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백루찬을 따라 다이닝 룸으로 가니,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냐, 이거 설마 직접 한 거야?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백루찬이 의자를 빼고 앉으며 말했다.
“나 자취 경력 10년 넘어.”
“구라 치지 마라.”
네 나이가 몇인데. 초딩 때부터 자취했다고? 백루찬이 웃었다.
“안 속네.”
“그럴 줄 알았다.”
“집 관리해 주시는 아주머님이 해 주신 거예요.”
그럼 그렇지. 그제야 조금 안심이 가서 식탁 앞에 앉았다. 한식으로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입맛이 돌지 않았다. 백루찬은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저렇게 보는데 안 먹을 수도 없고….
나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술 펐다. 맨밥을 푸자 백루찬이 젓가락을 들어 반찬 하나를 집어 올려 준다. 뭐 하냐… 낯간지럽게.
“먹어요.”
“…….”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먹을 수나 있겠냐. 나는 한숨을 쉬고 한입 먹었다. 입 안이 영 껄끄러웠다. 간신히 꼭꼭 씹어 삼키려는 순간, 욱 하고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욱-.”
[초월자의 눈 사용으로 인한 상태 이상이 진행 중입니다.]
시스템이 경고 문구를 띄웠다. 아, 어쩐지 안 뜰 리가 없다 했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급하게 화장실을 찾았다. 하, 이런 식으로 갑자기 오지 말라고…!
“우웩- 욱…!”
한 숟갈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결국 다 토하고 말았다. 쓴 위액이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물 같은 것만 토해 냈다. 위장이 꼬여서 누가 움켜쥐고 쥐어짜는 것 같았다. 연신 구역질하면서 토해 내다가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하….”
눈앞이 노랗다. 씨발…. 시스템 개새끼야… 상태 이상 좀 어떻게 좀 해 보라고….
나를 쫓아온 백루찬이 문가에 기대서서 흐느적거리며 쓰러진 나를 쳐다봤다. 눈가가 움찔 떨리는 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형은 참…….”
백루찬이 혀를 쯧 차더니 다가와서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간신히 기대서 일어나자, 백루찬은 그 자세 그대로 나를 세면대 앞으로 데려갔다.
“입 헹구고, 양치질도 하고. 밥은 안 되겠다.”
“…어.”
숨을 헐떡이면서, 세면대 물을 틀었다. 순식간에 피곤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몸 상태 거지 같은 거야 여러 번 겪어 봤지만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는다.
입 안을 헹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수까지 했다. 그제야 간신히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다. 백루찬이 내 뒤에서 허리에 팔을 감고 버티고 있어 줬다. 고개를 들자, 세면대 앞 거울 속에 창백한 안색의 남자가 검게 죽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와 씨….”
무슨… 좀비냐. 볼도 홀쭉하게 패어서는…. 잘생긴 차해준 얼굴이 완전 환자가 다 되어 있었다. 젠장. 얼굴 보존해야 된다고. 나는 뚝뚝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백루찬이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 해….”
눈가를 쓸어 올리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눈을 찡그렸다. 속눈썹이 손바닥에 걸리는 느낌이 났다. 백루찬은 내 머리를 쓸어 넘기고 뺨에 남은 물기를 털어 내더니, 이내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기분이 좀 이상한데.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게 꼭….
“왜, 설레요?”
“지랄하지 마라….”
아,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백루찬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옆 서랍장에서 수건을 꺼내 와 내 얼굴을 덮었다.
“야, 숨 막혀.”
“됐어요.”
꼼꼼하게 닦아 주고, 아직도 후들대는 내 다리 덕에 끌어안듯이 나를 부축해 준다. …짜식, 안 그렇게 생겨서 은근히 세심하다니까. 가끔 쳐다보는 시선이 좀 노골적이긴 한데.
백루찬은 나를 소파에 앉혀 주었다. 하, 힘들어 뒤지겠다. 뭘 했다고. 그대로 옆으로 누워서 가만히 눈만 깜박이자, 백루찬이 물 잔을 가지고 와 탁자에 내려놨다.
“왜 이렇게 잘 챙겨 줘. 적응 안 되게.”
“형 몰골을 봐요. 안 챙겨 주게 생겼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까 본 내 안색이 진짜 파리하긴 해서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지. 이게 다…. 아니다. 송류진 탓하기엔 걔도 피해자다. 모든 게 다 진마하 그 자식이….
백루찬은 나를 앉혀 두고 다이닝 룸으로 가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시스템창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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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전의 기록에 걸린 저주가 스킬 시전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현재 초전 박살 게이트의 스토리 진행률: 35%]
[시간 내로 일정 이상 스토리를 진행하지 못할 시, 당신의 수명이 단축됩니다.]
[각성자 차해준의 현재 남은 수명: 260일]
와 씨… 수명이 또 엄청나게 깎여 나가 있었다. 퀘스트를 확인하니 또 마음이 조급해진다. 젠장, 이제 겨우 천새벽 한 명 구했는데 나머지는 대체 언제 구하냐.
그리고 메인 캐릭터를 두 명이나 더 찾아야 한다. 백루찬, 송류진, 천새벽…. 그래도 다 주변에 있던 인물이니까, 다른 메인 캐릭터 두 명도 주변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새벽이처럼 앞으로 만나게 되거나.
