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하여간 이 새끼들은 패턴이 바뀌질 않아요.”
우반희는 혀를 찼다. 그는 질렸다는 듯한 안색으로 진강혁을 쳐다봤다. 나도 한숨이 나왔다. 상대하기 까다로울까. 저놈 등급도 높아졌다. 설마 비등하랴 싶지만… 게이트 오류가 터지면서 마주쳤던 몬스터들도 하나같이 강해졌던 게 기억이 났다. 앞길을 나아가는 데 충분한 방해물이 될 수 있었다.
[제한 시간: 28:33]
좆같은 제한 시간. 그놈의 제한 시간…. 시간 제한 안 걸면 뒤지는 병이라도 걸렸냐, 시스템아. 초조해지는 마음에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가로막는 넝쿨 식물들을 잘라 내며 들어오느라 시간을 많이 소요했다. 빌어먹게도 건물을 쓸데없이 크게 만들어 놔서 복도도 길고 구불거렸다. 미로냐, 이 새끼들아…. 물론 이유는 대강 알겠지만 그래도 짜증 났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한기와 함께 건물 안에 깔린 송류진의 마력이 느껴졌다. 끊어질 것처럼 가늘게 이어졌다가 다시 폭발하듯 튀어 오르기를 반복한다.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급한데.”
초조하게 내뱉은 말에 우반희가 팍 인상을 쓰며 권총을 서부 총잡이처럼 손안에서 돌렸다가 나를 쳐다봤다. 문뜩 눈이 마주쳤고, 그가 눈썹을 꿈틀대며 눈짓을 보냈다. 뭐라 말할 게 있다는 얼굴인데…. 야, 뭐 어쩌라고. 말로 해, 말로.
내가 못 알아듣자 우반희가 짜증스럽게 노려봤다.
그때 백루찬이 내 등 뒤에서 속닥거렸다.
“한 놈 더 있어요.”
응. 안다. 백루찬이 뭉친 전류를 쏘아 보냈던 복도 끝. 모습을 감추고 있는 놈이 하나 더 있었다. 단단하게 세워진 얼음 방벽이 파사삭 소리를 내며 금이 가더니 와장창 깨져 나갔다.
그 사이로 진강혁과 비슷하게 추레한 몰골을 한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그리고 얼음 방벽이 완전히 깨져 나갈 때, 나는 한야를 방벽 뒤의 놈을 향해 집어 던졌다.
쉐에엑-.
카앙-!
남자는 흠칫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간 한야를 맨몸으로 튕겨 냈다. 상체를 노리고 날아간 검이 상의를 찢었지만 드러난 남자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어쭈, 나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리 내가 지금 컨디션 저조로 고생하고 있다고 해도 이걸 막았다고?
[이름: 백상철
칭호: 파괴하는 바윗돌
클래스: 강화사]
[등급 오류! 등급 오류!]
[백상철 A->??]
시스템이 또 사이렌처럼 빨간 불빛을 번쩍이며 경고를 보내왔다. 어쩐지 눈빛이 맛이 간 거 같더니 너도였냐!
“죽어 보자 이 개새끼야!!”
백상철이 고함을 지르며 쿵쿵 달려오기 시작했다. 놈의 몸은 진짜 바위처럼 갈라지며 근육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하, 진짜 성가시게…!
빠른 속도로 튀어 오는 백상철 뒤로 진강혁이 스킬을 사용했다. 얼음 보숭이 같은 것들이 스키장 눈 기계가 뿌리는 것처럼 뿌려졌다. 나는 한야를 다시 소환해 손에 쥐면서 눈앞에 뿌려진 것들을 팔을 들어 올려 쳐 내 시야를 확보하고는 백루찬을 잡아당기며 뒤로 물러났다.
