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귀가
나는 백루찬이 불러온 차량을 타고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헐떡거렸는데, 옆에서 백루찬이 어깨를 내줘서 기대서 갈 수 있었다. 차를 타니 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눈을 감고 참았다.
모르젠트에 도착하자마자 백루찬은 나를 병동에 집어넣으려 했지만 거부했다. 이제 약이라면 신물이 나기도 했고… 진짜 좀 편하게 쉬고 싶었다.
“약 기운 빠지려면 좀 걸려요. 차라리 그동안 길드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백루찬이 나를 말렸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집에 가고 싶다. 혼자 좀 쉬게 해 줘라.”
안 그래도 한일고 일도 있었고, 나는 그때 희생된 아이들을 제대로 추모조차 못 했다. 지우영과 현길용은 제대로 처분을 받았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길드에 있어도 소식은 들을 수 있겠지만 잡혀 있는 느낌이 싫었다. 한일고 교장은 어떻게 되었는지, 다른 아이들도 고3인데 수업이나 시험은 어떻게 되는지… 찾아봐야 할 것들도 많았다.
“야아악 차해주운!!”
모르젠트 백루찬 사무실 소파에 드러눕듯 앉아 있는데, 멀리서부터 괴성이 들렸다.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겠다. 잠시 후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홍희가 들어왔다.
“이, 이 그동안 연락도 다 씹고! 진짜 어디 갔었던 거야!”
홍희가 달려와 내 목덜미에 징징대며 매달렸다. 백루찬에게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해서인지 표정엔 서운함이 가득했다. 그래, 뭐 어쨌든 내 탓이긴 하다…. 나는 홍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야, 왜 더 마른 거 같지? 한느님 1그램도 덜어 보낼 수 없다구! 볼은 왜 이렇게 홀쭉해?!”
홍희가 내 뺨을 찰싹 붙잡고 눈을 부릅떴다. 요모조모 살피는 게 귀여웠다. 아휴,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좀 기쁘네. 슬쩍 웃자 그 웃음이 어떻게 보였던 건지 홍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다. 그때, 문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형아.”
거기엔 한솔이와, 그리고 새벽이가 서 있었다. 둘 다 급하게 달려온 건지 머리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한솔이가 울먹거리는 얼굴로 내게 양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나는 그런 한솔이를 덥석 안아 무릎에 앉혔다. 아, 한솔이 며칠 못 봤다고 그새 더 큰 거 같지? 약기운으로 힘을 못 써서 그렇게 느낀 것 같기도 하고…. 한솔이가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축축하니 젖는 느낌이 나는 걸 보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왜 울어. 형 이렇게 멀쩡히 왔는데 왜 울어, 우리 한솔이.”
“흐엉… 형아 진짜… 나는 형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너무 두려웠다는 듯 말하는 것에,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 그래. 하지만 형아는 강한데. 물론 이번처럼 당하기만 하고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우습긴 한데….
“형아가 누구야. 그런 일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연락도 안 되고… 길마 형도 말이 없고… 희야 누나도 아무런 말도 안 해 주구… 나는…흐엉… 내가 어린애라서… 흐어어엉!”
한솔이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딴엔 어수선한 길드 내부를 보면서 이것저것 걱정을 했었는데 아무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으니까 많이 서운했던 것 같다. 나는 한솔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며, 쭈뼛대며 다가오는 새벽이를 바라봤다.
피투성이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모습이 마지막이어서 그런지, 지금처럼 깔끔하고 건강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약간 울컥 치밀어오르는 게 있었다. 그런 감정을 새벽이도 느낀 건지 눈가가 벌겠다. 새벽이는 옅게 웃었다.
“선생님….”
“새벽아, 이리 와.”
새벽이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내 품에 안겼다. 둘을 안고 있으려니 버거웠지만 나는 열심히 아이들을 토닥거려 주었다.
“걱정했어요… 진짜….”