하지만 시나리오를 보면서 메인 캐릭터를 기다리기엔, 내 수명 깎이는 속도가… 너무 쫄린단 말이야…. 놈들을 빠르게 찾을 수 있는 방법 없나.
그리고, 시나리오에 나왔던 천새벽과 연관된 게이트 사건은 지나갔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었다. 무슨 사이비 종교 같은 교법사. 분명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상한 짓을 벌이고 있었다. 혹시 모를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이 사건도 빨리 막아야 한다. 그런데… 대체 언제 진행되는 거지? 설마 모르는 곳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니다. 불안한 생각 하지 말자. 시나리오에 나왔던 사건 중심으로 내가 가게 되는 건 확실하니까. 여태껏 맨 처음 직접 찾아간 동작역 사건 말고는 다 내 주변에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누워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삑삑 소리를 내며 울리는 호출기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백루찬의 호출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백루찬이 성큼성큼 다가와 호출기를 집어 들었다. 액정을 확인하며 무언가를 읽어 내려가더니 눈을 가늘게 좁히며 한참 생각하다가, 나를 쳐다봤다.
“왜? 무슨 일 생겼어? 게이트?”
“아뇨. 뭐… 별일은 아니고. 형은 여기서 쉬고 있어요. 다녀올게.”
백루찬이 말을 얼버무려 버리며 몸을 돌렸다. 그때, 띵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백루찬이 멈칫하자, 일어나면서 준비하라고 손을 내저었다.
“내가 가 볼게. 준비하고 출발해.”
“아….”
백루찬은 몹시 짜증 난다는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급하게 안 좋은 일이 터졌나 보네. 어디서 1급 게이트라도 열렸나…. 그 생각을 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아, 현관 인터폰을 확인을 못 했다. 하지만 모르젠트 길드 빌딩에 위험한 인물이 올 리가 있을까.
“홍희인가?”
그러나 문밖에 서 있는 건 검은 정장을 입은 우반희였다.
우반희는 잔뜩 굳어서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문을 연 내 팔목을 붙잡았다. 뭐야, 갑자기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송류진이 위험해.”
“뭐?”
놈이 내 팔목을 으스러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꽉 붙잡았다. 잠시 이를 악무는 듯 턱이 도드라졌다. 우반희는 한숨 쉬듯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 새끼 죽겠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어느새 다가온 백루찬이 내 팔을 잡은 우반희의 손을 쳐 냈다. 아니 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송류진이 뭐라고?
“뭐야, 무슨 일이야. 제대로 말해.”
뭔가, 감이 좋지 않다. 백루찬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형한테 온 연락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이에요.”
“아니, 똑바로 말하라고.”
“신경 안 써도 된다고요.”
갑자기 송류진이 거론되지 않나. 우반희 얼굴도 존나 심각한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녀석 때문에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행동하는 거 자체가 별일이라는 얘기인 거다. 그리고 지금 누구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똑바로 말해. 뭔데.”
“…….”
우반희는 떫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힐끔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형 쉬어야 하잖아. 지금 몸도 안 좋은데 뭘 어쩌려고요.”
“장난하냐? 말부터 해. 똑바로. 무슨 일인지.”
백루찬은 나를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어깨를 붙잡은 손을 떼어 내고 우반희를 쳐다봤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 얼굴을 구겼다가 입을 열었다.
“송류진이 폭주했어.”
“폭주?”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 보통 폭주해서 뒤질 몸이면 각성자 되기 전에 죽으니까. 하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야. 지금 수감소 건물 자체가… 아니다. 이건 가서 봐라.”
우반희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하 씨, 이게 또 무슨 일이야, 대체. 각성자의 폭주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더욱 이미 각성한 지 오래된 각성자라면.
차해준도 각성할 때 한라동 일대를 날려 먹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각성하면서 날려 먹었던 거고… 이건 경우가 달랐다.
송류진이 왜…. 설마 또 진마하인가. 그놈이 또 뭔 짓을 했나. 순간 확 드는 걱정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차피 지금 챙길 것은 없었다. 나는 실내용 슬리퍼를 벗고 신발로 갈아 신으려 했다. 그런데 백루찬이 다시 내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형은 가면 안 돼요. 지금 몸 상태가 정상도 아닌데 가서 뭘 어떻게 하려고.”
손에 힘을 얼마나 준 건지, 어깨가 우그러질 것 같았다. 단단하게 굳은 얼굴을 보다가, 나는 픽 웃었다. 걱정되냐, 이놈아.
“너 잊었어?”
나 한야야. 랭킹 1위. 너도 발라 버릴 수 있는 S++급 각성자.
그리고 송류진은 내가 챙겨야 할 메인 캐릭터다. 그리고 나의 유일했던 친구이고….
나는 씩 웃으며 백루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말뜻을 이해한 백루찬이 못마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송류진한테 가자.”
우반희는 내 얼굴을 쓰윽 훑어보더니 말없이 몸을 돌렸다. 나는 백루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뒤질 거 같으니까 너도 도와줘.”
“하….”
백루찬이 짜증 어린 얼굴로 나를 보다가 내 팔을 붙잡았다.
“또 쓰러지기만 해 봐. 집 밖으로 못 나갈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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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