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항상 여유롭고 느긋하던 백루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데 눈에 금빛 안광이 서렸다. 저거 마력…! 말려야 될 것 같아서 다가가려는데, 부서진 문이 쾅- 하며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홍희가 다급하게 열어젖힌 탓이었다.
“자, 잠깐만!”
당황한 홍희도… 처음 본다. 홍희가 급하게 들어와 카리나와 백루찬 사이에 끼어들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무슨 행패인가 했는데, 너무 예민한 걸 건드리시네요? 일단 알겠고.”
홍희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휘며 카리나에게 눈빛으로 안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백루찬의 이상 반응에서 무언가를 느낀 건지 순순히 일어났다.
“우, 우리 나가서 얘기할까요?”
홍희의 다급한 손짓에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백루찬은 그때까지도 살기 어린 눈으로 카리나를 쳐다봤다. 홍희가 나에게 몰래 손짓으로 ‘챙겨!’ 말하곤 카리나를 끌고 유하늘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문은 이제 닫힌다는 의미도 사라질 만큼 부서진 상태여서 그들이 빠르게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해’가… 대체 뭐길래 이렇게 과민 반응인 거지. 저렇게 굳어 버린 백루찬은 처음 본다. 카리나가 나가고, 백루찬의 시선은 어딘지 멍했다. 공허하고, 무언가 망상에 빠진 눈빛. 나는 천천히 백루찬에게 다가갔다.
“…루찬아.”
불렀지만 백루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백하게 굳어 버린 얼굴이 안타까웠다. 그게 너와 뭔가 연관이 있는 거냐? 이런 얼굴 하면 반칙이야. 마음 아프잖아. 나는 굳어 버린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백루찬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는 갑자기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백루찬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너 괜찮냐?”
물었지만, 백루찬은 뺨을 비비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안 괜찮구나. 조용히 녀석의 머리를 감싸 안아 줬다. 그게 뭔지,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다행이다. 백루찬은 진정하려는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천천히 나를 밀어냈다. 고개를 들고 나를 보며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형.”
“…진짜?”
“형.”
“어.”
“나 혼자 있을래. 자리 좀 피해 줘요.”
밀어내며 말하는 것에 나는 더 괜찮냐고 묻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전혀 괜찮지 않았기 때문에 더 묻는 것도 백루찬의 신경을 건드리기만 할 것 같았다.
나는 웃는 녀석의 얼굴을 힐긋 보고는 길드장실을 나왔다. 파리하게 경직된 얼굴이 마음에 걸려서 주춤댔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기에 자리를 피해 줬다.
길드장실을 나와 일단 홍희 사무실로 향했다. 무슨 일인 건지 대충이라도 들어야겠다. 한마디에 그 백루찬이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다니…. 검은해는 대체 뭐지? 카리나는 그걸 왜 백루찬에게 말한 거고….
하루가 완전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모르젠트 와서 저렇게 과민 반응 하는 건 처음 보는데…. 앞으로 걱정해야 할 일들이 태산인데, 또 하나가 끼어든 것 같았다.
시나리오도, 내 수명도, 또 다른 메인 캐릭터도 찾아야 하는데 말이다. 가장 큰 건, 저런 백루찬이 당황스럽고,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는 거다. 혼자 놔두는 게 진짜 맞나. 다시 가서 같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호출기가 울렸다. 홍희인가 싶어서 액정을 확인하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송류진.
나는 그 이름을 잠시 쳐다보다가, 전화가 끊기기 전 받았다.
“…네. 차해준입니다.”
-안녕하세요, 해준 씨. …따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
물기 맺힌 아메리카노를 쭉 빨았다. 분위기 있는 재즈 음악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지금 있는 곳은 모르젠트 빌딩 바로 옆에 있는 카페였다. 백루찬이 혼자 있으면 좀 불안해서 멀리 떨어지기 좀 그랬는데, 송류진은 내가 망설이자 먼저 모르젠트 쪽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송류진을 힐끔 쳐다봤다. 반듯하게 앉아 옅은 미소로 나를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송류진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뵙자고 한 것은….”
“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고….”
“아, 네…. 바탈 루스번도 한국에 온 이유가 분명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차해준 씨에게 신당 5동 게이트 일을 한번 들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각성자로 그곳에 홀로 들어가셨으니까요.”
…그것 때문이었구나. 사실 좀 걱정은 하고 있었다. 혹시 악몽의 참견 게이트가 닫히지 않은 이유가… 델루델루….
[데빌루데스라고욧…]
시스템이 깜박이며 등장했다. 그래, 데빌루데스 그 마족 놈이 강림해서 그런 건 아닌가 하고 생각은 했다. 게이트를 처리하면서 마족이 강림했다는 얘기는 아무리 찾아도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머뭇대자 송류진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뭐 걸리는 거 없지?
“그때, 좀 이상한 일이 있긴 했어요.”
나는 그때 있었던 일을 찬찬히 설명했다. 죽었던 몬스터가 다시 살아나서 많이 다쳤던 일. 정한솔의 각성까지.
“…몬스터가 좀비였습니까? 듣기론 개 모양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뇨. 번견 맞습니다. 그것들을 애완동물…이라고 했었죠.”
