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제정신인가?”
“뭐라는 거야. 왜, 돌아 보여?”
“제정신 맞네. 나는 또 지난번처럼 뭔가 해 줘야 정신 차리려나 싶어서 조금 기대했잖아요.”
기대는 무슨, 얼굴에 짜증 난다고 대놓고 써 놨으면서. 너 표정 굳어진 거 다 봤거든?
그리고 뭘 해 주는데. 뭘 해 줬는데! 오염된 지하 도시 게이트를 나왔을 때가 떠올라 나는 아직도 얼굴을 잡고 있는 백루찬의 어깨를 밀쳤다.
이번에는 쉽게 밀렸다. 화사하게 웃는 얼굴은 대번에 기분 좋아진 티가 났다. 뒤에서 우반희가 질린다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큼,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였네.
하지만 가장 당황한 건 나였다. 특수 스킬이라니. S++급을 걸리게 할 만한 정신 공격 스킬이 있다고? 그것도 송류진한테?
말이 안 된다. 그에게 정신 공격 스킬은 없었다. 무엇보다 송류진은 대지 속성 각성자였다. 그럼 대체… 누가 어떻게 한 거지? 혹시 송류진이 이상하게 행동했던 것도 나처럼 스킬에 당해서였던 건가?
심각하게 생각하는데, 우반희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지금 간신히 서 있기도 힘들어서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데 놈이 쳐 대자 몸이 휘청거렸다. 몸 상태는 스킬의 영향이 아니었나….
우반희가 나를 보고 눈가를 살짝 찌푸리더니, 내 팔을 꽉 붙잡아 부축하고는 물었다.
“송류진은 어디 갔어?”
송류진…? 걔 아까 어디 나갔다 온다 그랬었는데…. 머릿속이 워낙 뒤죽박죽이었던 터라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스킬의 영향인지 아직도 머리가 살살 아팠다.
“어디 간다고 했었더라. 아까 분명….”
그렇게 말을 하며 고개를 드는데, 갑자기 우반희가 내 턱을 붙잡았다. 이번엔 너냐? 뭐 하냐는 듯 인상을 찡그렸는데도 그는 손을 놓지 않고,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무언가를 확인했다. 질색한 얼굴로 손을 쳐 내려 했으나 우반희는 쓰읍- 하며 내 손짓을 저지했다.
“가만히 있어 봐.”
우반희의 눈에 모노클이 씌워진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붉은빛이 한차례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억지로 눈을 뜨고 있자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정신이 멍하고, 힘이 빠지고, 마력이 안 돌지 않나?”
“뭐?”
마력? 나는 의식해서 마력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우반희 말대로 몸 안의 마력 흐름이 원활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사용하려 움직여도 뚝뚝 끊기는 그런 느낌이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이 없자, 놈은 내 얼굴을 보고 확신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각성자 관리 본부에서 쓰는 약이 있어. 포르페늄이라고. 제어하기 힘든 상급 각성자를 신문, 수감하기 위해 사용하는 약이지. S급에겐 그렇게 크게 효과가 없는데… 너 대체 얼마나 먹은 거냐?”
그런 약을 내가 먹었을 리가- 아니다. 먹었다. 송류진이 아침 점심 저녁으로 챙겨 주었던 약이 떠올랐다. 다섯 알 정도 되는 것들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뭐야. 정말로, 송류진이?
우반희는 아주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하….”
송류진이 그랬을 리가…… 없는데. 순간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는데, 우반희가 다급하게 내 허리를 감고 받쳐 주었다. 백루찬도 쓰러질 것 같은 나를 보고는 내 팔뚝을 잡아채 들어 올렸다.
“그게… 뭔….”
어이가 없어 입가에서 연신 실소가 나왔다.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인다. 아직도 제대로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지가 않았다. 머리가 아프다.
내가 멍청하게 늘어진 사이, 우반희는 백루찬을 힐끔 보고는 나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백루찬은 무언가 무척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나는 내 허리를 붙잡은 우반희에게 매달리듯 기댔다. 호흡이 헐떡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송류진. 류진아, 대체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왜 이렇게 환장하는지 대충 알 것 같긴 한데….”
뜻 모를 소리를 혼자 중얼거린 우반희가 나를 보다가 주머니에서 호출기를 꺼내 들었다. 어딘가로 연락하려는 것 같았다. 그때, 백루찬이 붙잡고 있던 내 팔을 잡아당기며 나를 우반희의 손에서 빼냈다.
“팀장님은 정말 안 그런 거 같다가도 한 번씩 질척거린다니까, 질리게.”
백루찬이 잡아당기는 바람이 쑥 딸려 간 나는 졸지에 또 새끼 사슴처럼 비틀댈 수밖에 없었다. 하, 이 새끼들이 지금 사람 가지고 노냐?
“놔라.”
“형은 왜 나한테만 그래?”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뭘 너한테만 그래? 할 말은 많았지만 말다툼하기엔 내가 지금 너무 힘들었다.
“들어갈래. 좀 누워야겠어.”
