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진마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았다. 그는 타운 하우스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 있었다.
외곽에 위치했으나 도로를 잘 정비해 놓아서 걷기 나쁘지 않았다. 진마하는 타운 하우스를 하나하나 지나며, 정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송류진과 차해준이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냥 시간 때우기 위함이었다.
이제 집 두 채만 지나면 송류진의 집이 나왔다. 진마하는 남아 있는 음료를 모두 마시곤 얼음까지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었다.
“아 더워.”
혼자 더위 때문에 짜증 난다는 듯 중얼거리면서, 송류진의 집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없이 건조했다.
송류진은 차해준을 어떻게 하려는 걸까?
에이, 설마 그렇게 기회를 주고 지금도 도와주고 있는데 눈앞에 있는 떡도 못 먹으면 그런 등신이 어디 있어.
“그런데 그런 등신이 여기 있네?”
진마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마하의 시야는 그의 스킬 덕분에 송류진과 공유가 되고 있는 상태였다.
송류진을 조종하기 위해 그가 욕망하는 것을 자극하여 ‘잠식’시켜 놓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간혹 이럴 때면 기대했던 재미가 반감되곤 했다.
역시 S급은 다르다는 걸까. 너무 손쉽게 굴면 더 재미가 없어 금방 죽여 버리고 말았는데, 되레 이렇게 나오면 흥미가 생기는 동시에 짜증이 났다.
눈앞에 있는 장난감이 말을 안 듣는 것을 보고 당장 제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가도, S급 장난감은 구하기 쉽지 않기에 마음대로 하라고 풀어놓게 된다.
“나도 참, 너무 여려서 탈이야.”
진마하가 쯧-하며 혀를 찼다. 그때 그가 서 있던 타운 하우스의 현관문이 열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나온 집주인이 맞은편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뭐 해요?”
경계하는 눈빛에 진마하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아, 너무 더워서 잠깐 얼음 좀 먹으려고요.”
진마하는 손가락으로 제가 들고 있는 얼음 컵을 가리켰다. 집주인은 그럼에도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여기 살아요? 남의 집 앞에서 이러고 있으면 좋게 보이지 않는 거 알아요?”
아 귀찮게.
웃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어느새 무표정이 된 진마하를 앞에 둔 집주인은 그의 기세가 변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러고 있지 말아요. 내가 시비 거는 게 아니라 거슬려서 그래.”
“친구들이 사는 데, 놀러 온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들?”
“네. 친구들이요. 진짜 친한 친구들이거든요!”
“아 저기, 저 집? 그 젊은 청년들? 그럼 그쪽으로 가지, 왜 여기 있어?”
집주인이 혀를 차며 인상을 찡그리곤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진마하는 그런 집주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송류진과 차해준이 있는 집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들고 있던 얼음 컵을 툭 던졌다.
“흐음…. 음…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좋았을 텐데.”
진마하의 머릿속으로 사방에 풀어 둔 패밀리어의 시야가 공유되었다. 하늘에 있는 패밀리어의 눈에 차량 한 대가 들어왔다. 우반희의 차였다. 이번엔 또 다른 패밀리어가 시야를 공유해 왔다. 이번엔 펼친 우산을 접고 있는 백루찬의 모습이었다. 영상이 상영되는 듯한 장면들을 보고 진마하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음… 짜증 나.”
차해준에게 ‘잠식’을 시도한 건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 제대로 걸린 적은 없었다.
송류진을 이용해 차해준에게 최면을 걸었다. 시선과 단어들로 말이다. 시야가 공유되는 이점을 이용한 방법이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암시를 심고, 본격적으로 세뇌를 시작한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시전자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스킬 ‘잠식’. 그걸 사용하려 했지만 송류진만큼 정신 상태가 흔들려 있지도 않았고, 정신 방벽도 견고해서 도무지 뚫리지가 않았었다.
그래도 자기 암시라도 걸 수 있었던 건 송류진이 각본에서 챙겨 왔던 약 덕분이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포기해야 하나? 진마하는 싱글싱글 웃으며 제가 서 있던 집 앞 정원을 느긋하게 걸어 들어갔다.
어차피, 송류진은 이제 곧 터질 테니까. 재미가 반감되긴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 너무 상했으니 그 스트레스는 풀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진마하는 현관문 앞에 서서 똑똑 노크했다가 문고리를 잡고 주인이 맞이해 주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잠긴 문은 더없이 쉽게 열렸다. 거실 끝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흐으음, 음, 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진마하는 산뜻하게 웃는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닫았다.
***
우반희는 차에서 내렸다. 그와 함께 조수석에서 내린 현태웅이 운전석으로 옮겨 타고 차창을 내렸다.
“저 정말 가도 됩니까?”
되묻는 말에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걸음을 옮겼다. 현태웅이 거듭 가도 되냐고 소리치면서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한번 말하면 믿지를 못해. 팀장을 뭐로 보고.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차가 떠나가는 것을 보는데, 그때 누군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우반희는 잠시 숨을 훅 들이켜다 멈칫했다.
