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개처발린 바탈 씨
“코리아는 길드가 빌딩이라 아주 좋아?”
“그쪽네 나라에도 많을 텐데 새삼스러운 척은 뭐예요?”
“아메리카도 대형 길드가 많긴 하지. 하지만 코리아만큼은 아니라서. 알잖아? 협회가 꽉 잡고 있는 거.”
바탈은 창밖 도시 뷰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의 ‘허니’인 차해준이 과제를 핑계로 나간 뒤 불편한 얼굴을 한 백루찬과 독대 중이었다. 바탈은 백루찬을 힐끔 쳐다보고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적당히 놀고 꺼져 주세요. 바쁘니까.”
백루찬은 처음 봤을 땐 굳어 버린 밀랍 인형 같았는데, 지금은 생판 처음 보는 감정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탈이 보기에 이건 아주 신기한 일 중 하나였다. 그렇게 변할 것 같지 않던 남자가, 사는 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처럼 감정도 거세된 것같이 다니던 남자가 이렇게 기분 나쁜 티를 낸다니? 그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해지는 한편 변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허니’에게 보였던 눈빛과 행동을 보면 말이다.
“우- 진짜 놀러만 온 건 아니라고. 들었잖아?”
“어차피 일은 우리가 할 텐데. 당신은 가만히 있을 거 아니에요? 여기저기 들러붙어서 귀찮게나 하겠지.”
“노노, 이번에는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그 게이트,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니까? 닫히지 않아!”
“몬스터가 튀어나오진 않잖아요.”
“그래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 알잖아?”
백루찬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바탈의 말이 맞다. 한국에서 닫히지 않은 그 게이트도 지금 심혈을 기울여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로 들어갈 수도 없고 조사할 수 있는 방향은 그저 퍼지는 마력 파장을 읽는 수준에서 그쳤지만. 하지만 한국에서 못 알아낸 것을 여기까지 와서 알아본다는 게 우스웠다. 해결 못 한 일을 대체 왜? 바탈은 백루찬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최초로 들어간 각성자가 입장하려 한다면, 들어갈 수 있어.”
“…최초?”
악몽의 참견 게이트에 입장한 최초 각성자라면, 차해준이다. 정한솔의 각성도 게이트에서 빠져나오기 직전에 이루어졌으니까.
“미국은 없어요?”
“있었는데 없어졌어.”
“그건 또….”
“들어가서 못 나왔거든. 그 뒤로 입장 자체가 불가능하지 뭐야. 클리어도 되지 않고. 안에 들어간 인원들이 나오지 못해서 ‘닫히지’ 않는 원인도 못 찾았어.”
그렇다는 건 한국도 그럴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백루찬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무조건 차해준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칫하면 나오지 못하는 게이트라니.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들어간다는 것도 좀 그랬다. 만약에, 나오지 못하면 누가 책임지려고.
…무엇보다 차해준을 보내기 싫었다. 다치고 찢기고, 재밌는 꼴을 많이 봐 왔지만 자신의 것인데. 빼앗기는 기분을 또 느끼긴 싫다.
바탈은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를 백루찬을 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
“…말해 봐요.”
“나도 들어가는 거야. 허니와 함께.”
“별로 좋은 제안 같진 않은데.”
“그리고, 너도. 그리고 아까 그 남자들, S급이지? 딱 보면 알지.”
백루찬은 헛웃음 쳤다. 바탈은 비딱하게 쳐다보는 백루찬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뉴욕의 닫히지 않는 게이트에서 나오지 못한 각성자들, S급은 없었어. 모두 A에서 B급. 이 정도면 그림 나오지 않아? 그들은 클리어를 못 한 거야. 그래서 못 나온 거고. 우리라면 가능해.”
“그러다가 모두 나오지 못하면?”
“그럴 일은 없어.”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백루찬은 고개를 저었다. 마침 호출기에서 알림이 울리고 있었다. 백루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호출기를 확인했다.
“됐고, 각본에서 협회랑 상의하고 나온 내용 토대로 진행하시든지 말든지 하시고. 모르젠트는 당신이 여기 머무는 동안 숙소만 빌려 드릴 겁니다.”
“잘 생각해 봐. 길드 명성에도, 랭커로서 명성도 올라가는 일이지 않아?”
“그딴 건 관심 없어요.”
이미 가지고 있는 게 많았고, 잃을 것도 없는 최상위권의 삶을 살고 있다. 따질 필요도 없었다. 명성 따위 가치도 없는 것.
“그럼 정의감? 그래! 위험한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지가 무슨 캡X아메리카라도 되는 줄 아나.”
백루찬은 코웃음 치고 바탈을 무시했다. 길드장실을 벗어나는 백루찬에게 바탈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Friend, the world is made up of such a sense of justice!”
