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메인 캐릭터 ‘천새벽’과 각인되었습니다!]
나는 눈앞에 뜨는 창을 응시했다. 통성명을 할 때 설마 각인이 될까 했지만… 천새벽은 메인 캐릭터였다. 벌써 세 명을 찾았다. 백루찬, 송류진, 천새벽.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찾은 건 좋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해결할 건 내 앞에 더 많이 쌓여 있었고.
“하….”
상태 이상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복부를 누가 주먹으로 움켜쥔 듯한 고통이 잇따랐다. 하씨… 빌어먹을 시스템. 초월자의 눈은 왜 자동으로 켜지고 상태 이상은 왜 못 막는 건데….
불합리하고 짜증 났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려는 것에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아, 비틀대는 거 보이면 안 되는데, 멋지게 해치우고 나서 그런 꼴 보이면 쪽팔리잖아.
“각본입니다! 괜찮으십니까?”
학교 인근을 쫘악 둘러싼 각본 요원들이 다가왔다. 게이트가 커서 학교를 벗어난 몬스터들들도 상당했을 텐데 다 처리했으려나 몰라. 하긴 그래서 늦었을 수도 있다.
교문 쪽에 서서 다른 각본 요원에게 무언가 듣고 있던 송류진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착잡한 표정이 눈에 띈다.
그래, 늦은 죄를 알긴 하냐…. 어쨌든 지금은 송류진보다 학교 건물에 남아 있을 아이들을 챙기는 게 더 급선무였다. 희생자도 얼마나 나왔을지… 확인을 해야 한다. 모두를 지킬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빌어먹을 이 세계는 랭킹 1위라고 무적에 만능도 아니었다. 세계 멸망에서 구하려고 불러왔으면 힘이라도 더 주든가.
각본이라도 조금만 더 빨리 왔었더라면…. 하 아니, 일단 현길용 그 개새끼가 문제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과 분노로 기분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하, 진정하자, 진정.
나는 한쪽 벽이 완전히 부서진 건물을 보며 스킬을 써서 4층 교실로 바로 올라갔다.
몸을 띄워서 바닥에 풀썩 착지하자, 반에 있던 아이들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이제… 괜찮은 거죠?”
같이 있던 선생님 한 분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아요. 다 끝났습니다.”
“흐… 흐엉….”
“살았어… 엄마….”
내 말에 구석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아이들이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쌤… 진짜… 흐엉…!”
“해준 쌤….”
김인하를 비롯한 몇 학생들이 내 품에 뛰어들었다. 나는 웃으며 아이들을 받아 줬다.
“에잇, 얘들아. 콧물 집어넣어. 어허, 몰래 옷에 닦지 마.”
“흐어엉! 어차피 더러워진 거!”
내 뒤론 무너진 바닥이라 나는 다가오는 애들을 달래며 교실 안쪽으로 갔다. 정말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는지 벌벌 떨리는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지우영은 멀찍이 떨어져서 멍하니 서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이를 악물고 교실 복도로 제일 먼저 빠져나갔다.
순간 화가 끓어올랐지만, 일단은 꾹 참았다. 우선은 아이들을 다독이는 게 먼저다.
“진정하고, 여기서 나가자. 건물 무너질지도 몰라.”
“무서운 소리 그만하세요… 크흥….”
복도 쪽에 각본 요원들과 함께 구급대원이 보였다. 나는 그들 손에 선생님과 1반 아이들을 보냈다. 그때까지 내 옆에서 가만히 있던 새벽이를 돌아봤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내 서 있던 아이를 보며 나는 옅게 웃으며 손을 붙잡았다.
“고생했어.”
“…선생님도요.”
“네가 한 거야. 네가 살렸어. 진짜 고맙다, 새벽아.”
내 말에, 새벽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벌게진 귓바퀴가 보여서, 나는 또 웃고 말았다. 쑥스러워하는 새벽이의 어깨를 감싸 교실을 나섰다. 나서면서 휘청거리는 것을 보니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기력이 빠진 것 같았다. 상황도 상황인지라 긴장을 안 할 수도 없었을 테고.
“이제 다 끝났어. 푹 쉬자, 이제.”
다가온 구급대원에게서 담요를 받아 새벽이의 어깨에 둘러 주고, 새벽이를 맡겼다. 다른 반도 확인해야지… 옆 반 아이들도.
옆 반으로 가서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뜯어내 버리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과 마주쳤다. 나는 벽을 짚고 씩 웃었다.
“내가 뭐랬어.”
“하 진짜… 진짜 쌤….”
“선생님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다 끝날 줄 알고… 수능도 못 보고 이대로 가는 건가….”
중얼대는 아이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한 명씩 복도로 이끌었다. 마지막엔 정소은이 있었다. 아까까진 그렇게 침착했던 얼굴이 지금은 다 풀어져 있었다. 나는 정소은이 부서져라 꽉 쥐고 있는 호출기를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끄, 끝난 거… 맞죠…?”
울먹이는 얼굴을 보며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끝났어. 괜찮아.”
정소은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눈물을 뽑아내는 얼굴이 안쓰러웠다. 나는 아이의 어깨를 다독였다.
4층에 있는 반에 혹시 또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밑으로 내려왔다.
