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아무리 생각해도 백루찬이 그 사이비 무리에게 어떻게 끌려가는 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녀석을? 대체 어떻게?
곁에서 지켜본 바로 백루찬을 공격한다는 건, 더군다나 납치까지 한다는 건 쉽지 않다.
S+급 각성자에다가 눈치는 물론이고 상황 파악도 빠르다. 머리가 아주 쌩쌩 잘 돌아가는 녀석이란 말이다. 힘으로도 꿀리지 않으며 하다못해 속임수가 있더라도 금세 파악하고 혼자 생글생글 웃고 있을 녀석인데… 이런 녀석을 대체 어떻게 끌고 간 걸까.
그렇다고 시나리오가 잘못되었을 리도 없고….
백루찬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기자, 내 시선을 느낀 녀석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진짜로 백루찬 옆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길드장실로 나와서 업무를 보고 있던 백루찬은 내가 진짜로 졸졸 쫓아다니자 좀 황당하다는 눈치였다.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냐, 나 한다면 하는 놈이라고.
“…이제 회의해야 하는데. 회의 때도 있을 거예요?”
“내비둬~ 어차피 준 씨는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 거거든?”
웬일로 안경을 낀 홍희가 나를 보며 수줍은 척 웃었다.
“아이, 준 씨는 준 씨 거. 그런 준 씨는 우리 거.”
“뭔 소리 하는 거야….”
“벗어날 수 없다~ 그 소리지~”
홍희가 콧노래를 부르며 소파를 돌아 사무실 한편에 놓인 기다란 책상 앞에 앉았다. 저거 회의용이었구나. 매번 놀러 왔을 때마다 장식용으로만 놓여 있어서 안 쓰는 줄 알았다.
그때, 길드장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홍희가 들어와~ 소리치자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나는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있다 슬쩍 자세를 바로잡았다. 뭐야,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 회의가 있었던 거였냐….
들어온 사람들은 남녀가 섞여 있었고 모두가 각성자였다. 한번씩 나를 보고 훑어 내리는데… 어쩐지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마치 신기한 생물을 본 사람들처럼 눈을 반짝이는 게….
“나, 나 나가 있을게.”
“왜요. 딱 붙어서 지켜 준다며.”
“야, 그런 말을….”
이렇게 사람들 많은 데서 떠들면 어떻게 해!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미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다들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아니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나는 더 있지 못하고 슬금슬금 일어나 길드장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저들끼리 수군대며 나를 살펴보던 사람들이 홍희에게 “저분이….”라며 무언가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는데 끝까지 다 듣지 못하고 나왔다.
문을 달칵 닫고, 기대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루찬 옆에 딱 붙어 있겠다고 하면서 붙어 있은 지 이제 하루째였다. 확실히 사사건건 옆에 있으려니 불편함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위험에서 지켜 내려면 이게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일고 사건 때도 내가 천새벽에게 가까이 있었기에 구할 수 있었으니까. 안 그랬다면 그들을 구하기 전에 보스 몹이 나와서 다 쓸어 버렸을 거다. 시나리오에는 고등학교가 어딘지, 어떤 사건이 터지는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으니까.
“…형?”
고개를 들자, 강영원이 ‘형이 왜 여기서 나와?’ 하는 표정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대여섯 사람들이 길드장실로 다가왔다. 다들 회의에 참석하러 오는 건가 싶었는데, 거기엔 공략 1팀 멤버들도 있었다. 무언가 심히 쪽팔린 기분이 들었지만… 어쩌겠어.
쑥스럽고 멋쩍어서 주먹으로 입술을 가렸다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 오랜만이다.”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회의 들어가시려고요?”
진짜냐는 듯 두 손을 모으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본다. 넌 진짜… 보면 볼수록 강아지 같네.
“아냐. 들어가. 나는 그냥, 음….”
“같이 들어가요! 길드장님도 해준 형이라면 뭐라 안 하실 거예요!”
“아니… 아는데… 괜찮아.”
요즘 여기저기서 내가 한야냐 아니냐로 난리인 상황이다. 아까 눈치를 보니 다들 그 이슈를 아는 것 같은데, 괜히 들어가서 눈총 받긴 싫다.
길드장실 문이 살짝 열리고 홍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우리 든든한 호위 기사님한테서 신경 끄고 빨리 들어오지~?”
놀리는 기색이 다분해서 휙 째려봤지만 길드원들이 앞에 있는데 부길마에게 뭐라 하기엔 또 눈치 보여서 입을 다물었다. 홍희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형, 회의 하고 올 테니…! 가지 말고 꼭 기다려 주세요!”
강영원이 목덜미가 잡혀 끌려가면서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어어 그래….”
어차피 계속 안 갈 거란다…. 그렇게 강영원과 다른 길드원들을 보내고 나는 또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이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멀리서 엘리베이터가 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회의를 대체 몇 명이 참석하는 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쪽팔림에 대비하고 있는데, 복도를 쿵쿵 울리게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긴 머리를 휘날리는… 다해 길드장?
나는 당황했다. 예카테리나가 모르젠트 상층부에 왜 와?
카리나는 씩씩대며 걸어왔다. 구겨진 얼굴이 아주 짜증스러워 보였다.
“백루찬 이 자식 어딨어!?”
“다해 길드장님!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내가 몇 번이나 연락했다고! 이 자식이 내 연락을 지금 다 씹잖아!”
