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내가 걱정됐어요?”
팔목을 휘감은 손가락이 부드럽게 손등을 두드렸다. 회색 눈이 가늘게 휘어지며 그림같이 예쁜 눈웃음을 만들어 냈다. 나는 멋쩍어서 눈을 피했다. 백루찬이 못마땅하게 말했다.
“왜 피해?”
“안 피했어.”
“고개 돌리고 있잖아요.”
“…자, 됐지.”
다시 마주 보자, 여전히 웃고 있다. 아으… 너 좀 약점 잡은 표정 하지 마라….
백루찬은 점점 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얀마 아까 피 냄새 난다며…!
“왜 내가 걱정됐을까?”
“…그런 이유가… 갑자기 생겼다.”
“갑자기 내 생각이 나신 거예요?”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백루찬은 연신 실실 웃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백루찬이란 것을 알아채자마자 허겁지겁 뛰쳐나왔으니까. 그래, 나는 세계의 기둥을 지킬 의무가…. 일이 더 복잡해지면 또 나만 힘들고…. 그 다치는 꼴 보기도 싫고…. 제물로 무력하게 끌려가는 백루찬 생각하니 속이 뒤집히는… 하, 이게 무슨 변명 나열이지. 나는 스스로 자꾸 합리화하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백루찬은 여전히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네?”
“걱정된다고.”
“…네?”
“네가 걱정돼서, 혹시나 잘못될까 봐….”
나는 백루찬의 뺨을 톡톡 치고는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인정하는 게 처음은 어렵지. 두 번은 쉽다. 나는 백루찬이… 진짜로 걱정되었던 거다. 천새벽과 송류진만큼. 아니 그보다… 더.
또 한숨이 푹 나왔다. 이거, 시스템 문제인가? 아무래도 백루찬이 각인 대상으로 가장 오래 있었으니 혹시 그 과하게 부풀려지는 감정에 나도 모르게 휩쓸리는 건가. 송류진한테도 그것 때문에 고민 많이 했는데….
내가 머쓱하게 꺼낸 말에 백루찬은 멍하니 굳어 있었다. 너는 또 왜 바보가 됐어.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백루찬의 앞에 고개를 쭉 내밀었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놈의 회색 눈이 더욱 잘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당황한 듯한…. 당황? 나는 씨익 웃었다.
“내가 걱정했다고 해서 놀랐어?”
“…놀라긴요.”
“뭐야. 그럼 심쿵?”
“제가 잘못될 리가 없는데, 형이.”
“내가 뭐.”
“형이….”
백루찬은 연신 눈을 깜박이다가 조개같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뭐. 재촉하듯 빤히 쳐다보자, 이번엔 되레 백루찬이 뒤로 물러났다. 아, 궁금하게! 세상에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뭐?”
백루찬은 이제 반대로 내가 덮칠 것처럼 넘어간 상체를 뒤로 손을 뻗어 받치며 제 입술을 핥았다. 나는 놈을 놀리기 위해 다가가던 것을 멈추고 움찔했다. 백루찬은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제 또 여유로운 태도로 변했다.
“좋아하는 거 같잖아. 나를.”
싱긋 웃는 얼굴을 보며 눈을 깜박이다,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뒤로 몸을 물렸다. 얘는 무슨 소리 하나 했다. 근데 왜 이렇게… 덥냐. 아파서 그런가. 머리를 옥죄던 두통은 관자놀이를 쿡쿡 찔렀지만 아까보단 나아졌다. 나는 실없게 웃는 놈을 흘겨보곤 소파에 눕듯이 기댔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 되냐?”
“오라고 해도 오지 않던 분이 갑자기 왜 이러실까?”
“그런… 문제가 있다. 아무튼. 있어도 되는 거지?”
“편한 대로 하세요. 방 많아요.”
“좋아. 당분간 네 옆에서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거니까 각오하고 있어.”
지끈대는 이마를 붙잡고 말하자, 백루찬은 미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이거 그건가?”
“뭐가.”
“유혹?”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물어보는 줄 알았는데, 헛소리여서 긴장이 또 풀렸다. 나는 꾸물꾸물 움직여서 소파에 아예 드러누웠다. 워낙 거실이 넓으니, 소파도 엄청 커서 누우니 푹신하고 편했다.
눈을 꾹 감자, 간지러운 시선이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눈 뜨면 백루찬이 백 퍼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을 것 같아서 아예 옆으로 돌아누웠다.
“방 많은데. 따로 자기 무서우면 내 방도 좋고.”
“…야.”
숨 쉬듯이 내뱉는 플러팅에 한 소리 할까 했지만, 잠잘 때도 옆을 지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언제 틈이 생길지 모르니… 조심해야지.