백루찬의 손끝에서 전류가 일었다. 스파크들이 잔뜩 튀며 복도 사방을 점유했지만, 적들이 눈송이들에 가려져 공격에 맞았는진 보이지 않았다. 눈송이들이 순식간에 눈덩이로 불어나 복도에 이불처럼 깔렸다. 백루찬이 전혀 난감하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어쩌나. 얼음이라서 전류가 통하질 않네?”
“그럼 몸이나 빼!”
뒷목을 잡고 뒤로 잡아당기자 우반희가 총구를 겨누고 총을 쐈다. 총알 대신 하얀 마력탄이 쏘아졌다. 콰아앙- 하며 터지는 소리가 총알을 쏘는 게 아니라 꼭 포탄을 쏘는 것 같았다. 큰 소리가 나고 희뿌연 복도 사이 불꽃이 펑펑 연속으로 터져 나갔다. 위력이 셌던지 건물이 흔들리며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조준 좀 제대로 해!”
한 소리 하며 한야를 빼 들어 두 놈의 앞을 막았다. 터엉! 강철같이 단단한 주먹이 위에서 떨어졌다. 와, 막는 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등급이 올랐다더니, 이거 다들 S급이라도 된 거냐고…! 진짜 곤란했다.
휘날리는 눈송이 사이로 백상철이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놈은 내려친 팔에 힘을 주며 한야를 내리눌렀다.
“큭…!”
마력을 돌려 그것을 밀어 올렸다. 그때 뒤에서 보던 백루찬이 백상철의 옆구리를 노리고 몸을 움직였다. 갈비뼈 인근을 팔꿈치로 치고 반동으로 퉁 하며 살짝 밀려난 놈을 돌려 차기로 날려 버렸다.
파지직-.
전류가 밀려나는 백상철을 따라 원형 필드를 그리며 백상철을 조여 왔다.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감전시키려 했으나, 아쉽게도 놈의 바윗돌 같은 몸에 전류가 통하지 않았다.
백상철은 큭큭 웃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놈이 양 팔뚝을 옆으로 팍 들어 올리자 백루찬의 감전 필드가 깨져 나갔다.
“으하하하! 간지럽지도 않구나!”
놈은 광기에 차서 대차게 웃어 댔다. 놈의 뒤에 아직도 자욱한 눈보라 사이로 얼음 송곳이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코앞으로 짓쳐 드는 하나를 쳐 내고 옆으로 몸을 돌려 또 날아드는 것을 피했다.
“야!”
우반희가 버럭 소리쳤다.
내가 피해서 얼음 송곳 공격이 우반희 발치에 와다닥 떨어져 바닥에 박혔다. 우반희가 움찔하며 발을 굴렀다. 나는 또다시 날아오는 것들을 쳐 내며 한 소리 했다.
“거참, 노력 좀 하세요. S급 씨.”
“인정머리 없게 굴긴-.”
쳇 하며 혀를 찬 우반희가 허리를 푹 숙였다. 그 위로 뾰족한 얼음 칼날이 슈욱 날아가 지나쳤다. 백루찬은 물러난 백상철에게 붙어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손에 전류를 두르고 주먹을 꽂는데 백상철은 외격에 타격이 갈 뿐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제한 시간: 26:45]
시간은 착실히 줄어들고 있다. 아 진짜 여기서 허비할 시간이 없는데…!
“이 새끼들… 원래 이 정도 수준이 아니었는데?”
우반희가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인마. 지금 다들 제정신도 아니고 등급도 올랐다고! 알려 주고 싶었으나 입이 있어도 열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힘을 좀 아끼려고 스킬을 안 쓰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대로 질질 끄는 것이 더 좋지 않다. 얼음 가시숲 같은 것은 진상혁에게 타격을 주지도 않을 것 같고…!
다른 스킬을 사용할까 생각할 때 어느 순간부터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나무 넝쿨이 위협적인 속도로 나에게 짓쳐 들었다.
“윽-!”