“나도 좀 짜증 났어. 이건 모르젠트 길드장님이 잘못한 거야.”
유하늘이 카리나의 뒤를 따라오며 투덜거렸다. 그들을 말리려 쫓아온 모르젠트 길드원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주 난감한 듯했다. 그는 차마 카리나를 잡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진땀을 빼고 있는데, 카리나 성격을 아니 차마 앞길을 막지 못하고 끌려온 거 같았다.
“백루찬! 당장 나와! 어디 있…! 어, 너 여기서 뭐 하냐?”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카리나가 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러는 댁은 대체 여기 왜 온 거냐….
“회의실 지키고 있는데요.”
정확히 말하자면 백루찬이지만. 내 말에 카리나가 헹 코웃음을 쳤다.
“백루찬 그 자식 지키고 있는 거야? 이거 봐라? 니네 내가 찾아올 줄 알았다는 거 아냐! 근데 연락을 다 씹어?”
살벌하게 중얼거린 카리나는 목을 좌우로 꺾고 손가락도 마디마디 꺾으며 길드장실을 노려봤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발로 차서 들어갈 것 같아서, 나는 황급히 그녀의 앞을 막고 섰다.
“루찬이 걔가 연락을 씹었어요? 저는 그건 모르고, 일단 지금은 회의 중이라 나중에-”
“내가 나중으로 미뤄야 할 사람인가?”
“…아뇨. 절대 아뇨.”
강하게 부정했지만 카리나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다리를 들고 문을 박차려 했다. 그녀를 따라온 모르젠트 길드원이 문 앞을 대자로 가로막으며 우는소리를 했다.
“이러시면 안 된다고요! 제가 잘립니다, 제가아!”
너무도 절박한 음성이었다. 카리나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와 길드원을 노려봤다. 붉은 마력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돌며 오라를 뿜어냈다.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박력 미쳤는데? 개무서운데?
“그래, 막는다 이거지? 어디 한번 끝까지 막아 봐.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려고 하는지 X도 모르는 자식들아!”
카리나가 포효했다. 이건 진짜 포효다. 그 박력에 문 앞을 가로막았던 길드원과 나는 양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카리나가 길드장실 문을 발로 차 버렸다. 문이 콰앙-!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반쯤 부서진 문짝을 보고 기함했다. 미친, 맞았으면 최소 기절이다.
“이리 오너라!”
카리나는 희열 어린 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꽂혀 들어왔다. 백루찬은 카리나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잡았다.
“…다 나가 봐.”
“아직 보고드릴 것이…”
“…….”
“…나가겠습니다.”
직원 중 한 명이 백루찬의 살벌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빠르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다들 눈치를 살살 보며 카리나를 피해 길드장실을 나갔다. 홍희는 휘파람을 불며 부서진 문을 툭 건드렸다.
“이야, 다 부숴 놨네~! 안 그래도 오래되긴 했지, 그지~?”
얼굴은 싱긋 웃고 있는데, 눈빛이 스산했다. 화났다. 저거 화난 얼굴이다. 카리나의 행태를 뿌듯하게 지켜보던 유하늘이 헤헤 웃었다.
“그쳐~? 역시! 그럴 줄 알고 미리 쪼개 드린 거예요~!”
홍희와 유하늘 사이에 파지직하는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뭐냐, 백루찬이 스킬 썼냐…. 나는 그녀들을 피해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모르젠트 길드원도 나와 같이 시선을 피하며 몸을 내빼려 했다. 하지만 그때.
“어디 가? 준 씨는 길마 지켜 줘야지?”
홍희가 나를 붙잡고, 유하늘에게 고갯짓을 했다. 마치 밖으로 나오라는 듯이. 유하늘이 코웃음을 치고 홍희와 함께 길드장실을 나갔다. 부서진 문을 힘으로 옮겨서 닫아 놓은 둘이 사라지고 길드장실엔 정적이 흘렀는데, 부서진 문밖에서 홍희와 유하늘이 말싸움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무슨 난리 법석이야 대체….
“소란 떨며 올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라면 기분이 진짜 나쁠 것 같네요.”
백루찬은 비딱하게 카리나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리나는 한창 회의가 이뤄지고 있었을 책상 앞 의자를 당겨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 그렇지 않으면 뭐라고 내가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겠어? 네 앞마당 따위 나도 밟기 싫었다고.”
“…그래서 뭔데요.”
카리나는 잠시 백루찬을 힐긋 쳐다보다가 도시의 풍경이 훤하게 보이는 사무실 전경을 바라봤다. 그녀는 조금 고심하는 듯했고, 나는… 조용히 구석에 짜졌다. 아, 이런 중요하고 어쩌고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은데….
“빨리 입 여시죠. 진짜 싸움 걸고 싶으니까.”
“싸우면 이길 수는 있고?”
카리나가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백루찬의 입술이 약간 비틀렸다. 두 S급의 살벌한 시선 교환에 정작 떠는 건 나뿐이었다. 이러다 새우 등 터지는 거 아냐…? 둘이 싸우면 재빨리 자리를 피할 요량으로 긴장한 채 지켜보는데, 카리나가 입을 열었다.
“너.”
“네.”
“‘검은해’라고 알아?”
백루찬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나는 손을 움찔했다. 순간 저놈에게서 폭사되어 나오는 살기에 나도 모르게 반응할 뻔했다. 나는 당황해서 백루찬을 쳐다봤다. 카리나는 태연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는 눈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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