놈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애완 인간… 으. 진짜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다. 강림 직전에 나왔으니 다행이었지…. 혹시 모르니 나는 마족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한국에서, 게이트 내에 마족이라는 놈들이 등장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마족…은 없었습니다. 마족이 만든 공간에 대한 명칭 같은 건 있었지만.”
그렇다는 건 그때가 마족이라는 놈들이 처음 등장한 건 맞는 거 같다. 거기를 다시 들어간다니, 물론 내가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꺼림칙했다. 홍희에게도 미리 말은 해 놔야겠다.
“각본에 자료 같은 게 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게이트 내에 마족이란 몬스터도 전 세계적으로 살펴보면 어딘가에 나왔을지도 모르니까 그 부분도요.”
송류진은 신중하게 말했다. 그러고선 무언가 호출기로 적어 보내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해준 씨.”
“아… 네.”
나도 몸을 일으켰다. 너 진짜로 그것 때문에만 나를 찾아온 거구나. 조금은 기대했었는데… 혹시나. 무언가 떠올랐을까 봐.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시스템이 없앤 게 돌아올 리가 없지. 나는 송류진을 따라 카페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그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조사 내용이 나오면 모르젠트에 정식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그러곤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송류진을 쳐다봤다. 웃는 얼굴. 진짜로 괜찮아 보이는데… 왜 난 안 괜찮냐.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나는 송류진의 손을 잡았다.
“저야,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네요. 그럼….”
“혹시.”
악수를 하고, 자연스럽게 놓으려는데 송류진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송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아 제가….”
“…예.”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송류진은 계속 망설였다. 어딘지 좀 긴장한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녀석은 계속 내 손을 꽉 붙잡고 말을 꺼내지 못하고 나만 쳐다봤다. 당황해서 깜박이는 눈꺼풀과 속눈썹이 보였다.
“제가… 혹시.”
“…네.”
“…당신을.”
“둘이 뭐 해?”
그때였다. 분위기를 깨듯 갑자기 고개를 불쑥 내민 바탈이 마주 잡고 있는 나와 송류진의 손을 탁 끊어 버렸다. 갑자기 여기서 얘가 왜 나오냐. 덩달아 긴장했던 나는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송류진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뭘 말하려고 했던 거지. 내가 바탈을 무시하고 송류진을 쳐다봤지만, 송류진은 한숨을 내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바탈이 순진무구한 낯빛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뭐야. 뭐 했어? 우리 허니랑, 이쪽, 그, 그….”
“송류진입니다.”
“그래, 류진? 미스터 송! 뭘 한 거지?”
“…하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여기에 왜….”
“나야 커피 사러 왔지? 모르젠트에 머무니까! 그런데 둘이 분위기가 이상하잖아. 그래서 끼어들었어. 왜냐하면 우리 해준, 나의 허니거든.”
“…무슨 소리 하세요.”
바탈이 씨익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 과도한 친밀한 척은 뭔데…. 난 댁을 어제 처음 봤거든? 바탈은 내가 단호하게 손을 내치자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나를 쳐다봤다.
“오우 허니~ 내 손은 안 잡아 주는 거야?”
“…이러지 마세요.”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당황스럽다. 이 사람, 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 개처발린 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던 거냐….
“꺄악! 바탈!”
“헉, 송류진도 있어!”
“차해준이다!”
계속해서 들러붙으려 하는 바탈을 밀어내는데, 주변에 인파가 몰렸다. 원래도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 거리였지만, 이쪽에 다니는 사람들은 길드원들이 익숙해서 이러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다른 데서 온 것 같은데….
카메라를 든 몇 사람이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 대고, 바탈이 그 소리를 듣고 내 옆에 바짝 붙어 예의 호기로운 미소를 지으며 포즈를 취했다. 범인 너였냐.
“역시 슈퍼스타는 피곤해. 어쩔 수 없어.”
바탈의 말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송류진이 나에게만 눈짓으로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하, 나도 가야지. 혼자 심취해서 여러 포즈를 취하는 바탈을 두고 가려는데, 놈이 내 팔을 붙잡아 당겼다.
“허니이! 나 서울 구경하고 싶어! 허니 내 일일 가이드!”
“…혼자 구경 많이 하세요.”
“no, no! 미스터 백이 허니에게 나를 맡겼다고!”
미스터 백이라면 백루찬? 아니 왜 나한테 바탈을 맡겨? 내가 자기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미스터 백이 부마스터가 옆에 있으니 부탁한다던데?”
바탈이 씩 웃었다. 내 팔을 잡아당기면서 부추기는 놈을 보다가, 하는 수 없이 끌려갔다. 홍희가 있다니…. 길드원 입장에서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고….
인파가 우리를 따라 움직인다. 하… 제발 다닐 거면 조용히 좀 다니자.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바탈이 잡은 내 손을 빼냈다. 고개를 돌리자, 간 줄 알았던 송류진이 서 있었다. 송류진은 조금 민망해하더니, 나와 바탈 사이에 껴들면서 말했다.
“서울 구경, 같이 가요.”
“no!!”
바탈이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지만, 송류진은 그런 바탈을 무시하고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괜찮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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