수습하고 있는 각본 요원들 사이를 걸으며 아이들이 무사한지 보고, 나는 조하영을 찾았다. 급해서 정작 챙기지도 못했는데… 무사하겠지. 조금 불안한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1층 구석 실습실에서 부스스한 몰골의 조하영을 마주했다. 황급히 다가가 괜찮은지 살피며 물었다.
“너 괜찮아?”
“괜찮아. 터지자마자 이곳으로 애들하고 피신했어. 봐봐라. 이게 게이트 유경험자의 관록이다.”
조하영이 실없는 말로 씨익 웃었다.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걱정이 많았을 거다. 조하영은 나를 쓰윽 살피더니 팔뚝을 툭 쳤다.
“고생했다.”
그 한마디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진짜….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남아 있는 아이들이 있는지 확인하는 각본 요원들과 구급대원들을 뒤로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뒤편, 중앙 건물 사이에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구급대원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치며 주변을 훑어봤다.
“해준아!”
그때 내 어깨를 갑자기 붙잡아 돌리는 손길이 있었다. 송류진이었다. 와씨 갑자기 몸이 돌려지니까 머리가 띵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송류진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이 피는 뭐야!”
일전에 상태 이상으로 흘린 피와 몬스터 피가 묻어 셔츠고 얼굴이고 엉망이었다. 나는 뺨을 손등을 훑어 내리며 달라붙어서 내 몸을 확인하려는 송류진을 밀어냈다. 내 손짓에 송류진이 멈칫하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송류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괜찮아. 멀쩡해.”
사실 지금 어지럽고 장이 꼬이는 것 같아서 미칠 것 같지만… 이거야 뭐 상태 이상이 해제되면 끝날 증상이고. 지금은 그보다 찾아야 할 놈이 있었다.
교정은 희생자들을 수습하는 요원들과 부상자를 살피는 구급대원들로 정신이 없었다. 송류진이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나는 등을 돌렸다.
피에 전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리며, 나는 한 사람을 찾았다. 현길용 어딨어, 이 새끼.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응급차 앞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놈을 발견했다.
나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제 손으로 팔뚝에 붕대를 감던 놈은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제기랄 왜, 왜…!”
“환자분, 갑자기 왜 그러세요?”
놈이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려 하자 의아하게 여긴 구급대원 하나가 그를 붙잡았으나 현길용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쳐 냈다. 사람들을 헤치고 도망치려는 놈을 나는 짐승이 다 잡은 사냥감을 쫓는 것처럼 뒤따랐다.
“비켜! 비키라고!”
“아, 뭐야!”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도망가던 놈이 누군가 내려놓았던 약품 상자에 걸려 넘어졌다. 나는 도망가려는 놈을 잡아챘다. 그리고 바로 주먹을 날렸다.
“아악!”
현길용이 내 주먹을 맞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옆에 있던 구급대원이 놀라서 나를 말리려 했지만, 나는 다시 놈에게 다가가 멱살을 움켜쥐고 주먹을 들었다.
“대체 무슨! 진정, 진정하십시오!”
“왜 이래요!”
지금 내 눈을 보면 아마 맛이 가 있을 거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머리가 분노로 맛이 간 거 같으니까.
“으헉… 아, 그, 그만!”
“뭘 그만해, 이 개자식아.”
짓씹듯 내뱉으며, 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놈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간다. 이 빌어먹을 새끼.
“아파? 이게 아파? 너 때문에 죽은 아이들은… 그 애들은…!”
주변에서 만류하며 들러붙었지만 나는 모두 뿌리치고 놈을 후려쳤다. 분이 풀리지 않는다. 이 개자식은 오늘 몇 사람을, 이제 막 꽃피는 학생들을 죽였다. 이놈 손으로 죽인 거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구하지도 못했는데, 이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이 새끼가 뭣도 모르고 허튼 짓거리를 해 대서!!
“형.”
이미 뺨이 다 터진 놈에게 한 번 더 주먹을 날리려 했을 때, 내 팔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내 손을 꽉 쥔 사람은 가슴팍을 끌어안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등에 몸을 붙이고 진정하라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백루찬이었다.
“각성자가 사람 때리면 죽어요.”
이새끼도 각성자인데,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분노로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허억… 헉….”
“우리 형이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분명 저 새끼가 잘못했을 거야. 맞죠? 알아.”
나를 끌어안은 백루찬이 내 몸을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마주친 눈을 보고 나는 멍하니 서서 숨을 골랐다. 백루찬이 옅게 웃으며 내 뺨을 엄지로 닦아 냈다.
“괜찮아, 형. 형 잘못 아니야.”
“…….”
“사람들을 다 못 구해서 그래? 내가 늦어서 그랬어. 미안해.”
“…하.”
“그러니까 진정해요.”
백루찬이 속살거리며 중얼거리는 말을 듣자니,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쿨럭하며 또 기침이 나왔다. 핏덩이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하 씨발… 그래… 맞아…. 저 새끼를 팬다고 있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막을 수 있었는데. 나는… 시나리오로 이 상황을 미리 봤단 말이야…. 그랬는데….
자괴감이 몰려와서 눈을 질끈 감았다. 백루찬이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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