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나는 송류진에게 이끌려 그가 말한 ‘우리 집’으로 갔다. 타운 하우스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은 정원도 있었고, 담벼락이 크게 세워져 있어서 보안도 괜찮아 보였다. 병원에서 나올 때 경호원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아귀 떼처럼 달려드는 기자들을 보고 송류진이 왜 기자들 핑계를 댔는지 십분 이해했다.
솔직히 스킬을 쓰면 충분히 따돌릴 수야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사생활이 관찰당하는 건 좀 부담스럽긴 하지.
그렇게 납득하고, 나는 송류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거실과 채광이 쏟아지는 벽면 창이 먼저 보였다.
“해준아, 잠깐 앉아서 기다려 봐. 병원에서 약 받아 왔어. 그거 먹자.”
송류진은 나를 거실에 두고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물병을 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천천히 집 안을 둘러봤다.
역시 부잣집 아들내미는 수준이 다르다니까.
집이 과하게 좋다. 무슨 호텔같이. 이래서 차해준이 부담스러워했겠지. 씀씀이 자체가 남다른 놈이라서 무언가 받기도 너무 과하고.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마당 앞 정원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진짜 힐링되는 기분이었다. 아, 이거… 너무 좋은데?
“해준아, 이거 먹어.”
송류진이 물 잔과 함께 약봉지를 들고 왔다. 약국에서 지어진 듯 확실히 봉해져 있는 약봉지를 하나 뜯어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약을 꼭 먹을 필요가 있나?”
“각성자라도 인간이야, 해준아.”
그건 맞긴 하지만… 상태 이상으로 쓰러졌던 거라서 이제 괜찮은데.
송류진은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한숨을 쉬며 직접 약봉지를 뜯어 줬다.
“각성자에겐 일반 의약품 잘 안 듣는 거 때문에 그래? 이건 각성자용이고, 체력 포션 원료랑 이것저것 배합되어 있는 거니까 잘 챙겨 먹자.”
이렇게까지 말하니 안 먹을 수가 없었다. 약 먹는다고 죽을 몸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한 번에 약을 삼키고 물을 원샷 했다.
송류진은 내가 먹는 것을 지켜보더니 옆에 앉았다. 팔뚝이 딱 달라붙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불편해서 꼼지락거렸지만 송류진은 가만히 앉아 나를 보고만 있었다.
어색해서 뺨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왜?”
“아니, 그냥… 이렇게 같이 있는 게, 꿈같아서.”
“무슨 꿈까지…. 우리 자주 만났잖아.”
“전투를 하면서 자주 보긴 했었지. 다 게이트가 터졌을 때였고.”
아아, 그랬지. 송류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처음 각성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심정… 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네가 울면서 찾아왔던 건 기억난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푹 기대며 피식 웃었다.
“너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
내 질문이 갑작스러웠는지, 송류진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매번 나 보면 울기부터 하잖아.”
“그건 네가 다치니까-.”
“찡얼찡얼하고.”
나는 가볍게 말하며 연신 피식피식 웃었다. 무언가 몸이 나른했다. 기분도 나른하고. 내 말에 송류진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또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내가 그래?”
“응.”
“그래서… 귀찮아?”
“누가 귀찮대?”
“그럼… 싫어?”
“아니.”
송류진은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숨기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쳐다봤다. 아, 귀엽네. 역시 얼굴이 다 하는구나.
차해준의 과거 기억 조각을 엿봐서 그런 건지 몰라도, 송류진이 한층 더 가깝게 느껴졌다. 불우한 학창 시절에 유일하게 다가온 밝은 빛 같았던 녀석이었으니까. 다들 외면해도 그만은 차해준의 옆에 있던 친구였다.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다가, 불쑥 손을 뻗었다. 송류진이 움찔했다. 나는 녀석의 붉어진 뺨을 닿을 듯 말 듯한 손길로 쓸어내렸다. 아, 나도 모르게…. 그동안 녀석에게 가지고 있던 마음의 빗장이 좀 풀린 거 같았다. 이런 짓도 하고 말이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자 송류진이 내 손목을 꽉 붙잡고,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촉촉하게 젖었고, 불그스름한 입술은 꾹 깨물어 문다. 그 얼굴을 보자니 묘한 기분이 들어 멈칫하며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송류진이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애달프게 구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기도 하고…. 송류진을 마주하는 매 순간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각인 때문일 텐데…. 그렇기에 최대한 받아 주려 한 건데. 이렇게 보이는 진심 어린 눈을 보면 헷갈린다.
나는 옅게 웃었다.
“귀여워.”
“…….”
“귀엽다는 말 싫어?”
입술을 꾹 다물길래 되물었다. 송류진은 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가 나를 힐끔 쳐다보고 다시 또 시선을 맞춰 왔다. 그러니까 이런 행동이 귀엽다고, 너! 송류진은 약간 벌게진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가 날 생각해 준 것만으로도 좋아.”
“어?”
“네가 날….”
그런데 좋다고 말하면서, 왜 또 울려고 그러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상하게 졸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너무 평안하게 늘어져 있어서 그런가….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송류진은 희미하게 웃더니, 내 눈 위에 손을 덮었다.
“거봐. 너 쉬어야 한다니까.”
“…그런가 봐.”
이동한 걸로 피곤해서 그런가. 쌓인 피로가 그대로여서 그런가. 몸에서 힘이 풀리고, 나른함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하품을 하자, 송류진이 내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기대는 게 있으니 편안했다.
몽롱하게 잠기는 기분. 송류진이 속삭였다.
