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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110화 (110/201)

110화

백루찬은 길드장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한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어둑한 도시의 야경을 비추고 있었다. 온갖 조명들과 밤이 깊어도 지지 않는 사무실의 불빛들은 꼭 하늘의 별을 연상케 했다.

게이트가 터져도, 매일 위험이 급습해도 사람들은 바쁘게도 살아갔다.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해도 한국인은 출근할지도 모른다. 물론 종말이 정말 온다면 모든 길드원들은 당연히 출근해야겠지만. 백루찬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곤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타러 향했다.

유독 길게 느껴지는 복도를 걷는데 반대편에서 누군가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이 따로 느껴지지 않았던 터라, 백루찬은 잠시 멈춰서 가만히 반대편을 응시했다. 은은하게 켜진 조명과 함께, 반대편 모퉁이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남자는 어딘지 어리숙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백루찬을 발견하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뭐지, 저 남자. 백루찬은 그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일반 사무원들은 모두 퇴근했을 시간이었고 각성자들은 팀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백루찬이 있는 층은 회의실과 길드장실만 존재했기 때문에, 보고하러 올 직원들 빼면 올라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갈색 머리카락, 어딘지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남자는 우물쭈물하며 멈춰 있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백루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뭘까?”

“아… 안녕하세요!”

남자는 서툴게 꾸벅 인사했다. 더듬는 꼴이 가관이었다. 백루찬은 싱긋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처음… 처음 맞아요. 이렇게 마주 보는 건 처음입니다.”

백루찬은 눈으로 남자를 훑어 내렸다. 조금 큰 셔츠. 정장 바지. 광나게 닦은 까만 구두가 보였다. 남자는 어쩐지… 좀 묘했다. 이상한 기시감을 풍겼고, 그게 무척 기이했다.

원한 관계로 찾아온 건가?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남자는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 새로 들어온 길드원입니다!”

“어디 소속?”

“마석 관리부 소속입니다. 한번 뵙고 싶었어요.”

“아, 그래요?”

백루찬은 짧게 웃었다. 남자도 미소를 지었다. 그린 듯한. 그래, 어쩐지 만들어 낸 미소 같은. 백루찬은 손을 내밀었다.

“그랬구나. 잘 부탁해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계속해서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내민 손을 잠시 보다가 다시 자신의 얼굴을 한번 보고 손을 맞잡으려 했다. 그때, 백루찬의 손이 남자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강하게 잡아채자 남자가 비틀거렸다.

“무슨….”

짐짓 놀란 척 말하지만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백루찬 또한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모르젠트 직원이라면 내가 얼굴을 다 알거든요. 내 손으로 뽑으니까.”

남자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느리게 웃었다.

“아… 안 속네.”

휘어진 눈가에 보이는 한쪽 눈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오드 아이? 백루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는 아주 재밌다는 듯 큭큭대며 웃다가 목덜미를 움켜잡은 백루찬의 손을 붙잡았다.

“반가워요?”

신나 죽겠다는 목소리다. 미묘한 적대감. 가슴을 찌르는 서늘한 긴장감. 남자를 쳐다보는 백루찬의 눈에도 금빛 안광이 어렸다. 백루찬은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면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 각성자구나.”

진마하는 백루찬을 마주 보고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

“쿨럭…!”

피가 또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젠장맞을 상태 이상…! 급히 수건을 찾아 틀어막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에 토해 냈다. 붉은 피가 물과 함께 소용돌이처럼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비릿한 쇠 맛은 아무리 맡아도 적응되지 않는다.

벌겋게 물든 앞섶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대충 닦아 내고, 입 안을 헹궜다. 머리가 띵하니 어지러웠다.

하 씨발 진짜… 죽겠네.

“서… 선생님?”

그때, 아직 잠들지 않았었는지 새벽이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다가왔다.

“피… 피가!”

S급 각성자 후각인데, 피 냄새가 진동했겠지…. 나는 당황해서 나를 붙잡는 새벽이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아냐. 큰일 아니고. 괜찮아.”

“뭐가 큰일이 아니에요!”

걱정하며 옷에 묻은 피를 확인하던 새벽이가 울상 지었다. 나는 바로 구급차라도 부를 것처럼 당황한 아이를 진정시키며 방으로 들어갔다. 천새벽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쫓아왔다.

“진짜 별거 아니야. 문제없고.”

“선생님 지금 얼굴 창백해요. 몸도 떨고 계신 거 아세요?”

지금 당장 누우라는 듯 잡아당기는 손을 뿌리치고, 나는 일단 옷부터 갈아입었다. 새벽이가 안절부절못하며 휴대폰을 찾았다.

“진짜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고, 쌤 좀 나갔다 올 테니까 잘 자고-.”

“지금 쌤이 피를 토했는데 제가 어떻게 잘 자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얼굴에 걱정이 그득 담겨 있다. 나는 내 팔을 붙잡는 새벽이를 다독였다.

“진짜야. 내일이면 괜찮아져. 음, 학교 잘 다녀오고, 음, 하교하면 짐 챙겨서 모르젠트 길드로 들어와. 아무래도… 거기가 안전할 거 같다.”

내가 아무리 시나리오를 볼 수 있다 해도, 그 밖의 위험도 무시할 수 없다. 진마하가 또 어떻게 새벽이를 노릴지 모르니까. 일단 지금은 백루찬이 먼저다. 그 빌어먹을 놈들이 왜 그놈을 제물로 삼으려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현재 가장 위험한 건 백루찬이었다.