새벽이가 조용히 속삭였다. 안색도 좋아 보이고, 뺨도 발그레한 게 그동안 잘 지낸 거 같았다. 모르젠트에서 맡아서 다 도와줬을 테니, 전보다 훨씬 나아졌겠지. 나는 여전히 훌쩍대며 내 품에 고개를 묻고 있는 한솔이의 등을 토닥이면서, 새벽이에게 한일고 일에 대해 물었다.
“어디 계셨던 거예요? 다들 뒤집어져서 매일 뉴스 보도로 도배가 되었었어요. 학교는 임시 폐쇄 조치가 내려졌고요. 합동 장례식이 내일 있어요. 다들 선생님 엄청 찾았어요….”
“그랬어? 나, 응. 그 좀 멀리?”
“멀리?”
새벽이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되물었다.
“그 사람이 그런 거예요?”
새벽이가 누굴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 사람?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푹 쉬다 왔어.”
무언가 눈치챈 것처럼 보여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을 둘러댔다. 송류진에게 어쩌면 납치를 당한 거나 다름없는데 그게 진짜 송류진이 한 것도 아닌 거 같고 이걸 또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지니까…. 그리고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걱정할 테니까. 새벽이는 내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내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학교… 교장도 징계 받고 직위 해제되었어요. 한일 재단 이사장도 바뀌었고…. 그때 피해 본 아이들 보상은 안 되겠지만… 한일 재단 측에서 제대로 보상해 준다고 나서긴 했어요. 그리고….”
새벽이는 조목조목 천천히,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풀어서 말해 줬다. 그래도 대부분 다 잘 풀린 거 같았다. 물론 희생자에 대한 건…보상이 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내일이 합동 장례식이라니,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지만 무조건 참석하려고 마음먹었다.
“너는. 너는 어떻게 됐어? 모르젠트로 오기로 한 거야?”
새벽이게 묻자, 새벽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결정을… 못 내려서.”
“모르젠트 조건 별로였어? 내가 챙겨 달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아뇨. 진짜 정말 잘 챙겨 주셨어요! 지우영네 집에서도 나왔고, 어머니도 따로 모셨어요. 빚도 계약금에서 공제해 주신다고 하셨고… 대리인으로 나서 주셔서 각성자 등록도 수월하게 마쳤어요. 그런데….”
“그런데?”
새벽이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라, 귓불이 벌게진 거 같은데.
“선생님 돌아오시면… 더 얘기해 보고 결정하고 싶어서…. 선생님 의견도 듣고, 그리고….”
새벽이가 내 눈치를 힐끔 보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하고 같이 있고 싶어서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꺼내는 말이 귀여웠다. 뭐 나야 공식적으로는 모르젠트 소속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냥 등록하면 될 텐데. 나와 더 얘기하고 붙어 있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거 아냐.
“그래, 그래. 나랑 같이 생각해 보고, 대화도 많이 나누고, 그리고 결정해 보자.”
쑥스러워 하는 새벽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거기선 홍희가 감동한 표정으로 코밑을 쓱 훑었다. 아니 넌 왜, 갑자기 감동했는데?
“역시 우리 한느님…. 자랑스럽구만.”
“뭐야….”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지만 결국 웃음이 터졌다. 아, 이 얼굴들을 오랜만에 다시 보니 너무 좋았다. 마음의 피로가 풀리고 평안이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물론 해결할 일들은 아직 쌓여 있고… 그렇긴 하지만 잠시 즐겨도 되겠지. 세뇌 스킬에 당해 있었을 때 느꼈던 생각들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런 가스라이팅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그때 기분은 정말 외로웠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래서 송류진이 꺼내는 말 한마디에 더 기쁘게 반응했던 거 같다.
그런데 대체 그 스킬은 어떻게 걸렸던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송류진도 이상했는데, 송류진은 지금 괜찮아졌으려나…. 생각하니 속이 답답해졌다.
백루찬이 사무실 문가에 기대서서 애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뭐 웃어, 자식이. 툴툴댔지만 저 모습까지 정겹게 느껴졌다.
늦은 시간이라, 한솔이부터 자라고 펜트하우스로 올려 보내고, 나도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그런데 새벽이는 지금 어디서 머물고 있지? 지우영네에서 나왔다고 하니까 어머님이랑 따로 지낼 수 있게 홍희가 방을 구해 줬으려나.
