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헉… 헉….”
차해준은 달리고 있었다. 골목길 사이, 비탈진 오르막길을 뛰듯이 걸으며 힘겹게 숨을 골랐다. 뒤를 돌아보면 주황빛 가로등이 켜진 어두운 동네가 보였다. 한라동 달동네. 어렸을 때 살던 곳이었다.
땀이 맺힌 이마를 쓸어서 닦아 내고, 벗겨질 만큼 늘어난 삼 선 슬리퍼를 신고 열심히 뛰어올랐다. 뒤에서 쫓아올까 봐 무서웠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뺨 한쪽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맞다. 아버지에게 얻어터진 뺨이었다. 멍울이 질 것 같은데 내일은 학교에 가서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요즘 선생님들이 자신을 주의 깊게 보고 계셔서, 변명거리를 생각해야 했다. 쓸데없는 가정사를 늘어놓고 싶지 않다. 차해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동네를 올랐다.
동네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거기엔 가로등과 함께 벤치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하니까 여기까진 못 올라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벤치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얼굴을 쓱쓱 닦아 냈다. 땀과 다른 물기가 손바닥에 어린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괜찮다고. 한쪽 뺨이 퉁퉁 부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날들이 많았다. 어느 날은 아버지를 피해 있다가 학교에 늦기도 했다. 그래도 꼬박꼬박 가서 출석하고 공부도 했는데, 술 취한 아버지가 술병으로 위협해서 교복을 가지러 못 들어갔다. 그때는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집 밖을 맴돌아야 했다.
또 어느 날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류진이 덕분에 아이들 대부분은 나를 있는 듯 없는 듯 무시했지만, 가끔 한 번씩 시비를 걸어 올 때가 있었다.
‘너 이거 어디서 난 거냐? 이거 내가 버린 건데?’
아버지가 주워 온 후드 집업을 껴입고 갔을 때였다. 그때 반에서 꽤 잘사는 아이가 차해준이 입은 옷을 보고 거지냐며 억지로 후드 집업을 벗겼다.
‘아 존나 더러워! 네가 뭔데 내 옷을 처입어?’
‘거렁뱅이 새끼가….’
그 애의 옷이 아닐 터였다. 분명히. 하지만 차해준은 차마 아니라고 대답을 못 했다. 같은 반 아이들은 차해준을 힐끔대며 쳐다봤지만 도와주지 않았다. 비웃는 시선. 흘기는 무심한 눈초리.
한겨울에 그런 쪽팔린 일을 겪고서, 변명도 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아버지의 폭력이 더욱 심해지고, 이젠 정말 죽겠다 싶었을 때, 차해준은 각성했다. 힘의 폭주로 인해 한라동 달동네 중턱에 있던 집이 완전히 날아갔다. 주변 건물도 모두 터져 나갔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 죽은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차해준은 멍하니 서서 생각했다.
아니라고… 일부러 한 게 아니었다고. 아버지가 밉긴 했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고.
변명해 봤자 소용없었다. 차해준은 도망쳤다.
“하아….”
그때도 겨울이었고, 지금도 겨울이었다. 차해준은 빌딩 높은 곳에서, 울부짖는 용을 노려봤다.
나탈리스. 빙속성 용종. 그의 뒤에는 악마의 눈동자처럼 검은 게이트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고 낡은 검을 들었다. 각성하고 나서 웃기게도 전보다 살 만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즐겁게 살아갈 수는 없었다.
차해준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불우한 삶도, 아버지를 그렇게 잃은 것도.
브레스에 맞아 한쪽 팔 피부가 문드러졌다. 손바닥의 피부가 갈라져 검신에 피가 흐른다. 드래곤이 내뿜는 위압감에 숨이 턱턱 막히고 폐부가 쥐어짜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하지만 차해준은 묵묵히 검을 들었다.
대단한 사명감. 그런 건 아니었다. 그래도… 구하고 싶었다. 모두를.
차해준은 옥상을 가로질러 거대한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피막 같은 날개를 찢고 비늘로 뒤덮인 몸통을 갈랐다. 스킬로 나타난 검은 어둠이 폭사되었고, 순식간에 길게 뭉친 그 것은 기다란 선이 되어 드래곤을 갈랐다.
온 힘을 다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나탈리스를 죽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겨울의 추운 날에.
…그러나 분명 죽었다고 생각을 때, 차해준은 다시 눈을 떴다.
깨어났을 땐 나탈리스가 나타나기 1년 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대로 넋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나탈리스가 나타날 테니까. 그 몬스터를 죽여서, 게이트를 닫아야 한다.
차해준은 계속해서 시도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째가 되어서야, 성공했다.
나는 눈을 떴다. 희끄무레한 빛무리가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인상을 쓰며 눈을 깜박이자 천장이 보였다.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이건 다 불쌍한 차해준의 기억 때문이다.
[‘식인섬의 제단’ 게이트 클리어! 보상을 수령했습니다.
보상: 차해준의 과거 기억 조각]
[퀘스트를 확인해 주세요!(NEW)]
[시나리오 초월! 종전의 기록을 확인해 주세요!(NEW)]
눈앞에서 시스템창이 깜박이며 알림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그것들을 치워 냈다.
보상이 너무 짠 거 아니냐. 과거 기억 조각이라니….
아니 그리고, 초전 박살 게이트가 회귀물이었어?
