훔치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한둘씩 나에게 다가오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쩐지 다들 쉽게 오지 못하고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서로 속닥거리기만 했다. 왜 저렇게 보지. 내가 한야라는 소문 때문인가….
뒤로 물러나서 잠시 한숨 돌리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아이스티를 불쑥 내밀었다. 고개를 돌리자 송류진이 음료를 들고 옅게 웃고 있었다.
“고생 많으시네요. 드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고생… 고생이지. 나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시원한 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좀 살 것 같다. 바탈 주변은 여전히 시끌시끌하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허니라고 부르며 오버 떠는 모습만 보다가, 진중한 얼굴로 살포시 미소 지으며 사인을 해 주고 팬을 대하는 바탈을 보자니, 뭐랄까… 거기서 미국에서 괜히 랭킹 1위로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헌터들을 히어로라고 부르는데. 저런 일들에 익숙한 거겠지. 저걸 뭐라고 하나. 에티튜드?
“너무 믿지 마세요.”
“네?”
바탈을 지켜보고 있는데, 송류진이 말했다. 의문스러운 말이었다. 너무 믿지 말라니. 제가 엄청나게 믿은 것도 아니었는데요.
“해준 씨가 옆자리를 쉽게 내줘서 하는 말입니다.”
“…제가요?”
“그를 받아들이시는 게 스스럼없어 보여서요.”
내가… 그랬나. 들러붙고 허니, 허니 해 대는 바탈이 느끼하긴 했지만, 어쩐지 강아지 같은 강영원이 생각나기도 해서 적당히 받아 준 건 사실이었다. 끌어안거나 손을 잡아도 그냥 한숨 쉬며 그대로 놔두기도 했고. 그런 모습 때문에 이런 말을 꺼내는 건가…? 송류진은 나를 보며 말했다.
“본모습이 아니니까.”
“…본모습이 아니라면.”
“덜떨어진 모습, 방방 뛰고, 혹은 부드럽게 누군가를 위하고, 가식에 익숙하고 연기에 익숙한 남자예요. 특히 저 사람은….”
송류진은 위협적인 ‘적’을 본다는 눈으로 바탈을 응시했다. 낮게 깔린 경계심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저게 바탈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경계심은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바탈은 소탈했고, 귀찮게 달라붙는 게 있었지만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대단한 각성자라고 우월감을 느끼는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 과한 걱정은 아닐까요?”
“과하지 않아요. 바탈, 그는 머니펄레이터(manipulator)니까. 쉽게 말하면, 조종자라고 하죠.”
바탈의 클래스 명이다. 그게 그런 뜻이었나.
“상대방에게 교묘하게 파고들고, 어쩔 땐 단번에 찍어 누르죠. 그가 왜 미국에서 랭킹 1위가 될 수 있었는지 들으면… 해준 씨도 놀라실 겁니다.”
“아….”
뭔가… 사연이 굉장한 놈이었구나. 차해준에게 개처발린 놈이라서 은연중에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나라 헌터, 그것도 랭커라면 분명 어떤 목표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을 텐데 말이다. 그것을 신당 5동 게이트라고 말했지만… 무언가 더 있을지 모른다.
송류진은 살짝 굳은 나를 보며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물론… 해준 씨가 그와 상성이 안 맞기 때문에 저 남자가 이렇게 꼬리를 내리고 있는 거겠죠.”
“상성… 말입니까.”
“당신의 스킬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요.”
무슨 소리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런 것도 몰랐냐고 놀랄까 봐 참았다. 내 스킬이 어둠과 그림자 속성인 건 알고 있다. 중력이라고 했으니까… 바탈이 중력을 다루는 건가. 그래서 칭호가 압살자인가?
“바탈은 당신에게 질 수밖에 없어요. 이길 수 없다고 해야 하죠. 하지만 바탈 그는 생각보다 명예욕과 과시욕이 대단한 편이라….”
송류진은 조금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정말 당신이 ‘그’가 맞다면… 아니 맞는 거겠지만.”
송류진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나를 쳐다봤다. 나에 대한 기억을 다 잊은 놈은 이제 내가 한야가 아닌지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내가 그놈이고, 그놈이 나다. 한야라고, 내가. 속 시원하게 말해 줄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입을 열어서 각본의 시선이 더 꽂히면 힘든 건 나겠지.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우반희도 알고 있고, 거의 모두가 알아 가는 분위기이기도 했지만… 일단 내가 인정 안 하면 미등록자 혐의 같은 건 안 따라붙지 않을까? 나는 지금 A급 헌터니까.
혼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납득하고 있다가, 송류진에게 물었다.
“…이런 말은 왜 하시는 겁니까?”
그래. 꼭 마치 걱정하는 것처럼 말했다. 저 사람은 견제해야 한다고 알려 주는 것처럼. 혹시 무언가… 떠오른 걸까. 그래서, 아까 나를 붙잡았던 거였을까.
“그냥.”
송류진은 바탈을 보던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미묘하게 찌푸려진 인상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에 나도 송류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신경 쓰여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 송류진은,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고는 사람들 틈에 갇혀 있는 바탈에게 걸어갔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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