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이 방긋대며 연신 웃었다. 나는 이를 까득 악물며, 간신히 손을 들어 놈의 어깨를 밀쳤다. 진마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되레 내가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너 뭐야.”
진마하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 한쪽이 파랗게 빛이 났다.
“내가 누군지 알면, 어떻게 하려고?”
진마하는 뒷걸음질 친 나를 따라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내가 누군지 알면… 네가 날 구해 주려고?”
“뭐?”
구해 준다니, 무슨…. 나는 이를 악물었다. 개소리에 말려들지 말자. 손이 벌벌 떨리며 힘이 들어갔다. 온몸에서 피가 빠지는 것처럼 기력이 밑으로 숙 빨려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간신히 버티고 섰다. 이놈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무겁게 느껴지는 한야를 들어 올려 검 끝을 놈에게 겨눴다.
“송류진을 그렇게 만든 게 너였냐.”
“아아….”
내 말에 진마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그 애가 원한 거였어. 그때 기억나지? 케이든 말이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염된 지하도시 게이트. 송류진은 그때부터 점점 괴로워하며 이상해지기 시작했었다. 설마….
“게이트 등급을 올렸는데, 네가 너무 손쉽게 깨 버리더라고. 좀 화가 났었거든. 그래서 살짝 건드렸어. 여기를. 아쉽게도 네가 정신을 차리는 바람에 너에겐 제대로 걸 수 없었지만.”
진마하는 제 머리를 가리켰다. 그의 얼굴에 무척이나 환한 웃음이 맺혔다.
나는 얼어붙듯이 굳어 버렸다.
이 새끼가, 게이트 등급까지 조절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된다. 그런… 시스템은 그것을 오류라고 나에게 말했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 그러면 진마하가 건드렸기 때문에, 게이트 오류가 발생한 거였어?
여태껏 벌어졌던 오류가… 한일고 게이트까지… 모든 게….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나도 모르게 검을 휘둘렀다. 사아악- 소리를 내며 횡으로 가른 검을 바로잡아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렸다. 검신이 새파란 마력을 품으며 검기가 일었다. 진마하의 몸이 좌우로 갈라졌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갈라진 진마하의 몸뚱이는 연기처럼 스러졌다. 그 뒤로, 멀쩡한 진마하가 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왜에. 생각해 보니까 불쌍해? 그러니까 마음 한 자락이라도 나눠 줬어야지. 그렇게 내버려 두니까 아무리 강한 S급이라도 머리가 돌아 버리는 거 아냐.”
“개소리 그만 지껄여…!”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데…!
몸을 날려 놈에게 덤벼들려 했으나 순간 무릎이 접히며 넘어지고 말았다. 하, 씨발 빌어처먹을 약…! 제대로 마력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진마하는 설렁설렁 다가와서 바닥에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았다. 그는 마치 바닥에 지나가는 개미를 보는 시선으로, 한쪽 팔로 턱을 괴고 나를 내려다봤다. 일어서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이런 모습 때문에 송류진이 미쳐 버린 걸까? 가장 강하다는 네가 바닥을 기는 꼴을 보니….”
진마하의 새파란 눈동자가 안광을 내뿜었다.
“더 짓밟아 버리고 싶어지네. 괴롭히고 괴롭혀서 눈물 콧물 뽑으며 벌벌 기는 그런 모습이 좀 보고 싶어져.”
“…미친놈, 해 볼 테면 해 봐.”
내가 쉽게 당할 것 같냐? 이 모양 이 꼴로 구르고 있어도 나는 강하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주먹을 꽉 쥐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한야가 보였다. 진마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눈빛 좀 봐.”
“윽!”
“진짜 너….”
놈의 손이 내 멱살을 붙들어 잡았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놈의 손을 움켜쥐었지만, 겉모습과는 다르게 놈은 힘이 강했다. 이 새끼 대체 뭐지.
진마하는 씨익 웃으며 내 뺨을 툭툭 쳤다.
“오류가 오류를 바로잡는다니… 진짜 이 세계도 미쳐 돌아가고 있어.”
“큭….”
“너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들이 하나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잖아.”
진마하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호흡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그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훑는 게 느껴졌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놈의 눈은 광기가 어려 있었다.
“물론 쉬우면 재미없으니까, 지금이 더 재미있긴 하지만… 넌 좀 거슬려.”
진마하는 하아- 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뭐, 어쨌든 다 죽여 버릴 거긴 하지만.”
씨발 뭘 죽인다는 거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보고, 진마하는 가늘게 눈웃음쳤다.
“이 세상. 네가 지키려는 놈들.”
“…뭐.”
“세계의 기둥이라 불리는 놈들을 내가 죽여서, 이 세계를 멸망시킬 거야. 솔직히 좀 쉽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네가 날 방해하지 뭐야?”
“무슨….”
“그러니까,”
진마하는 말하다 말고 눈을 들어 내 뒤를 쳐다봤다.
“이야 이야, 타이밍 죽이고.”
놈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내 멱살을 놓았다. 쿨럭- 기침이 터졌다. 진마하는 손을 탈탈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해준아. 잘 지켜.”
“너 이 씨발… 거기 서.”