기습적인 공격에 한야로 쳐 냈지만, 넝쿨의 속도도 매우 빨랐다. 여러 갈래로 나눠진 넝쿨들이 점점 몸집을 불리며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하필 또 지금 이게 난리를 부리냐. 송류진이 우리가 들어온 걸 알아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쳐내는 와중 복도를 메우던 눈송이가 사그라들었다. 그 뒤를 대신해서 채우겠다는 것처럼 사방 벽에 식물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몰아쳐 다가오는 것들을 잘라 내도 새로운 것이 빠르게 덤벼드니 아주 성가셨다.
그때 백상철과 몸싸움하다가 놈을 쓰러트린 백루찬이 백상철의 명치를 발로 퍽 차 버렸다. 놈은 넘어진 상태로 바닥에 밀려 복도 끝까지 밀려났다. 백루찬의 손에서 전류가 꽃피고 복도를 덮을 것처럼 내려온 넝쿨들을 태워 버리려 했다.
그때, 진강혁이 주변에 각진 얼음 덩어리들을 생성해 백루찬의 움직임을 막았다. 식물들은 일부 태워졌지만 더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라났다. 그때, 잘라 내지 못한 넝쿨 하나가 내 손목을 감았다.
“차해준!”
우반희가 소리쳤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힘으로 넝쿨을 끊어 내고 검기로 덤비는 식물들을 뭉텅이로 잘라 냈다. 또다시 허리와 다리에 넝쿨이 감겼다. 발밑에서 자라난 것이 다리를 잡아채고 있었다. 안 되겠다. 나는 스킬을 사용하려고 했다. 순식간에 조지고 빨리 송류진에게….
-해준아.
그때, 작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어 버렸다. 움찔하며 멈칫하는 순간, 넝쿨들이 내 몸을 덮쳤다.
뭐야, 송류진…?
작게 부르는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손목에 감긴 넝쿨이 마치 송류진이 붙잡는 것같이 느껴졌다. 이게….
-해준아
또다시 들리는 목소리.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앞에서 우반희과 백루찬이 범죄자 놈들을 잡기 위해 고전하고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한 방에 처치했을 텐데, 등급이 올라서 쉽지 않아 보였다. 나를 발견한 백루찬이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뻗으려 했다.
나는 몸에서 힘을 풀고, 전신을 감싸는 넝쿨에 몸을 맡겼다. 내 몸 위로 잎사귀들이 우거진다. 마치 나를 삼키려는 것처럼. 송류진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삼켜지면서 백루찬과 우반희에게 말했다.
“…먼저 가 있을 테니까.”
구하러 와.
뒤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시야를 덮친 잎사귀들 덕에 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
온통 식물로 뒤덮인 복도. 한쪽에서 차해준이 넝쿨에 단단히 감겨 덤불 사이로 사라졌다. 백루찬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죽어!!”
백상철이 몸을 날리며 팔을 휘두른다. 백루찬은 서늘한 눈으로 돌아보며 손을 뻗었다. 턱 하니 놈의 목덜미를 잡은 백루찬은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힘을 주었다.
“하, 진짜 짜증 나게….”
적당히 어울려서 놀아 주려고 했더니…. 자꾸 선을 넘는다, 모두가. 백루찬의 손에 파지직 전류가 일었다.
“아하학! 전기 따윈 안 통…!”
그래서. 백루찬은 손에 힘을 줬다. 하얗게 일어나는 연기가 백상철의 목부터 치솟기 시작했다. 우반희가 진상혁을 향해 마력탄을 쏘았다. 큰 파공성이 울리며 여러 개로 나뉜 마력탄이 진상혁을 향해 꽂혔다.
“아으… 아아악!”
열기가 더해지자 백상철이 발버둥 치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열 받잖아.”
백루찬은 고통스럽게 벌벌 떠는 백상철을 보며 중얼거렸다.
“왜 자꾸 내 것을 가지고 놀까?”
정말 성가시다. 송류진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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