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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92화 (92/201)

92화

이상(異狀)

“똑똑.”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라서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백루찬이 문을 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노크를 그렇게 했는데 시선 한번 안 주실까?”

아, 너무 넋을 빼놓고 있었나 보다.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수명도 줄어 있을 텐데. 요 며칠 정신이 없어 확인을 못 했다. 백루찬이 다가오더니 대뜸 내 손을 내리고 이마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열은 내린 거 같고.”

“안 아파, 이제.”

“내 앞에서 쓰러진 게 몇 번째인 줄 알아요?”

어색하게 웃으며 백루찬의 손을 끌어 내리자 백루찬이 물어 왔다. 뭐야, 말만 들으면 내가 툭하면 쓰러지는….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생각해 보니 한두 번 기절한 게 아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을 돌렸다.

“새벽이는?”

“잘 귀가했겠죠. 누구가 자기 집에 데리고 갔으니 그 집으로.”

백루찬은 빈정거리는 듯 말했다.

뭐야, 불만이야? 새벽이 챙기겠다는데 왜 불만이야. 너네 길드 안 올까 봐 그러냐?

“야, 새벽이도 선택권이 있어야지. 무조건 모르젠트로 와야 하는 것도 아닌데.”

“와아. 진짜 어쩜 좋아. 형, 지금 나 삐진 거라고요.”

“삐지긴 뭘 삐져.”

“형이 다른 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함.께. 잔다는 것에 대한 삐짐이에요.”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백루찬은 진짜로 실망했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었는데 그게 어이가 없었다. 무슨 어린애한테 쓸데없는 질투야?

“새벽이는 어린애잖아. 너랑 같냐.”

내 말에 백루찬은 침대맡에 아예 걸터앉았다.

“뭐가 달라요?”

“뭐?”

“열아홉 살 천새벽이랑 내가 뭐가 다르냐고요.”

백루찬이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아, 깜짝이야. 고개를 뒤로 빼며 놈의 어깨를 밀쳤다. 그는 그런 내 팔목을 잡아챘다. 갑자기 왜 이래.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백루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백루찬은 잡은 손목을 손가락으로 슬슬 매만졌다. 간지러운 행위였다. 흠칫하며 손을 쳐 냈다.

“왜 이래.”

이제는 노골적으로 내 얼굴을 훑어 내린다. 잡은 손을 쳐 냈는데, 점점 상체를 기울이며 다가왔다. 마주치는 시선의 느낌이 묘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뒤로 뺐다.

“왜 자꾸-.”

“이제 알 때도 됐는데.”

“뭘 알아, 인마. 그만해라.”

이 분위기, 이 느낌. 모를 리가 없다. 백루찬은 물론이요, 송류진하고도…. 음음, 그만 생각하자. 나는 쓰게 웃었다. 이럴 때도 아니다.

백루찬은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얼굴에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어렸다. 백루찬의 눈썹이 흥미롭게 올라갔다.

“그만하라니까.”

훅 다가온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깜박이는 속눈썹까지 보일 정도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백루찬이 피식 웃었다.

“우리 웬만한 건 다 했는데, 여기서 긴장하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할까?”

“야.”

나는 갑자기 내 뺨을 쥐는 녀석의 손에 움찔했다. 백루찬의 회색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내 왼쪽 뺨에 춥, 입을 맞췄다. 순간 피부 전체로 닭살이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뭐 하냐, 너!

나는 놈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이상한 짓 하지 말라고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백루찬은 씨익 웃더니 이번엔 입술에 춥, 입맞춤했다. 나는 얼이 빠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약한 우리 형을 위해 오늘은 여기까지.”

백루찬은 눈을 둥글게 휘며 귓가에 속삭이더니, 침대맡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와요. 밥 먹게.”

문가에 선 백루찬이 나를 돌아보며 피식 웃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눈만 깜박였다. 순간 열이 오르는 거 같아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마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

…저놈은 얼굴이 문제야.

***

눈앞이 캄캄했다. 눈을 가린 가죽 안대의 인조적인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말할 수 없도록 입을 틀어막은 볼 개그 구속구가 혀를 짓눌렀다.

송류진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었다. 각성자 관리 본부의 각성자 수감실. 던전 부산물로 특수 제작하여 사방을 틀어막은 독실이었다. 각성 등급이 높은 범죄자들을 수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에 지금은 자신이 들어와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머릿속이 멍했다. 상황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송류진은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 떠올랐다.

