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얼기설기 엉킨 것들이 내 몸을 옥죄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괴로울 정도로 세게는 아니었다. 시야는 어두웠고, 귓가에는 마치 작은 숨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식물들은 마치 송류진의 의지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넝쿨들에 감싸인 채 한동안 어디론가 이동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들이 떨어져 나가며 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는 것을 느꼈다.
눈을 뜨니, 나는 어느새 형광등 하나만 위태롭게 깜박거리는 큰 수감실에 와 있었다.
나는 바닥을 디디며 슬쩍 주머니에 들어 있는 약을 확인했다. 다행히 알아차리진 못한 모양이다. 이걸 송류진에게 어떻게… 먹일 수 있을까.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둠이 옅게 깔린 공간 끝엔 송류진이 낡은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송류진은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파리한 안색은 그가 그동안 고생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송류진은 가느다랗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해준아, 보고 싶었어.”
잠긴 목소리는 거칠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송류진의 눈빛은 어딘지 멍해 보였다. 이상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대답 없이 마른침을 삼키자,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마력. 건물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졌던 송류진의 마력이 지금은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 괜찮아?”
간신히 입을 떼서 물었다. 송류진은 한 발짝 내딛고 비틀거리다가, 이내 몸을 바로 세우곤 나를 쳐다봤다.
“응, 뭐가?”
어둡게 깔린 갈색 눈 한쪽이 순간 새파랗게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나는 움찔하며 뒤로 한발 물러났다. 침음을 삼키고 다시 물었다.
“괜찮은 거 맞아?”
“내가 이상해?”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 경계하며 쳐다보는데도 송류진은 아무렇지 않게 불쑥 다가와 내 앞에 섰다. 그때… 오염된 지하 도시 때처럼 목덜미를 타고 뺨까지 올라온 검은 핏줄들이 가까이 서자 더욱 잘 보였다. 하… 너, 진짜. 가슴이 옥죄는 것같이 답답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걸까.
“나는… 정말 괜찮아. 오히려 네가 걱정이지. 해준아, 너는 어때? 너는 괜찮아?”
“어, 나는….”
“거짓말.”
“뭐?”
“표정부터 거짓말하고 있잖아. 내가 약 먹인 것도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으면서.”
송류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울상을 지었다. 미안하다고 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장난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눈썹을 움찔거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송류진의 마력이 갑자기 공격적인 흐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기세는 곧 사나워졌다.
“하지 마, 류진아.”
나는 단호히 말했다. 송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그만하자.”
손을 뻗어 송류진의 팔을 붙잡으려 했으나, 송류진이 거부하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송류진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무엇을 그만하자는 거야?”
“…지금 네가 움직이고 있잖아.”
건물이 붕괴 위험에 놓인 원인도, 사방이 넝쿨로 뒤덮인 것도, 송류진의 마력에 반응해서 나온 것들이다. 지금도 스스슥 소리를 내며 천장과 벽을 덮기 시작하는 식물들이 보였다. 송류진은 금방이라도 터지기 직전의 폭발물처럼 부글부글 끓는 상태였다. 그게 두려웠다. 더 이상 되돌리지 못할까 봐.
우반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뒤늦게 폭주해서 마력을 절제하지 못하는 각성자는 죽었거나, 죽을 예정이라고.
그럼 살리는 방법이 뭐냐고 물었었지.
‘폭주로 조절하지 못하는 마력을 한 번에 끊어버려야 돼. 기절이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우반희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거 같았다.
‘폭주했을 때 보통 그릇이 이기지 못하고 터지지만 송류진은 S급이니 버텨 주겠지. 터지기 전에 쓰러트려야 해. 그러지 못하면….’
‘못하면?’
‘죽는 게 나아.’
돌아보던 우반희의 눈빛도 말이다. 무수히 많은 걱정을 담고 있는 눈. 우반희는 안타까움을 애써 숨겼지만 두 눈에서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죽는 게 났다는 건 그런 것이다. 폭주하면 안에서 폭발하는 마력을 못 견디고 뇌까지 상해 버리니까.
‘연구원들이 쓰는 용어로는 익는다고 해. 마력에 의해.’
그리고 S급이니, 조사와 여러 실험을 위해 실험실 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건 송류진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의 자제였든 상관이 없었다. 각본에서 S급 각성자를 놓아줄 리가 없었다.