“어디서 지내고 있어?”
“길드 내 숙소를 빌려주셨어요.”
“아, 그래? 다행이다.”
모르젠트 숙소라면 관리가 잘되어 있을 테니,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랑 둘이 있기엔 좁지 않나. 가족이니 상관없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새벽이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숙소라고 해도 얹혀 있는 거니까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긴 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모르젠트보다 좋진 않지만… 내 집에 가서 머물래?”
“네?”
“아무래도 열아홉 살이면 다 컸고… 음, 길드 선택도 고민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차라리 선생님 집 가서 며칠 머물면서 생각해 보는 건 어때?”
“…모르젠트 빈방 많아요.”
백루찬이 불쑥 끼어들었다.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새벽이의 얼굴은 환해졌다.
“정말요? 저, 그래도 돼요?”
“뭐 어때. 길드 선택할 때까지만이라도….”
“왜 형네 집으로 데려가요? 여기 있으면 되는데. 부족한 거 있으면 다 챙겨 줄 거예요.”
“아직 모르젠트로 오기로 한 것도 아닌데 새벽이 입장에서는 부담도 되고 민폐라고 느낄 수도 있잖아. 다른 길드 갈 수도 있는 거고.”
“…이미 제안 다 했어요. 새벽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는데.”
백루찬의 말에, 천새벽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 더 생각해 보고…! 선생님하고 얘기해 보고 정할게요!”
백루찬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하, 이놈아 꼬시다. 백루찬은 S급 결계사에게 뭐라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모르젠트 이름을 거부할 리 없다고 생각했겠지.
“한솔이한테도 안 그러더니… 새벽이한테만…. 나한테도 안 그러더니….”
백루찬이 혼자 중얼대며 띠꺼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킥킥 웃으면서 새벽의의 손을 잡고 사무실을 나섰다. 백루찬에게 기쁘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르젠트를 나와서, 홍희가 내어 준 길드 차량을 타고 집까지 편안하게 이동했다. 가는 도중에도 계속 몸 상태가 안 좋아서 힘이 빠졌지만, 새벽이가 옆에 있으니 되도록 티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온 것 같은 내 집에 도착해서,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하, 이 냄새. 이 집 구조. 내 침대. 벌써부터 드러눕고 싶었지만, 침착하게 새벽이부터 챙겼다.
“별거 없지? 그래도 나름 지내다 보면 괜찮아. 침대는 하나뿐이긴 한데… 같이 자는 거 싫으면 내가 소파에서 자도 돼.”
“왜 선생님이 소파에서 주무세요, 저는 괜찮아요!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
새벽이가 손사래를 쳤다.
“무슨 소파야. 그럼 그냥 같이 자.”
침대도 킹사이즈라 널널하다. 나는 새벽이부터 씻으라고 욕실로 보내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하, 씻고 자려고 했는데,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새벽이 얘기도 들어 줘야 하는데….
***
천새벽은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닫았다. 달칵이는 소리가 조용하게 거실을 울렸다. 물기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조용한 숨소리만 들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선 차해준이 이미 잠들어 있었다. 천새벽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침대맡에 걸터앉아서, 잠든 차해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다시 만났을 때 어딘지 아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어딘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다시 만난 차해준은 며칠 새 오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쾌활하고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었던, 모두를 구했던 그날과는 달리….
“음….”
자고 있던 차해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작게 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인다. 천새벽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작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와서 심장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 아직 아무것도 아닌 자신에게는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게 못내 서럽고, 아쉬웠다. 천새벽은 조심스럽게 흐트러진 차해준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선생님이 궁금해요.”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누구와 있을 때 가장 편하게 풀어지는지, 진심으로 웃는 얼굴은 어떤지, 행복해할 땐,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모습도.
선생님이 나를 지켜 준 것처럼, 나도 선생님을 지키고 싶어요.
하지 못할 고백을 조용히 속삭이며, 천새벽은 차해준의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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