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되돌아가기
굳게 닫혀 있던 철문 앞에서, 백루찬은 문을 열려다 말고 멈췄다. 철장 사이로 지하 독방의 안이 보였다.
“뭐 해?”
우반희가 들어가지 않고 안을 지켜보는 백루찬을 툭 밀치고 문을 열려 했으나, 백루찬이 그런 우반희를 붙잡아 다시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루찬?”
“잠시만요.”
백루찬은 우반희를 끌고 몇 걸음 걷다 멈춘 뒤 어딘지 애매모호한 얼굴로 벽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댔다.
“아… 이걸 내가 짜증을 내고 싶은데.”
“…흐음.”
잠깐이었지만, 우반희도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느껴졌다. 위태롭게 요동치던 송류진의 마력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는 것을. 그와 함께 건물을 감싸던 식물들이 서서히 말라비틀어지며 떨어지고 있었다. 우반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대고 품 안을 뒤적거려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나 줘?”
“됐어요. 혼자 피우시고 빨리 뒤지세요.”
“웃기네. S급 각성자가 고작 이걸로 죽겠냐.”
“네네, 그럼 유병장수 하세요.”
우반희는 픽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옆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굉장히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루찬이 보였다. 백루찬답지 않게. 이거 이러면 놀리고 싶은데. 우반희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표정이 꼭 제 것을 빼앗긴 애새끼 같지 않은가. 본인은 인지도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며 속을 긁어내리는 말이라도 할까 하다가 그냥 관뒀다. 큰 사건을 하나 처리했으니 이 정도는 봐줘도 되겠지. 우반희는 라이터를 달깍였다.
차해준은 송류진을 되돌려 놨다. 자신의 생각은 들어맞았다. 차해준이라면 폭주한 송류진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말이다.
이 뒤로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처럼 쌓였지만, 지금은 잠깐의 여유를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로 내려온 탓에 여명을 볼 수 없었으나, 밖은 어스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
[송류진의 ‘오류 기억’ 제거 완료
- 대상의 오류가 본래 기억과 얽혀 있어 수정할 수 없었습니다.
- 기억 대상: 차해준 ]
“…아.”
송류진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나는 웃으면서 손바닥으로 송류진의 눈가를 덮었다.
“푹 자.”
이제 꿈도 꾸지 말고.
입만 뻐끔대며 말하는 내 속삭임을 들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말을 끝으로 송류진의 몸에서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깜박이며 손바닥을 간지럽히던 속눈썹도 잠잠해졌다.
나는 천천히 송류진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마력이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갈무리가 되었다. 건물을 뒤덮던 식물들도 말라비틀어지더니 잎사귀를 떨구며 사그라들었다.
오류 난 기억이 차해준 자체라…. 뭐 어떻게 된 건진 자세히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약발이 잘 도는 것 같았다. 송류진이 잠잠해져서 얌전히 잠들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폭주는 해결인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억….”
긴장이 갑자기 확 풀려서인지, 나도 모르게 몸에서 힘이 풀려 송류진 다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벽을 붙잡고 스르륵 주저앉아 이상하게 가쁜 숨을 골랐다. 하, 뭐야. 백루찬이 준 컨디션 보조제 약발은 떨어진 거냐? 이놈의 약…. 내가 다신 알약 쳐다보지도 않는다.
홀로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짜 체력 소모 미친다. 송류진의 일도 그렇지만, 한일고 사건이 터지고 나서부터 연속으로 나를 괴롭히는 사건들이 터져서 더 지쳤다. 진마하 그 새끼도 나타났지, 송류진 폭주했지. 또 송류진이 나를… 생각은 여기까지 하자.
백루찬이랑 우반희는 아직도 싸우고 있나. 그 범죄자 놈들도 등급이 꽤 올라갔는데…. 케이든 때와 비슷한 상황인가. 나야 나름 랭킹 1위이고 S++급이라 레벨업 된 케이든을 단칼에 처리했지만, S급이라 해도 그놈들끼리 잘 처리했으려나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시나리오 초월! 메인 캐릭터 ‘송류진’의 죽음을 막아 냈습니다!]
[종전의 기록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전에도 봤던 것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시나리오 초월이다. 페이지 죽어라 안 넘어가더니 역시 메인 캐릭터를 살려야만 넘어가는 거였어.
[송류진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습니다!]
[클리어런스의 성공적인 오류 제거를 축하합니다!!]
[두 번째 메인 캐릭터까지 ‘공략’ 완료!]
그렇게 웃지 마라, 너…. 글자만 봐도 웃고 있는 게 다 보인다. 그리고 공략이라니 꼭 무슨 연예 공략 게임 같잖아! 이건 무려 세상을 구하는 중대한 일이라고….
“…이제 괴롭지 말자.”
나는 쓰러진 송류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곱게 자는 놈을 보자니 독방 지하실로 왕자를 납치한 파렴치한 놈이라도 된 기분이 드는데…. 약간 얄밉기도 하고, 깨지 않았으면 하기도 하고…. 공존하는 마음이 이중적이라 웃겼다. 어찌 되었든 송류진을 구해서 다행이다.
