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번째 S급 각성자가 대한민국에서 나왔습니다. ‘식인 섬의 제단’으로 명칭된 게이트가 터지고 나서 각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요. 모르젠트에서 공식적으로 S급 각성자 ‘천새벽’ 군을 발표했으며, 이번에도 모르젠트 길드장 백루찬 씨가 정한솔군과 같이 미성년 각성자 후견인으로서 천새벽 군을-.]
개인 병실에 있는 TV 채널을 돌리자 나오는 뉴스에 리모컨을 내려놨다. 화면엔 백루찬이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는 영상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면서 천새벽의 증명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띄워지고 있었다.
저렇게 대놓고 사진을 올려도 되는 건가…. 각성자 신상 명세서야 대한민국에서 공공재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그래도 어떻게 백루찬이 후견인이 되어서 다행이었다. 각성자 관리 본부 쪽은 이상하게 거부감이 든단 말이지. 이게 다 우반희가 만든 이미지다. 만날 때마다 강압적이고 협박에 말하는 것도 싸가지 없고….
다시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돌렸지만 모두 급보라는 뉴스와 함께 식인 섬의 제단 게이트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 결국 헌터 일간지라는 채널을 틀게 되었다.
[모르젠트 소속 A급 차해준 헌터! A급이면서도 A급답지 않은 실력으로 세간에서 참 여러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이번 ‘식인 섬의 제단’ 게이트 등급이 무려 1+급이었답니다. 나오는 보스 몹도 A급 이상으로 측정되었고요. 그, 런, 데. 차해준 헌터가 이 몬스터를 정말 순식간에! 정리해 버렸다고 하는데요! 무엇보다 눈길을 끌고 주목을 받고 있는 건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휴대폰으로 당시 현장 상황을 촬영한 것을 공개합니다!]
MC가 요란하게 설명한 후에 화면에선 게이트가 열렸던 당시 찍은 조악한 영상이 떠올랐다. 창문 사이로 찍은 그것은 내가 빠르게 복도를 가로지르며 몬스터를 베어 내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아니 저건 대체 누가 찍은 거야?
작은 사건도 아니고 희생자도 나왔는데 단순 재밋거리로 요란하게 설명하는 MC를 보다가 그냥 TV를 꺼 버렸다.
다들 게이트에 지나치게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은 건지….
그런 생각을 하다 한숨을 쉬며 소파에 푹 머리를 기댔다.
송류진은 각본에서 온 연락을 받고 나갔다. 나는 문밖을 힐끔 쳐다봤다. 아직도 각성자 경호원들이 앞을 지키고 있었다.
기자들이 일부러 찾아와서 붙였다고는 하지만… 느낌이 내가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붙인 느낌이 든다. 물론 벗어나는 거야 너무 쉬운 일이었다. 여기서 나를 이길 수 있는 각성자는 없으니까.
하지만 좀 귀찮아지는 건 사실이었다. 밖에는 나를 노리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기자들이 잔뜩 깔려 있고, 경호원들도 제압해야 하니까.
무엇보다, 송류진이 거짓말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아서 더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왜?
천장의 작은 무늬들이 너무 선명하게 보인다. 계속 고민하다가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확인해야 할 게 있었는데 송류진의 의중과 게이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찾아보느라 잊고 있었다.
한일고 게이트가 끝난 뒤 시스템창에는 분명 시나리오 초월이라고 하면서 천새벽의 목숨을 구했다고 떴었다. 내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천새벽은 죽었을 거다. 한일고 게이트에서 아이들을 지키다가.
이제 어떤 식으로 메인 캐릭터의 목숨을 구하라는지 확실히 알겠다.
내가 기절할 때 종전의 기록이 열렸지만 다음 시나리오를 보여 준 건 아니었다. 어두운 심상에 뜬 하얀 책들을 보여 주었고, 차해준의 과거 기억을 엿보았다.
그런데 대체 왜 보상이, 과거의 기억 조각인 거지?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시스템을 불렀다.
[긴급 퀘스트!
-거대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게이트 ‘식인 섬의 제단’이 오류로 인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습니다!
-클리어런스의 활약으로 거대 오류로 인해 열린 게이트 ‘식인 섬의 제단’을 바로잡았습니다!
난이도: 1++
보상: 한일고 학생들의 생존, 차해준의 과거 기억 조각]
[게이트 ‘식인 섬의 제단’ 레퍼런스가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ღ˘‿˘ற꒱ 우리 클리어런스의 오류 제거 실력을 믿고 있었다구!!]
눈앞에 시끄럽게 떠오르는 글자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귀여운 척은… 믿긴 뭘 믿어. 중요한 건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고. 내가 너를 믿을 수 있게 해 줄래?
툴툴대며 나는 종전의 기록을 열었다.
[‘종전의 기록’ 현재 페이지 수: 123/451
※!주의!※: 종전의 기록에 걸린 저주가 스킬 시전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현재 초전 박살 게이트의 스토리 진행률: 35%]
[시간 내로 일정 이상 스토리를 진행하지 못할 시, 당신의 수명이 단축됩니다.]
[각성자 차해준의 현재 남은 수명: 274일]
[경고! 종전의 기록이 페이지 오류로 인해 뒤섞였습니다!]