희미하지만, 피 냄새가 났다.
우반희의 고개가 뒤쪽의 남자를 따라 움직였다. 갈색 곱슬머리 남자가 걷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희끄무레하고, 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싱긋 웃고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다.
…착각인가. 우반희는 인상을 찡그리며 남자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때 반대편에서 백루찬이 하늘에서 사뿐히 착지했다. 먼저 도착한 건지 기다린 듯한 폼이었다. 우반희는 현태웅이 알려 준 타운 하우스를 가리켰다.
“저기야.”
우반희가 가리킨 집만, 높다랗게 담벼락이 쳐져 있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미미했다. 백루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송류진은 어디 있는 건가.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지만 둘에게 문이란 그다지 쓸모 있는 편이 못 되었다. 전자 도어로 잠겨 있는 문은 백루찬의 손이 닿자마자 스파크를 튀며 부서졌다.
두 사람은 큰 대문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와 넝쿨 식물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고, 꽃까지 심겨 있었다. 관리가 무척 잘되어 있는 정원은 다른 곳보다 꽤 넓었다. 우반희는 실소했다.
“이거 누가 해 놨는지 티가 나는데.”
단기간에 정원을 이렇게 빼곡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없었다. 그중 가장 빼어난 실력자를 알았다. 특수 각성자 송류진.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가운데, 정원 한가운데 있는 티 테이블과 안락의자엔 누군가 누워 있는 게 보였다. 까만 머리칼이 의자 등받이 끝부분에서 살짝 보였다.
누군지 단번에 알아챘는데, 느껴지는 기운이 미약해서 백루찬은 우반희가 입을 열려는 것을 막았다.
“잠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지독하다, 그래.”
우반희의 한심하단 시선을 받고도 백루찬은 싱긋 웃었다. 무언가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 손에서 놀고 있던 것을 누가 빼앗아 갔는데 다시 되찾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백루찬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의할 줄 몰랐다.
그늘 하나 없는 곳에 놓인 안락의자에 누워 있다니. 지금 좀 더운데. 그런 생각을 하며 백루찬이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형.”
나지막이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차해준은 정말 잠들어 있었다. 뜨거운 햇빛에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이마에 땀도 맺혀 있다. 더운 건가…. 허리를 숙여 차해준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백루찬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유심히 바라봤다.
“음….”
차해준이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깜빡이는 눈꺼풀을 멍하니 보던 백루찬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차해준은 아직 제대로 잠에서 깨지 않은 듯 눈을 여러 번 깜박이다가, 백루찬이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네가 여기 왜 왔어?”
잠긴 목소리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고 있었다. 백루찬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오면 안 돼요?”
차해준은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으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백루찬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다시 만난 차해준은 어딘지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흡사 경계하는 듯한 모습 같았다.
경계? 왜?
“형, 보고 싶었잖아요. 왜 전화도 다 씹고, 문자는 답도 안 해요? 한솔이가 엄청 화냈어. 형 연락 안 받는다고.”
“…무슨 소리야. 궁금해하지도 않았으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 윽.”
차해준은 갑자기 두통이 이는 듯 머리를 붙잡았다. 웃고 있던 백루찬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잠시 거칠게 숨을 내쉬던 차해준이 그를 쳐다봤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백루찬의 물음에, 차해준은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누군가를 찾는 거 같았다.
“누구 찾아요?”
“류진아, 송류진.”
차해준은 백루찬의 물음도 무시하고 송류진만 찾았다. 그러나 집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차해준은 어딘지 불안한 얼굴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무릎이 푹 꺾이더니 넘어지려 했다. 백루찬이 황급히 다가가 그런 차해준의 허리를 감싸 붙들었다. 부축해 주려 어깨를 감싸자 차해준은 몸을 피하려 들었다. 허리를 붙든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차해준은 백루찬을 밀어내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비틀거렸다.
“형.”
“…만지지 마.”
이제 보니, 이마에 맺힌 건 식은땀이었다. 더워서 흘린 게 아니라. 안색이 워낙 창백한 사람이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도 늦게 눈치챘다. 백루찬은 제 손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쓰지만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대는 차해준을 자세히 훑었다. 이상했다. 이런 가벼운 스킨십을 거부할 사람도 아니었고,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데 밀어내지 못할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차해준은 이상했다. 결국 아등바등하는 차해준을 백루찬이 먼저 놔줬다.
“읏….”
차해준은 백루찬을 떼어 내고 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얼마 못 가서 휘청거리고 말았다. 백루찬은 바짝 다가가 다시 그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호흡하기 어려운 건지 자꾸 허리를 굽히려 했다.
“류진, 흐으….”
“형, 나 좀 화나려고 해.”
바르작대면서 제 어깨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으면서 입으로 찾는 건 송류진이었다. 안색도 이상했고, 그동안 쉬었던 사람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송류진이….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백루찬은 눈치가 아주 빨랐으니까.
손끝이 차게 식으며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이 그려졌다. 백루찬은 웃었다.
“…기분 개 같네.”
제 손이 아닌, 남의 손으로 망가진 게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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