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수감소는 완전히 던전화가 되어 있었다. 나와 백루찬, 우반희는 펜스를 넘어 벽처럼 단단히 솟은 흙더미를 올랐다.
덤불처럼 얽히고설킨 식물들이 앞길을 가로막으며 계속해서 자라났다. 건물로 다가갈 때마다 깔린 마력이 느껴졌다. 은은하고, 잠잠했다가 한 번씩 툭툭 튀어 오르는 기분 나쁜, 음습한 마력.
이게 송류진의 마력일까…. 그 아이의 기운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청량하고, 따듯하고 부드러운. 그런 기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건 마치….
그래 진마하가 떠오른다.
“괜찮아요?”
백루찬이 앞서가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분명히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아.”
“흐응.”
어딘지 감각이 상실된 느낌이 들긴 했다. 열이 올라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을 때, 어딘지 미묘하게 붕 뜨는 것 같은 느낌과 똑같은 상태였다. 백루찬이 준 약 혹시 마약 같은 건가.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좀 어색했다.
“수감자들은 다 도망갔나?”
한야를 들고 앞을 가로막는 덤불을 베어 내며 말했다. 얼어붙은 칼날 스킬을 시전해서 휘둘렀더니 잘린 식물들의 단면에 서리가 끼었다.
우반희는 맨 뒤에서 느긋하게 정리된 길을 걸어오며 대답했다.
“도망갔는지, 죽었는지 몰라. 죽어도 상관없는 놈들이 대부분이라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우반희의 중얼거림에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무리 범죄자라도 인마…. 생명은 소중한 거다. 내 눈빛에 놈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할 일이나 집중하시죠. 인류애가 넘치는 차해준 씨.”
재수 없게 웃기는…. 나는 앞을 가로막는 덤불을 베어 냈다. 쓱삭 잘리는 것들이 바닥에 떨어져 밟혔다. 그리고 곧, 흙더미에 파묻힌 정문이 드러났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여는 것보다 창살이 껴 있는 창문을 부수고 침입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형 섹시하네.”
내가 마력을 돌리며 창살을 뜯어내자 백루찬이 실없는 소릴 하며 웃었다.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인데 이놈에게서 조급함이나 두려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좀 진지해져 주라. 아무리 송류진에게 관심 없다지만….
나는 한숨을 쉬고 먼저 몸을 날려 안으로 들어갔다. 기울어지고 부서진 건물 잔해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복도는 지나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무너지면서 전기가 완전히 끊기진 않았는지 아직 연결된 형광등이 깜박거리며 음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무슨 괴담에 나오는 폐쇄 건물 탐험하는 기분이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 걸었다.
복도를 나눠 창살로 막아 놓은 곳들을 지나가니 수감실이 나왔다.
“…다 도망친 건가.”
“다시 처넣으려면 고생 좀 하시겠어요.”
백루찬이 휑하니 열린 수감실을 들여다보며 싱긋 웃었다. 우반희의 고생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만족을 얻은 얼굴이었다.
“시비 걸지 마라. 어린애도 아니고.”
“아닌데. 루찬이 어린데.”
백루찬이 입술을 말아 물고 귀엽게 눈을 깜박거리자 우반희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쳤나… 라고 중얼거리는데 나도 짜게 식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심각한데 혼자 상큼하고 난리야.
[제한 시간: 32:43]
“송류진은 어디에 가둬 놓았냐.”
창살로 막힌 교도소 복도 같은 곳을 다 뒤지기엔 시간이 없다.
“더 깊은 곳. 지하.”
S급을 그냥 쉽게 가둬 놓기만 했을 리 없지. 더군다나 송류진은 지금 제정신인 상태도 아니니까.
“약을 넘겨줬던 요원이 말하길.”
우반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자기는 포르페늄을 송류진에게 준 적이 없다고 말했어.”
“…그럼 류진이가 약을 어떻게 구한 건데.”
“그 요원이 건네준 게 맞아. 내가 직접 읽었어. 보관실로 들어와 잠금을 풀고 직접 건네주더라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요원은 계속해서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있어. 누가 머릿속을 뭉개 놓은 것처럼 말이야.”
묵묵히 걷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떠오르는 건 한 사람이었다. 진마하. 그놈이 아니면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각성자가 있을까.
각성자 관리 본부 요원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조종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정신계 각성자에 대한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정신계는 물리계보다 등급이 낮기도 하고.
놈은 S급인 송류진을 제멋대로 조종하고, 나와 부딪쳤을 때 백루찬은 그놈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한야로 갈랐을 때 몸뚱이가 연기처럼 갈라지고 다시 생겨났던 것을 보면 내 앞에 나타난 게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
이쯤 되니 대체 놈의 스킬이 무엇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놈 각성자가 맞긴 한 거겠지. 각성자가 아니면 이런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놈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웬만한 각성자들은 정신계 각성자에게 당하지 않아. 알다시피 육체가 강한 만큼 정신 방어도 강해지기 때문이지. 각본 요원들 같은 경우는 더욱 그래. 애초에 뽑을 때부터 정신 방어 테스트를 거치거든. 그런데….”
우반희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옆에 섰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은 날카로웠다.