“하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해준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그냥… 너를 다시 만나고, 네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그냥.”
송류진은 큭큭대며 웃다가 휘청거리더니 이내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앞머리로 가려진 눈동자 한쪽이 파란빛으로 빛났다 사그라들었다. 조종 당하는 건 아닌가. 폭주했으니 진마하가 정신을 주무르지 않는다 해도, 반쯤 미친 상태인 건 틀림없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냥, 다 죽고, 죽어 버릴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흠칫하며 굳고 말았다. 다급하게 송류진에게 다가가 멱살을 붙잡았다. 천장을 메우던 넝쿨들이 툭툭 떨어져 발목을 붙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놈을 잡아당겼다.
“미친 소리 하지 마. 죽긴 누가 죽어.”
진마하 이 개새끼…. 대체 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죽기를 바란다고? 개새끼야, 너나 뒤져 버리지. 오류 따위가…!
이를 악물고 노려보자,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송류진이 이내 웃어 버렸다. 나는 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뭐야. 네가 이렇게까지 된 이유가 뭐냐고.”
“내가 원하는 것이라…. 뭐지?”
송류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풉 웃었다. 그의 손이 내 손등을 살포시 감싸 쥔다. 나는 움찔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강하게 붙잡는 악력에 눈살을 찌푸렸다. 허탈하다는 듯 웃는 얼굴이 눈앞에 가득 찼다. 송류진이…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매번 울상 짓고 깨갱거리는 강아지처럼 다가오는 것만 봤지 이렇게 위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송류진이 아닌 것 같지만, 송류진이 맞다.
“류진아, 정신 차려.”
떨리는 목소리, 한숨을 내쉬듯 말을 걸었다. 송류진이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그냥, 해준아. 너와 함께 있고 싶었어. 그게 다야. 우린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고… 난 네 첫 번째가 되고 싶었거든. 너는 내 처음이었으니까…. 그랬는데… 왜, 왜….”
송류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핏발 선 눈이 이제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
우는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나는 붙잡힌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송류진은 잔뜩 휘청거리다가 고개를 들고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 다른 걸 원한 게 아니야… 나는.”
아니. 넌 원래 그렇지 않았다. 정말로 좋아했던 거라면, 너였다면 예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지켜보기를 택했겠지. 정신적으로 감정에 무너질 정도로 어리숙하지도 않았고, 음습한 욕망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항상 뒤를 지켜 주었을 거야. 너는 그런 애였으니까.
너는 계속 그래 왔어. 이전 삶에서도, 더 이전……. 어?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더 이전의 삶? 그때 회귀를 반복하던 차해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매번 죽고,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서, 다시 죽었던…. 그때마다 송류진은 내 옆에…… 있었는데?
이게 무슨 생각이지. 순간 당황해서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이런 기억은 또 뭐야. 왜 차해준의 과거 기억이 걸리는 거야?
“계속 이렇게 가지지 못한다면.”
천장을 가득 메웠던 넝쿨 식물이 공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나에게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네 손에 죽는 게 나아.”
송류진은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놈의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송류진은 그 목소리에 청각을 집중했다.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독방에 갇혀 있을 때 찾아온 갈색 머리의 남자. 그의 웃는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래, 그게 네가 원하던 거야!’
그런가?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았던 자신은, 차해준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얼마나 대단한 행운아인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 주고 싶었지만 그 사람이 동정이라고 말하며 거부했을 때도, 많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니야. 송류진은 고개를 저었다.
어렸던 그날 겨울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는 나를 깨닫게 했으니까. 바보 같던 내가 현실로 자기 연민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만들었으니까.
네가 나의 유일한 존재가 되어 버렸듯이 나도 너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행운아의 기만이라고 해도 좋아. 나는 네가 나를 통해 행복했으면 했어.
송류진은 눈을 떴다.
“송류진!”
차해준이 기다란 검을 든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주 간절한 얼굴로 부르고 있었다. 각성자가 된 것도 자신은 몰랐다. 그저 피한다고만 생각했고, 다쳐 오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차해준은 각성까지 해서, 자신의 손을 완전히 떠나 버렸다.
허탈한 웃음이 그려졌다.
그렇다면… 그냥.
네 손에 죽을래.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으니, 내 목숨이라도 받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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