“졸리면 자.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송류진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작게 들렸다.
내가 지켜 줄게.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
푹 자고 난 뒤 눈을 떴을 땐, 어느 방의 침대 위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진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속옷은… 안 건드렸겠지만 그래도… 뭐, 친구기도 하고… 비록 입술을 부볐지만… 귀엽다는 말이나 하고 그랬지만….
이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더 감을 잡지 못하겠다. 이대로 받아 주다가 나중에 가선 어떻게 될까 걱정도 되긴 하지만…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않나.
한참 생각하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백루찬은 왜 소식이 없지? 홍희도 그렇고…. 분명 한솔이가 찾고 있을 텐데. 몰젠 정도면 따로 연락을 줄 수 있잖아. 새벽이도 잘 챙기고 있는지 궁금한데 말이다.
송류진과 함께 있는 걸 알고 있긴 하는지 모르겠다. 그때 내가 쓰러졌을 때가 지우영의 행위를 폭로하고 있었을 때니까…. 모르진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닥을 딛고 방을 나서려는데,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순간 나도 모르게 휘청거렸다가 벽을 짚었다.
“…어라.”
몸 상태가 영 이상했다. 어제보다 더. 왜… 왜 이런 거지? 분명 상태 이상은 해제되었는데? 따로 디버프 알림이 뜬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전투를 너무 많이 했던 후유증인가…? 솔직히 올 때도 되긴 했다 싶긴 하지만… 나는 일단 방을 나섰다. 몸에서 계속 힘이 빠져서 걷기도 힘들었다. 하필 내가 있던 방이 2층이어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헐떡거리고 있었다.
와 진짜… 몸 상태 뭐지. 그동안 무리했던 결과가 한 번에 오는 건가? 아플 전조?
“일어났어?”
“어, 어. 잘 잤어?”
“응, 너는?”
“나도.”
그때 송류진이 다가왔다. 나는 썩 좋지 않은 몸 상태를 숨기기 위해 애쓰며 송류진과 인사했다. 송류진은 늦었지만 아침을 먹자고 하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이상하게… 부축해 주는 기분이 들었지만 별말 하지 않고 송류진을 따라 주방으로 갔다.
예쁘게 플레이팅된 한식 밥상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송류진의 반대편에 앉았다.
“어서 먹어. 내가 한 건 아니고… 여기 관리해 주시는 아주머님이 해 주셨어.”
“어, 응. 맛있어 보이네.”
그렇게 말하며 숟가락을 들었다가, 미묘하게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라… 진짜 몸이 왜 이러지?
나는 그것을 보고 멈칫했다가, 송류진의 시선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근데 류진아…. 호출기는 언제 받을 수 있을까?”
왠지 사 달라고 재촉하는 거 같아서 말 안 꺼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참을 수 없었다.
모르젠트 애들하고는 계속 연락도 안 되고, 조하영도 어떻게 잘 추스르고 있는지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새벽이가 걱정이 된다.
뉴스로 돌아가는 사정은 대강 봤지만, 자세한 내막까진 그들도 알지 못하니까.
내 말에 송류진이 잠깐 멈칫했다가 아무렇지 않게 반찬을 집어 내 밥그릇에 올려놓았다.
“서운해?”
“어?”
“연락이 안 와서… 서운한 거야?”
그 말에 나는 눈만 껌벅였다. 서운…?
이렇게 연락을 안 할 애들이 아니라서, 그런 감정까지는 굳이 느끼지 못했는데.
“사실, 너 쓰러질 때 나에게 맡기고 그 뒤로 연락이 따로 오진 않았어.”
“아….”
“병원도 병실도 알 텐데 안 찾아오더라고. 다들 바빠서 그런 거겠지만.”
송류진은 이런 말 꺼내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을 이었다.
“상황 처리하기 바쁘겠지. 한일고 게이트도 워낙 큰일이었고…. 그리고 그 S급 결계사. 그 친구도 모르젠트 쪽으로 갔다고 하더라고. 아마 그 친구 신변 관련해서도 정리할 게 많으니까… 음….”
“그, 그렇겠지?”
“그래도 연락 한번 없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해…. 평소에도 이런 취급이었다면 내가 모르젠트 병동에서 널 확실히 빼냈을 거야. 네가 그동안 어떻게 일해 왔는데…. 해준아, 혹시 거기서 말하기 어려운 압박이나 협박 같은 거 당한 건 없는 거지?”
송류진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압박이라니, 그런 거 전혀 없었다. 나는 그들을 겪었고, 한솔이나 홍희, 그리고 백루찬까지 나를 얼마나 챙겨 주려 애썼는지 잘 알았다.
그런데….
왜, 이상하게, 서운하게 느껴지지. 진짜로, 나에게 그들이 잘못한 것처럼…. 꼭 그렇게 느껴졌다. 서운함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설마… 바빠서 그런 거겠지. 네가 말한 그런 일은 없었어.”
“그래?”
송류진은 옅게 웃고는 또다시 내 밥그릇에 반찬을 올려놨다. 나는 잠시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눈을 깜박였다.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지 멍했고, 내가 기억하고 있던 친구들의 모습이 송류진의 말대로 변질되어 가는 것 같았다.
“연락이… 안 왔구나.”
문득 서운함과 함께,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가 배척받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배척?
그 애들이?
나는 고개를 들어 송류진을 바라봤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널 그렇게 대해도,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나는… 너뿐이야, 해준아.”
“…고마워, 류진아.”
다행이다. 나를 생각해 주는 건 류진이뿐이구나.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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