“송류진, 지난번 오염된 지하 도시 게이트 이후로 이상해졌어. 겉은 멀쩡했지만 속이 다른 인간이 된 거 같았다고. 차해준 너에 대한 집착도 그때부터 보였고. 그리고 지금 네 얼굴.”
나는 물끄러미 쳐다보는 우반희의 시선을 마주 봤다.
“뭔가 알고 있다는 얼굴인데.”
눈치 빠른 새끼. 나는 우반희를 빤히 쳐다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진마하에 대해… 지금 말을 하면 우반희는 믿을까. Unknown. 기억에도 남지 않게 움직이며 오류를 일으키는, 시스템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놈이 있다는 것을. 애초에 이 세계가 초전 박살 게이트라는 책 속이라는 것도, 믿을까. 나도 요즘엔 헷갈리기 시작했는데.
송류진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면 납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에 설명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놈이 왜 송류진을 죽이려 하는 건지. 노리는 게 뭔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경계하지 않는 백루찬에게도 입 다물고 있는데 나를 의심부터 하는 우반희에게는 당연히 말 못 하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얘기기도 하고.
“일단 송류진부터-.”
구하고 얘기하자고 하려고 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들고 있던 한야로 내 앞으로 날아오는 날카로운 무언가를 쳐 냈다.
“…얼음?”
그건 날카로운 송곳 모양으로 된 얼음 결정이었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입김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벽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나는 앞을 바라봤다. 숨을 곳이 없는 복도엔 철창으로 된 문들이 모두 열려 있었다. 복도엔 우리밖에 없었다.
이거 어디서 날아온 거지. 그 생각을 할 때였다.
또다시 느껴지는 감각에, 나는 재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백루찬과 우반희에게 독침처럼 쏘아지는 얼음 송곳들을 쳐 내고, 그들 앞을 지키듯 막아섰다.
“…이건 또 뭐야.”
바닥이 얼어붙었다. 마치 내가 스킬 얼음 나무숲을 전개할 때처럼 말이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다른 누군가가 있다. 우리 말고.
우반희의 눈에 모노클이 씌워졌다. 붉은 적외선이 사방을 스캔했다. 놈이 신경질적으로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장전했다.
이어서 백루찬이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숨어 있네?”
무언가를 발견한 듯 그가 눈을 깜박거렸다. 순간이었다. 손끝에서 스파크가 튀며 전류가 복도 끝에 내려쳤다.
백루찬은 입술을 오므리며 감탄했다.
“오.”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 번개가 떨어진 곳에 두꺼운 얼음 방벽이 뭉쳐서 떨어진 전류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반응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서 백루찬의 공격도 눈 깜박할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방어도 그만큼 빨랐다. 기습적인 공격인데 그것을 막았다…?
긴장한 눈으로 앞을 살펴봤다. 전류 공격에 의해 철문으로 된 문들이 삐걱대며 흔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죄수복을 입은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누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거물이 오셨어?”
나온 남자는,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짧은 수염을 한 거뭇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본 우반희가 실소했다.
“진강혁.”
“오오, 이름도 기억해 주시고~ 이것 참 영광스럽구만.”
건물 안의 온기는 더욱 떨어지고 있었다. 피부에 추위가 느껴졌다.
[이름: 진강혁
칭호: 서리혼
클래스: 아이스법사]
죄수복을 보니, 이곳에 수감되어 있던 범죄자인 거 같았다. 우반희는 그를 아는 기색이었다.
“…저놈은 또 뭐냐.”
“뭐긴 뭐야. 범죄자지.”
내가 묻자 우반희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진강혁이 히죽 웃었다. 그의 목부터 뺨까지 핏줄이 검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허, 저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시스템이 경고를 날렸다.
[등급 오류! 진강혁 각성자의 등급에 오류가 생겼습니다.]
진강혁은 피실대며 휘적휘적 다가왔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모습이 무척이나 껄렁해 보였다.
“여기서 다 보고 아주 반가워 죽겠어. 손수 나를 이 구석탱이에 처박은 우 팀장을 이렇게 만나다니! 역시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니까~. 내가 아주 간절했다고! 우 팀장 목 좀 따게 해 달라고 신실하게 기도했더니 신이 들어주셨네?”
진강혁의 눈빛은 이상했다. 광기가 어려 있는 놈은 이를 드러내며 연신 히죽거리다가,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우반희는 피곤한 듯 눈두덩을 문질렀다. 나는 손목을 돌리며 진강혁을 힐끔 쳐다봤다. 이거 아무래도….
“곱게 지나갈 것 같진 않지?”
내 말에 백루찬이 싱긋 웃었다.
“이래서 사람이 적을 키우면 안 돼요.”
…가장 적 많을 것 같은 놈이 뭐라는 거야.
백루찬은 능글맞게 우반희의 착잡한 속을 긁어내렸다.
“내가 우 팀장님 대가리 깨려는 놈들이 많을 줄 알았다니까. 그러게 좀 곱게 살지 그러셨어요.”
“너부터 깨 줄까.”
“루찬이는 무서워서 해준이 형 뒤에 숨을래.”
백루찬이 내 등 뒤로 쑥 몸을 감추며 우반희를 놀렸다. 숨겨지지도 않는 새끼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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