호출기가 계속 시끄럽게 울었다. 백루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액정을 확인하며 문을 쾅 닫았다.
“귀찮게….”
바탈도 귀찮은데, 더 귀찮은 사람이 또 붙었다. 호출기엔 다해 길드장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
“선생님, 안 주무세요?”
“어어, 먼저 자.”
나는 눈꺼풀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책상에 앉아 한참 동안 글자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좀이 다 쑤신다. 새벽이 그런 나를 보며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너도 여태껏 공부했는데, 무리는 무슨.”
새벽이는 열심히 레포트를 쓰는 나를 보며 계속 공부했다.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어가는데도 말똥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고딩보다 못하면 교생 실습까지 한 내 모습이 너무 웃기잖냐…. 뭐, 그것도 있고 또 무슨 일이 터지면 레포트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하니 시간 날 때 미리 해 두려는 속셈도 있었다.
“키 커야지. 얼른 자.”
“저 이미 큰데….”
“…그렇긴 해.”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웃자 새벽이도 방긋 웃었다. 새벽이는 아직 내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모르젠트에 들어가기로 결정 내렸지만 새벽이는 길드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번 시험 때까지만 있겠다고 했었나. 그랬었지. 내 도움을 받고 싶다는 이유로 말했지만 솔직히 나도 강영원한테 과외 받고 있는 사정인데 누굴 도와주나 싶어서 거절했다. 그때 새벽이는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 옆에 있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데 뭐 도리가 있냐. 솔직히 새벽이가 있어도 불편하지도 않았고, 동생 같아서 같이 있으면 귀엽기도 하고. 그래서 수락했지만 딱 한 가지가 불편했다. 바로 마음대로 시나리오를 볼 수 없다는 것.
“그럼 저 먼저 잘게요….”
“잘 자. 쌤도 좀만 더 하고 잘게.”
새벽이가 무언가 아쉬운 눈으로 나를 보며 머뭇대다가 자러 들어갔다. 좋아…. 나는 닫힌 방문을 힐긋 보고는 기지개를 켰다.
신당 5동 사건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문제는 폐아파트에서 교법사라는 놈이 나오는 장면. 그게 문제다. 나는 조용해진 거실에서 시나리오를 열었다.
[스킬 발동! 독서(Lv.1)]
[종전의 기록: ‘시나리오’를 열람합니다.]
[‘종전의 기록’ 현재 페이지 수: 223/451
※!주의!※: 종전의 기록에 걸린 저주가 스킬 시전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현재 초전 박살 게이트의 스토리 진행률: 45%]
[경고! 종전의 기록이 페이지 오류로 인해 뒤섞였습니다!]
[경고! 시나리오가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 낯선 폐아파트/실외/밤
시멘트만 바른 폐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일렬의 사람들. 흰옷을 입고 눈빛이 멍하다. 그들의 맨 앞과 맨 뒤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있다. 옥상에 도착하는데, 로브를 쓴 남자가 멈춰 선다. 옥상 한가운데 허공이 뻥 뚫린 것처럼 게이트가 마력 파장을 내뿜고 있다.
교법사1: (오른팔을 높이 들며) 새로운 별로 인도하는 통로가 우리를 맞이한다…!
뒤따라오던 흰옷 입은 신도 무리가 벌게진 눈으로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모두가 아우성을 치며 각자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교법사1: 제물을…!
교법사의 명령에 신도 무리가 쓰러진 누군가를 둘러엎고 게이트 앞으로 나온다. 바닥에 툭- 떨어지는 한 사람.
신도 무리의 틈에서 제대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줌인) 늘어진 흰 코트 자락뿐.
교법사1: (광기에 찬 눈으로 게이트를 보며) 드디어… 드디어!
(줌아웃) 마력 파장이 거세지며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다. 폐아파트 옥상의 전체 풍경. 도시가 노을이 져 불길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다.
(줌인) 쓰러진 제물의 손끝이 움찔한다. 흰 머리카락이 피와 엉겨 붙어…….]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쿨럭-!”
눈 뜨자마자 상태 이상으로 인해 목구멍으로 피가 넘어왔다. 서서히 머리를 옥죄는 듯한 두통과 함께 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손수건으로 대충 피를 닦아 냈다.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오랜만이다, 이런 고통.
“미친… 존나 아프네.”
소파 등받이에 푹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나리오 내용은 전에 봤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뒷내용이 좀 더 이어졌다.
교법사란 놈과 그 신도 무리가 미친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을 확실히 알겠다. 제물이라니. 이건 사이비의 도를 넘은 짓 아닌가?
그리고 흰 코트. 흰 머리.
나는 허공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 미친놈들이 제물을 누구로 쓰려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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