일단 쉬고 길드로 오라고 말한 뒤, 나는 급하게 현관으로 향했다.

“어디 가시려고요? 지금 몸 상태가….”

“그러고 보니….”

현관문을 나서다가 새벽이를 돌아봤다.

“언제까지 선생님, 선생님 할 거야?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다시 만나면 형이라고 해.”

“선….”

“푹 자. 진짜 괜찮으니까 좋은 꿈 꾸고.”

“선생님….”

애타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새벽이를 뒤로하고, 나는 집을 나섰다. 잠깐 본 새벽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굳어졌는데…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불안해서 백루찬 먼저 확인해야겠다.

나는 빠르게 길드로 향했다.

***

길드는 오밤중에도 환했다. 소수의 경비원들이 나를 보고 아는 척해 왔지만 대강 인사하고 빠르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했다. 다 위에 있어서 빠르게 내려오질 않는다.

“하… 젠장.”

나는 조급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식은땀 맺히고 긴장감에 손이 차게 식었다. 백루찬이라니, 그 자식은 어느 누구도 뚫지 못하는 S+급 각성자에다가, 나 빼고 다음으로 강한 놈 아니냐. 근데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다.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나는 펜트하우스로 가는 끝 층 버튼을 눌렀다. 숨 막히게 초조하다. 혹시나 벌써, 벌써 문제가 생겼다면 어떡하지? 교법사랑 그놈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인 걸까. 텍스트로 읽었지만 마치 제물을 바쳐 게이트를 여는 것 같았다. 그게… 그런 게 가능한 일인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든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세계의 기둥. 어떻게든 지켜 내야 할 사람들. 천새벽도, 송류진도 위험했다. 퀘스트의 위험은 피했다지만, 변수가 남아 있었다.

진마하. 그놈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나는 놈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게 없으니까.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떴지만 놈이 또 노릴 수도 있는 거고.

아니 잠깐. 오류를 미리 말해 주는 것이라면, 시나리오는 진마하가 위협하는 것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일까? 여태껏 그놈이 오류를 일으켜서 사건사고가 터졌다.

하지만 맨 처음 봤던 동작역 시나리오도 그렇고, 정한솔을 구한 시나리오도… 그건 내가 바꿨지. 시나리오와 다르게 한솔이를 살려 냈고, 정희수는 각성하지 않았다.

세계를 너무 믿지 말라던 진마하의 말이 떠올랐다.

그놈은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시스템은 대체 어떻게 안 거고. 진마하가 어쨌든 시스템과 연관이 있는 건 맞는 거 같은데 시스템은 말도 없고, 도무지 정보가 없어서 모르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답 없이 어지럽게 흘러가는 생각 때문인지 속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나는 다시 백루찬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백루찬 같은 각성자가 위험에 처했다면 내가… 내가 어떻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마자 내려서 현관문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전에 백루찬이 알려 줬던 비밀번호를 까먹지 않고 기억해 둬서 다행이었다. 다급하게 문을 젖히고 들어갔다. 거실부터, 모든 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백루찬! 루찬아!”

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넓은 응접실까지 훑었는데 백루찬이 안 보였다. 아, 설마… 벌써?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대로 뒤돌아 침실로 향하려 했을 때였다.

“…형?”

거실로 나온 백루찬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놈은 상의를 벗고 있었는데, 이제 막 씻으려고 했던 건지 목에 수건이 걸려 있었다. 야이씨….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야, 넌 왜 대답을 안 해…!”

내가 얼마나 쫄렸는지 아냐고! 참았던 긴장이 한 번에 녹는 기분에 빽 고함이 터져 나왔다.

소리를 버럭 지르자 백루찬은 살짝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고함을 지르고 나는 맥없이 휘청거렸다. 젠장맞을 상태 이사앙!

“형은 또 왜… 뭐야, 피 냄새 나.”

백루찬이 그런 나를 붙잡아 주면서 눈썹을 찡그렸다. S급이라 그런가 개코네 아주…. 나는 백루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안도감이 밀려오면서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심해졌다. 하, 진짜… 쉽게 당할 놈이 아닌데 왜 이렇게 걱정한 거지.

“나는 너… 너 다치는 줄 알고.”

죽는 줄 알고. 일부러 말을 돌렸다. 백루찬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진짜 그 이유로 오밤중에 뛰어왔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겸연쩍어 눈동자를 굴렸다. 백루찬은 쯧 혀를 차더니, 내 허리를 감싸 끌어안듯 부축하며 소파에 앉혔다.

“제가 왜 다쳐요?”

“그래… 나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안다.”

“형은 왜 피 냄새를 풍기면서 쳐들어온 걸까.”

“나는…. 아니 그보다, 너 별일 없었지?”

“별일이요?”

“어. 막… 아니, 아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백루찬은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낯빛이나… 눈빛도 정상 같고. 못 참고 백루찬의 뺨을 찰싹 붙잡아 시선까지 맞춰 확인했다. 송류진이 정신 조종으로 당했으니까 도무지 안심이 되어야지. 백루찬은 내게 볼을 내주고 사뭇 진지한 나를 유심히 보더니, 귀엽다는 듯 픽 웃었다.

왜 웃냐. 사람 심각한데.

백루찬은 웃으면서 제 뺨을 붙잡은 내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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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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