앞부분만 조금 읽은 탓에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초반에 이 세계로 떨어졌을 때 기억은 네 번째 나탈리스를 죽이고 나서부터 내게 알려 줬다.
근데 왜 이렇게 감정 이입이 깊게 되냐…. 마치 내가 직접 겪었던 일처럼….
손을 들어 대충 얼굴을 닦아 내자 내가 누워 있는 곳이 병실이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아, 또 기절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숨을 고를 때였다. 갑자기 누워 있는 나를 끌어안는 손길이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몸이 나를 끌어안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해준아, 걱정했어….”
물기 어린 목소리. 결 좋은 갈색 머리. 송류진이었다. 내 어깨춤에 고개를 묻고 한참을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울었는지 벌게진 눈가에 나는 피식 웃었다.
“걱정을 왜 하냐.”
“어떻게 안 해. 눈앞에서 쓰러지는데. 열이 계속 올라서 방금도 의사가 다녀갔어.”
송류진은 걱정스럽게 타박하면서 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닿는 손바닥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열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학교 상황이 떠올랐다. 헉, 학교는 어떻게 됐지? 지우영은 현길영은?
“하, 학교는?”
“아직 일어나지 마.”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송류진이 나를 붙잡고 다시 눕혔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학교, 애들은 어떻게 됐어?”
“네가 구했잖아. 희생자가 좀 많긴 했지만, 그래도 네 덕분에 많은 아이들이 살았어.”
역시, 희생자가 많았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수업 도중에 게이트가 열렸고…. 아이들은 미리 대피할 수 있도록 알람도 받지 못했고, 게이트는 예고도 없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켰으니까.
“현길용, 그 상주 헌터랑… 지우영이란 애는?”
“상황 다 밝혀졌어. 사안이 커서 바로 검찰로 사건이 넘어갔을 거야. 언론도 뒤집어지고 그래서….”
아아, 그럴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뻔뻔했던 두 낯짝이 떠올랐다. 제발 일을 저지른 만큼 벌을 받길 바란다. 지우영 어머니가 돈 좀 있는 사람이었는데 혹시 법망을 피해 가거나 그러진 않겠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송류진이 말을 덧붙였다.
“지우영 어머니가 NJ 그룹 사장이라고 하더라고. 덕분에 그쪽 그룹 주가 폭락했어.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쉽게 넘어가진 못할 거야. 각본도 개입하고 무엇보다 모르젠트가 공증인으로 철저히 사건 조사 요청해 와서, 검찰 측에 혹시나 뒷돈 받았거나 도와주려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걸.”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국회의원들이 무슨 법안도 발의한다던데? 다인 방어 시스템 보안 법안.”
“거기까지 갔다고? 나 며칠 동안 누워 있었던 거야?”
내가 어리둥절해져서 묻자 송류진은 눈썹을 늘어트리며 상처 입었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 왜 또 저렇게 봐! 불쌍하게!
“하루.”
“아, 하루? 에이 뭐 고작 하루 정도야….”
그렇게 말하니까 송류진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나는 조속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말실수 했나.
“해준이 너 그럼 이전엔 얼마나 오랫동안 못 일어났던 거야? 고작이라니, 전에는 며칠이었는데?”
“어….”
나는 힘겹게 송류진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야, 그게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응….
송류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다쳤을 때 생각하면 이해가 가. 하지만… 그럴 때 내가 네 옆에 없었다는 게 나는 너무 속상해.”
“속상할 일도 많다.”
“그렇게 가볍게 말하지 마….”
진짜 울적하게 고개를 숙이는 송류진을 보며 나는 상체를 일으켜 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이고, 마음 약한 놈. 이런 모습을 보니 전에 껄끄러웠던 느낌들이 싹 사라졌다. 그래, 이렇게 마음 약한 놈인데. 송류진은 되레 나를 꽉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자 숨결에 잠깐 움찔했지만, 나는 걱정이 많았을 녀석을 생각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키스도 했는데 포옹이야, 뭐.
그렇게 송류진을 토닥이던 중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맨날 모르젠트 길드 병동에 있었는데, 오늘은 거기가 아니네?”
내 말에 얌전히 품에 안겨 있던 송류진이 몸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응. 우리 병원이야. 알잖아. 나 병원장님 아들인 거.”
“아아… 그렇구나.”
각성자 전용 병원이었구나. 백루찬 이 자식, 매번 제 길드로 데려가더니 이번엔 왜 안 데리고 갔지?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이제 정식 모르젠트 소속인데.
의문이 들었지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송류진은 나를 보며 옅게 웃고는 말했다.
“아직 열이 좀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깨어났으니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 잠시만 기다려.”
송류진이 병실을 나가고, 나는 다시 누우려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뭔가… 일어나면 항상 홍희에 백루찬에, 한솔이까지 찾아와 정신없게 굴었었는데 아무도 없이 조용한 병실이 영 적응이 안 된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어색한 건가 싶기도 하고.
새벽이는 어떻게, 홍희가 잘 도와주고 있으려나….
바닥을 딛자 머리가 어질어질하긴 했다. 상태 이상은 해제된 거 같은데, 뭔가 문제가 더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대 옆 창문 커튼을 열어젖혔다. 환기 좀 시킬까 생각했다가, 창밖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밖에 온통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병원 앞에 바글바글 몰려와 있었다.
…이 뭔…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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