“근데 형, 피 냄새는 왜 나는 거예요? 안색도 별로 좋지 않아 보여.”
“쉬면 나아.”
“흐응.”
“진짜야….”
누우니까, 급격하게 피곤함이 엄습해 왔다. 상태 이상을 정통으로 맞고 뛰어왔더니… 개힘들다, 진짜.
옆에서 스륵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 좋아지면 바로 병동에 박아 버릴게요. 약속했죠?”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모른 척하기는.”
그런 말 했던 거 기억나긴 한다. 백루찬은 그렇게 말하고는 씻는다며 욕실로 향했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안도했다. 시나리오에 나왔던 일이 터질 때, 내가 지켜야지. 내가 꼭….
***
욕실 문이 달칵- 열렸다. 거실은 미미하게 흐르는 숨소리만 흐르고 조용했다. 차해준은 잠든 것 같았다.
백루찬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차해준에게 다가갔다. 들어올 때부터 불안정해 보였는데, 잠든 상태로도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백루찬은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찾아온 걸까….”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몸도 안 좋은데. 어떻게 이렇게 매번 아픈 모습만 보이는 거지? 생각해 보면 멀쩡했던 적이 별로 없는 거 같다.
“으응….”
뒤척이면서 반대로 몸을 돌린 차해준을 가만히 보며, 땀에 젖은 앞머리를 느릿한 손길로 넘겨주었다.
걱정했다는 얼굴과 자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생소한 감정이 차올라서 당황스러웠다.
“주인을 걱정하면 어떡해요. 장난감이.”
백루찬은 고개를 숙였다. 차해준의 귓가에 속삭이듯 바짝 붙었다가, 뺨에 입술이 스쳤다.
“봐주고 싶게.”
차해준이 눈꺼풀을 움찔한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또다시 고요하게 감겼다. 무방비한 모습 때문인지 더 건드리고 싶었다. 반응을 보고 싶었고, 설핏 잠에서 깨 멍하고 찡그린 눈을 보다가 입술을 겹쳐 볼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조용히 차해준을 감상할 때였다. 백루찬의 눈썹이 꿈틀했다.
‘루찬아.’
‘우리 찬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백루찬은 눈만 들어 거실을 살펴봤다. 기척도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찬아… 엄마 좀 구해 줘.’
이명 같은 환청이 고막을 잠식하는 것 같았다.
“허….”
올라갔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백루찬은 숙였던 상체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는 절망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살짝 고개를 흔들어 봤지만, 여전히 여자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루찬아.’
그 오드 아이 새끼가… 무엇을 한 건가. 내가 당했다고? 백루찬은 실소했다.
그 목을 꺾어 버렸어야 했는데. 순진하고 어리숙한 인상을 가진 남자. 한쪽 눈을 새파랗게 물들인 그는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너무도 쉽게 제 손을 빠져나와 사라졌다.
백루찬은 그놈을 기억했다. 얼굴과 인상착의는 물론, 그가 했던 말까지. 그러나 기억하다 보니 점점… 놈의 인상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정신 계열 각성자였구나. 백루찬은 확신했다.
‘루찬아….’
계속해서 울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백루찬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속이 거북하다.
백루찬은 문득 잠든 차해준을 내려다봤다.
“…형.”
…괴롭히고 싶고, 깨워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이대로 목을 조르고 싶다. 차해준을.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감정이 양립했다.
자꾸 떠오른다. 악마의 눈동자. 허공에 검게 구멍 난 게이트.
그 속으로 들어가던, 흰옷을 입은 사람들. 환희와 두려움을 느끼던 그들은 무서워하면서, 들어갔다. 그 게이트 속으로. 그중에 엄마가 있었다.
백루찬은 생각했다.
찢겨 죽었을까. 짓밟혀서 죽었을까. 아니면….
차해준을 내려다보는 눈에 고통이 일었다. 알고 있다. 떠오른다.
왜 자꾸 생각나는지. 증오스러운지. 왜 미운지.
왜… 죽이고 싶은지. 안다.
백루찬은 차해준의 손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가 게이트를 닫아 버려서 구하러 갈 수 있었던…. 아니, 사실 구할 수 없었다. 안다. 그의 잘못이 아니란 것도.
토할 것 같았다.
“…짜증 나.”
백루찬은 서늘하게 굳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집 안의 전등들이 백루찬의 감정 동요에 함께 깜박이며 꺼졌다 켜졌다.
오드 아이의 남자를 만나고 나서부터 생긴 환청과 혼란함이었다. 백루찬은 입술을 짓씹었다.
…같잖은 흉내라니. 찾아서 죽여 버려야겠다.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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