[경고! 시나리오가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시나리오 초월! 천새벽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습니다!
메인 캐릭터 천새벽의 목숨을 구원함으로 인해 세계의 오류가 25.4442% 바로잡혔습니다.]
눈앞을 가릴 정도로 가득 뜬 텍스트에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것들을 살폈다. 천새벽의 목숨을 구한 값인지 종전의 기록 페이지가 잔뜩 넘어간 상태였다. 스토리 진행률도 올랐고, 수명은… 아, 좀 수명 좀 늘려 주지 그러냐!
[(´▽` ʃƪ)♡]
하트 같은 거 보내지 말고 수명을 돌려 달라고!!
악을 써 대도 시스템 놈은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하, 그래도 천새벽의 목숨을 구하고, 메인 캐릭터와 각인하고 지지부진해서 걱정했던 퀘스트가 좀 진행된 것에 기뻐해야…는 무슨 내 수명! 내 수명 먼저 달라고!
땡깡 부리듯 팔을 허우적거리다 제풀에 지쳐 소파에 풀썩 기댔다.
그래도 다행이다. 어찌 되었든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길에 한 발짝 디딘 거니까.
메인 캐릭터를 구하면 세계의 오류가 바로잡히는 거구나. 클리어런스라고 명칭하는 게 확실히 이해가 갔다.
한 가지 의문인 건, 왜 퀘스트 보상으로 차해준의 과거 기억 조각을 줬느냐는 거다. 과거 기억을 왜 알려 주는 거지?
아, 물론 차해준이 회귀까지 했다는 건 알고 있으면 좋은 정보긴 한데… 지금의 내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차라리 수명이라든가, 수명 같은 걸 주면 좀 좋냐고.
잔뜩 늘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한일고 게이트 사건을 해결하고 시나리오에 나왔던 천새벽을 구했고… 지우영도 어찌어찌 보내 버렸고… 했는데, 그 교법사라는 놈들의 등장이 너무 마음에 걸린다.
한일고 사건이 터졌으니 이제 곧 터질 때가 되었을 텐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들어오고 마지막엔 송류진이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야, 지금?
“해준아, 아직 좀 더 쉬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대. 그래도 절대 안정해야 해. 푹 쉬고.”
송류진은 옅게 미소 지으며 안심하라는 듯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은 이상하게 위협적인 느낌을 풍겼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 그런데 저 사람들은 왜 데리고 들어온 거야?”
“아 이제, 집으로 가려고.”
“집에 가는데 경호원이 왜 필요해? 혼자서도 잘 갈 수 있어.”
“우리 집에 가려면 가는 동안 기자들이 사진 찍지 못하게 막아야지. 그래서 나갈 때부터 차단하려고 들어오게 했어.”
“우리 집?”
“응.”
내 말에 송류진은 눈꼬리를 잔뜩 휘며 웃었다. 그가 말하는 우리 집이 어감상 내 집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다가오는 녀석을 피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어색하게 웃었다.
“난, 집에 갈게. 내 집.”
내 말에 송류진의 웃는 얼굴이 잠깐 깨졌다. 그러나 바로 안색을 정리하며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와 팔을 붙잡아 당겼다.
“내가 쉴 곳 따로 준비해 놨어. 거기로 가자.”
“왜?”
“기자들이 네 집에 찾아오면 곤란하잖아. 앞으로도 그렇고…. 그리고 나는 네가 좀 더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어. 퇴원한다고 다 나은 건 아니야. 무리하면 안 되고, 푹 쉬어야 해. 내가 너 푹 쉴 수 있도록 지켜 주고 싶어서 그래, 해준아. 나랑 가.”
나는 어색하게 눈을 깜박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걸, 뭐라고 답해야 해. 송류진은 눈썹을 늘어트리며 순한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걱정돼서 그래.”
“네 마음 알지. 그런데 한일고도 다시 가 봐야 되고, 실습 문제도 해결해야 되고… 모르젠트 쪽도 어떻게 굴러가는지 봐야 할 것 같은데.”
“실습은 내가 전공 교수님에게 미리 말씀드려 놨어. 한일고는 당분간 폐쇄고. 가 봤자 아무도 없을 거야. 모르젠트는 너에게 신경도 안 쓰고 있는데 굳이…?”
“여, 연락은 할 수 있잖아?”
내 말에 송류진은 허리를 끌어안던 손을 풀고 나를 바라봤다. 어느새 약간 우울한 분위기까지 풍기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중요하지 않아?”
“뭐?”
“다른 사람은 중요하고, 나는… 너를 걱정하는 나는 중요하지 않아?”
“아니, 류진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
“잠시라도, 며칠만이라도 푹 쉬자, 해준아. 너를 걱정하는 나를 봐서라도. 응?”
송류진은 애걸복걸하며 내 손에 깍지를 끼고 꽉 붙잡았다. 나는 그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연락을 해 주겠다고 말을 하든가. 꼭 나를 따로 격리하려는 것처럼 굴어, 왜.
그렇지만 메인 캐릭터이자 유일한 친구였던 송류진에게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들러붙는 우리를 보고도 꼼짝도 안 하고 있는 경호원들의 시선도 신경 쓰이고….
“그래, 가자.”
“잘 생각했어.”
송류진은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부축하듯 나를 이끌었다.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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