빌어먹을 약 때문에 토할 것 같았다. 머리는 깨질 것 같고.
“누가 의약품 관리했어? 돌았냐? 그 새끼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해. 그리고 관리팀 출동하고. 위치는-.”
우반희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성질을 냈다. 백루찬이 내 어깨를 감싸고 제게 기대게 하더니, 귀에 속살거렸다.
“여기 말고, 집으로 가요. 우리 집.”
하, 그놈의 집, 집. 집슈탈트 붕괴 올 거 같다, 이놈들아. 우리 집은 무슨, 난 갈 거면 내 집으로 갈 거라고! 왜 멀쩡한 내 홈 하우스를 놔두고 자꾸 우리 집을 찾는지 모르겠다.
“다들 꺼져… 일단 좀 쉬자고.”
죽겠다고, 새끼야…. 내 말에 백루찬은 모호한 얼굴로 웃었다. 웃냐? 웃어? 누구는 아파 죽겠는데 웃어? 짜증이 확 났지만 뭐라 할 힘도 없었다. 쉬게 해 줘… 제발.
그때,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검은 봉투를 든 송류진이었다.
“어쩐지. S급 기운이 느껴지더라니….”
송류진은 표정 없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이 상황을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 잔잔한 얼굴이었다.
들고 왔던 검은 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뒤늦게 생각이 났다. 먹을 것을 사 온다고 했었던가. 그때의 다정했던 표정과 지금의 얼굴은 완전 상반되어 매치가 되질 않았다. 쟤가 저런 표정도 할 줄 알았나…?
송류진은 천천히 바닥에 깔린 포석을 밟으며 짧은 계단을 올라왔다. 우반희와 백루찬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피부로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미약한 살기에 몸이 움찔하며 떨렸다.
고개를 돌리자, 백루찬은 묵중한 시선으로 송류진을 보고 있었다. 백루찬이 뿜어내는 적대감이 느껴졌다.
송류진은 천천히 걸어와 앞에 서더니, 이내 입꼬리를 약하게 올리며 내게 손을 뻗었다.
“해준아, 이리 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눈은 굳어 있고 말투는 고압적이었다. 내가 아는 송류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송류진을 보다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송류진. 나와 각인된 메인 캐릭터. 내가 챙겨야 하는 놈이다.
“어, 류진아. 이놈들이 어떻게 여길 알고 찾아왔네. 근데 나도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아. 할 일도 있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백루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는 표정이었는데, 나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그래, 인마. 너는 이해 못 한다…. 송류진은 내 오랜, 유일한 친구이자 내가 구해야 할 메인 캐릭터라고.
상태가 이상하단 걸 알게 된 지금, 이것에 대해 알아낸 뒤 송류진을 정상적으로 돌려야 할 의무가 나에게 있었다. 나는 백루찬에게서 한발 멀어지며 앞을 바라봤다.
어딘지 이상한 송류진. 대체 무엇 때문일까…. 각인 때문이라기엔 너무 변했다. 안 그래도 세뇌당했을 때 각인해서 걱정이 큰데, 케이튼을 처치할 때 뭐 문제라도 생긴 걸까? 속이 답답했지만 허탈한 마음에 그저 웃어버렸다. 그때 송류진이 되물었다.
“어디로 돌아가?”
“어? 나도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쉴 만큼 쉬었고…. 하하, 다 네 덕분이다. 네가 챙겨 줘서.”
백루찬이 내 손목을 붙들었지만, 나는 잡힌 손목을 빼냈다. 우반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송류진을 살피고 있었다. 송류진은 내 말에 이상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나를 쳐다봤다.
“어딜 간다는 거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순식간에 송류진의 기세가 바뀌었다. 강력하게 일어나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약 때문에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위압감이 나를 압박해 왔다. 백루찬도 지지 않고 기세를 일으켰다.
“쿨럭-.”
예민하게 찌를 듯 느껴지는 살기에 헛기침이 터졌다. 백루찬과 송류진의 대치가 이어졌다. 와 씨, 혹시 나도… 이런 적 있었나. S급이 내뿜는 살기에 몸속에 마력이 요동친다.
“야, 야. 둘 다 그만해.”
말리려 백루찬과 송류진을 번갈아 보는 순간이었다. 순간 송류진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송류진의 한쪽 눈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뭐지?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내리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눈. 저런 오드아이 어디서 봤는데.
목뒤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번뜩이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 눈…!
“너 뭐야.”
잔뜩 굳어 버린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내 말에 백루찬과 대치하던 송류진이 나를 쳐다봤다. 송류진은 환하게 웃었다.
“갑자기? 나 류진이잖아, 해준아.”
송류진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밑으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한야의 손잡이가 감긴다. 검을 뽑자, 녀석이 웃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느리게 옆으로 기울였다.
나는 잔뜩 굳어서 검을 겨누었다. 저 눈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갈색 머리의 순한 인상을 한, 안경을 벗자 인상이 확 바뀌며 두 눈이 다르게 빛나던 놈.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진마하. 지금 송류진은 그놈의 눈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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