차해준. 그 애와 함께 있고 싶어서 저질렀던 일들이.

포르페늄은 아주 위험한 약물이었고, 한 알만 있어도 높은 등급의 각성자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약이었다. 그런데 그걸… 몇 알씩 차해준에게 먹였다. 하루에 세 번씩 나눠서. 한 알에도 모두가 정신을 놓고 훅 가 버리는데, 차해준은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해서, 더 먹였다. 계속, 계속, 계속.

‘왜 이러고 가만히 있어?’

머릿속을 관통하듯 들리는 목소리에 송류진은 흠칫하며 목을 움츠렸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 왔다.

‘원했던 일이잖아.’

아니야. 내가 진짜 원해서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

‘왜 그래. 네가 원했던 거 맞아. 네가 한 짓이야.’

내가, 내가 스스로….

‘가지고 싶어 했잖아. 가질 수 있었는데, 네 멋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었는데. 방해꾼들이 너무 많아. 하지만 류진아… 생각해 봐. 솔직히 지금 벗어날 수 있잖아.’

송류진은 움찔, 움찔 상체를 떨었다. 벗어날 수 있었다. 제 손으로 구속구를 깨 버리고 안대를 벗고 이 방을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서면 안 된다.

자신은 지금 미쳤다.

송류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미친 거라고, 미쳐서 그런 짓을 벌였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진짜로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자신이, 아무리 애틋하게 바라보고 좋아했지만 그렇게까지….

차해준이 자신을 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축 늘어져서 온전히 자신에게 기댄 차해준. 배 속에서 열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진짜 내가 원했던 걸까? 내가 진짜 원해서 그렇게 했던 걸까?

손목을 옥죄던 구속구가 날 선 소리를 내며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송류진은 멍하니 떠올렸다.

차해준은 온전히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웃었다. 항상 무심했던 얼굴이, 어쩔 땐 귀찮아했던 그 얼굴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았지만, 어딘지 불편했다. 감히 내가, 해준이에게 그런 짓을… 왜 내가.

‘그야, 네가 원했으니까.’

말을 걸어 오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송류진은 컥컥대며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입이 틀어막혀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도록 만든 건 너잖아.

‘어라.’

목소리가 웃었다. 분명 웃음소리였다. 목 뒤로 소름이 타고 올라왔다.

‘너 그래도 S급이라고, 지금 내 말을 깨려는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 송류진은 팔에 힘을 주었다. 파자작- 쇠로 된 구속구가 완전히 벌어졌다. 송류진은 손목을 털어 버리고, 조금씩 떨리는 손으로 안대를 끌어 내렸다. 촉촉하게 젖은 눈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입에 끼운 구속구도 뜯어 버렸다.

“아니야.”

오랫동안 말하지 못해, 잔뜩 가라앉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송류진은 눈을 깜박이며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장에 달린 등이 몇 번 깜빡이더니, 픽- 하고 불이 꺼졌다.

“내가, 원한 게 아니야.”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고개를 저으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원한다고? 차해준을 원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기억이 곳곳에 공백이 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정신이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래, 그때.

하얀 얼굴을 한, 한쪽 눈이 파랬던 남자.

“윽-!”

그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그 남자 앞에 섰을 때, 송류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그 눈을 보고 나서,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서….

“헉… 허억….”

‘원하는 대로 만들어 줬는데… 정말, 이러기야?’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원하는 대로, 송류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숨이 막혔다. 내가 원했다고… 내가. 내가 정말 차해준을 그런 위험에 빠트리고 내가….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하네.’

목소리가 그를 비웃었다. 송류진은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바닥에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푹 젖은 눈가에서 떨어진 눈물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정말로 나는…. 송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덜커덕 소리가 들리며, 독방의 철문이 드르륵 열렸다.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들렸다. 송류진은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끈이 풀린 스니커즈였다. 그리고, 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얼굴, 한쪽만 푸른 눈.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거짓말하지 마. 짜증 나게.”

송류진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남자는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송류진의 이마에, 남자의 손끝이 닿았다.

“하긴, 넌 원래 말을 잘 안 들었지. 자꾸 스스로 생각하려 하고.”

남자가 중얼거렸다. 송류진은 남자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마지막이니까, 대미는 장식해야지. 이대로 끝나면 너무 재미없잖아.”

한쪽만 푸른 눈이 안광을 번뜩였다.

“진짜 마지막이야. 산산조각 나서, 깨져 보자.”

남자는 아주 즐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꼭 죽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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