이제 진짜 진마하의 손에서 벗어난 걸까. 오류를 삭제했다고 했으니, 괜찮은 거 맞겠지?
[오류 제거로 인해 송류진의 세뇌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시스템이 안심하라는 듯 눈앞에 텍스트를 띄웠다. 세뇌가 풀린 게 아니라 아예 제거되었다는 건 더 잘된 건가…. 아무튼 다행이다. 나는 벽을 짚고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여기서 자다간 입 돌아갈 수 있으니 옮겨야지.
그 생각으로 송류진을 부축하려는 때에, 백루찬과 우반희가 문밖에서 들어왔다. 나는 그들을 보며 웃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뭘요, 형?”
“하면 된다고 했잖아.”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데, 둘이 움찔 놀라더니 동시에 나에게 달려왔다. 응? 왜 갑자기 뛰고 난리야. 그런데 이상했다. 갑자기 180도로 시야가 돌아간다?
“형!”
“차해준!”
아 그렇구나. 시야가 돌아간 게 아니라 내 고개가 돌아간 거구나. 내 몸을 받치는 팔을 느끼곤 나는 몸을 축 늘어트렸다. 하하… 씨팔 맨날 기절 엔딩이냐…. 그래 익숙하다, 익숙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기절했다.
***
또 꿈을 꿨다. 차해준의 과거의 기억이 나를 덮쳤다. 이번 기억은 행복한 기억들이었다. 송류진이 옆에 있어 줬던 기억들.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평범하고 순탄한 하루를 보내는 차해준의 기억.
‘우유 좋아해? 커피는? 커피가 더 좋아? 나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커피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으니까 차라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옆에서 귀찮은 척 밀어내도 모르는 척 들러붙는 송류진은 수줍게 웃고 있었다. 하는 행동이 꼭 강아지 같다. 꼬리라도 있었으면 아주 멋지게 흔들고 있었을 거다. 나는 괜히 쑥스러워서 굳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단 거 싫어.’
철벽을 치며 걸어가는 나를 보고 송류진은 움찔하더니 그러면 다른 걸 먹자며 팔을 붙잡아 당겼다. 학원부터 가야 할 놈이 이럴 시간이 있나 싶었는데 쳐 내지 않았다. 그게 내심 좋았으니까.
학창 시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젠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제대로 된 각성자 관리 본부의 제복을 입고 저 앞 단상에 서 있는 송류진을 보고 있었다.
같이 각성했지만, 저렇게 빛나는 애와 자신은 달랐다. 자신은 숨겨야 했다. 아버지의 죽음까지도.
‘해준아!’
꽃다발을 한 다발 들고 있는 송류진이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나는 가만히 빛나는 그 애를 쳐다보다 슬쩍 손을 들어 인사했다. 송류진은 금세 모여든 인파에 가려졌다. 멀리서 입 모양으로 ‘기다려.’라고 말했지만, 송류진은 금세 자신을 붙든 다른 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변이 온통 그와 어떻게든 친분을 나누려는 학생들로 붐볐고, 송류진의 시선 또한 누군가가 채가 버렸다. 나는 그 즉시 몸을 돌렸다.
사람들 틈에서 가장 빛나는 송류진이 부러웠다. 그리고 부담스러웠다. 변하지 않는 송류진의 관심이. 어쩔 땐 이 애가 나를 동정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다정한 눈빛도. 애써서 나를 띄워 주려고 노력하는 것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끝내 자신에게 오는 송류진의 눈빛을 보면서. 빛을 품고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
저건… 동정이 아니라 동경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내가 해야 할 생각을 왜 송류진이 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다시 필름이 빠르게 돌아간다.
게이트가 터지던 때.
사방에서 삑삑 소리를 내며 경고음이 퍼졌다. 온 도시의 전광판에 새빨간 글씨로 경고 문구가 떴다.
[1급 게이트 출현! 긴급 대피 요망!]
그러나 곧 말이 바뀐다.
[제로(0)급 게이트 출현!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습니다! 게이트와 최대한 멀어지십시오! 긴급 대피 요망!]
사람들이 많던 명동역은 난리가 났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높은 빌딩 사이로 허공이 뻥 뚫린 것처럼 보이는 검은 홀을 향해서.
순간 대지가 울면서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아스팔트 도로가 갈라지고, 차량 경적 소리와 사이렌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멸망하는 것같이 보였다. 그래도 나는 무엇이라도 빨아들일 것처럼 새까만 구멍을 향해서 달렸다. 그 주위는 푸르스름한 마력 파장이 전기가 튀듯이 꿈틀대며 퍼지고 있었다.
‘허억… 헉…!’
그리고 보았다.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가 그 안에서 비집고 튀어나오는 것을.
“아… 안 돼.”
헉-.
나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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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