“아등바등하는 네 모습이 흥미가 돋으니까, 잠시 동안은 살려 둬 볼게. 알겠지?”
진마하는 씩 웃으며 몸을 돌렸다. 놈이 멀어지는데도 나는 바닥에 쓰러져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저 새끼 대체 뭐야…. 잡아서 제대로 무슨 소리인지 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시스템을 아는지… 어떻게….
몸이 아득하게 잠기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내뱉는데, 누군가 내 몸을 붙잡아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옅게 나는 체향.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백루찬이다.
“대체… 그렇게 나가서 왜 여기서 쓰러져 있는 건지 모르겠네.”
백루찬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지쳐 버린 내 얼굴을 훑어보다가, 허리에 팔을 감고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백루찬의 어깨에 제대로 가눠지지 않는 고개를 묻었다.
“저… 저 새끼. 잡아….”
“응, 누구 말하는 거야.”
흐려진 시야에, 멀어지는 진마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놈은 걷다가 고개를 돌려 나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 새털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나에게만… 보이는 모습인 건가. 백루찬은 시야에 누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되물었다.
“형, 누굴 잡으라는 거야.”
나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S급에게 잡히지 않는 기척. 바로 앞에 있는데, 저놈을 못 알아보다니. 정말 나에게만 보인 건가. 나는 숨을 가쁘게 들이쉬며, 백루찬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숨이 턱 막혔다. 세계의 기둥을 죽인다고 했다, 진마하는. 나는 놈들을 살려야 하고. 그래야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시스템이.
‘세계가 하는 말을 다 믿지 마.’
진마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 믿지 말라니… 대체 왜. 무엇을 알고 있길래….
“열나는 거 같아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병동에 다시 넣어 버려야겠네.”
백루찬이 가볍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나는 가물거리는 시야에 눈을 감았다. 지켜야 할 세계의 기둥… 아무도… 죽게 할 수…….
***
눈을 뜨니, 보이는 건 백루찬의 집 천장이었다. 아무래도 기절을 한 거 같았다. 넓은 방 안엔 아무도 없었고 암막 커튼이 두껍게 쳐져 있어 어두웠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아까는 진짜 뒤질 것처럼 몸에 힘이 안 들어갔는데, 좀 오래 누워 있었던 건지 아까보단 몸 상태가 나아진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진마하. 그 새끼 대체 뭐였지? 내가 본 게 맞는 건가? 아니면 지금 미쳐서 잘못된 환상을 보는 건가? 애초에 시스템을 보는 것 자체부터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눈앞에 나만 볼 수 있도록 뜨는 텍스트라니. 생각할수록 기가 찼다.
[\( •︠_•︡ )/ ( ˃̣̣̥᷄⌓˂̣̣̥᷅ )(◞‸ლ)]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무어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모티콘. 대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로 떨어졌을 때 나는 시스템에 대해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었지.
[ヽ( ;゚;ж;゚;)ノ]
빌어먹을, 대체 너 뭐냐고. 이럴 땐 그냥 조용히 닥치고 있어. 왜 자꾸 나타나서 혼란스럽게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신경질적으로 눈앞을 휘젓자, 시스템창이 사라졌다. 갈수록 더 복잡해지는 거 같아서 속이 터졌다.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려나 줄 것이지, 지금 설명도 안 하고 이모티콘이나 날려 대냐. 분위기 파악 좀 하라고….
“…젠장.”
그래, 시스템에게 화를 내 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나는 세계의 기둥이라 불리는 놈들을 찾아서 그들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 이제 보니 이 퀘스트, 진마하 때문에 나에게 떨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놈은 메인 캐릭터들을 죽일 거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송류진도 그렇게 만들었던 건가. 하지만 그렇게 세뇌시킬 정도면 스스로 죽게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정신 착란을 보이는 송류진을 스스로 끝장내 버리거나….
나에게도 마치 자신이 자비를 베풀어 살려 주는 것처럼 말을 했었다.
시스템은 나에게 클리어런스, 오류를 제거하는 자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여태껏 제멋대로 열리고 등급이 올라간 게이트를 처치해 왔고.
메인 캐릭터인 천새벽도, 게이트를 통해 위험에 빠졌었다. 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천새벽은 한일고에서 죽었을 것이다.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놈이 직접 메인 캐릭터들을 죽일 수 없는 거라면?
케이든이 튀어나왔던 오염된 지하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놈은 나타나지 않았고, 케이든을 조종했다. 그의 등급을 올려서 공격하게 했다. 만약에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당했더라면 백루찬 송류진, 우반희까지 모조리 다 거기서 죽었을 수 있다.
그래서, 진마하는 게이트를 이용한 거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일 수 없기 때문에.
거기서 내가 끼어들어서 천새벽도, 다른 메인 캐릭터들도 위험에서 벗어난 거고.
그러니까 나에게 적대적으로 구는 거다. 놈은 살려 준다고 말했지만 본인 스스로 죽일 수 없는 거다.
[ ₍₍ ◟(∗ˊ꒵ˋ∗)◞ ₎₎]
눈앞에 번쩍거리며 떠오른 시스템창이 맞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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