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송류진은 자신이 잘 아는 한정식집이 있다고 하며 차를 몰았다. 차 안엔 온통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물론 나만 느끼는 어색함일 수도 있는데…. 송류진을 힐끔 쳐다봤지만 송류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은은한 미소를 띠고 나와 눈을 마주쳐 왔다. 귀신같이 내가 자신을 쳐다보는 걸 눈치채는데, 하긴 S급이 시선 하나 못 느끼는 건 더 말이 안 되지…. 나는 더 쭈구리가 된 채 조수석에 착 달라붙어 창밖을 바라봤다.
어쩐지, 차 타고 한참이 되었는데도 송류진은 멈추지 않고 도로를 달렸다. 어디까지 가려고 이러는 거지…. 조금 초조해져서 마른 입술을 핥다가, 다시 송류진을 힐끔 쳐다봤다.
송류진은 환하게 웃었다.
“맛있는 집인데, 원래 항상 예약이 꽉 차 있거든. 좀 멀긴 하지만 어렵게 예약을 해서 그쪽으로 가고 있어. 혹시… 불편한 건 아니지?”
“불편이라니, 전혀 안 불편해.”
“다행이야.”
송류진은 나를 보며 눈웃음을 살살 쳤다. 너도 인마, 미인계 쓰냐…. 백루찬에게 한없이 익숙해진 나는 이제 면역이 되었다고…!
“해준아,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어? 응, 응. 물어봐.”
…나도 모르게 너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탓 아니다. 나는 그냥 친구로서 질문한다니까 받아 주려고 대답한 거다…. 하, 자기 합리화 끝내주네.
나는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 송류진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말했다.
“혹시… 저번 일로 내가 불편해서 피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
피하고 싶었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왜 피해.”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송류진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눈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게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내가 송류진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사실 좀 거리 두기를 하려고 한 건 맞는데… 어쨌든 송류진은 메인 캐릭터고, 내가 살려야 할 캐릭터였다. 어떤 상황이 온다 해도 나는 송류진을 거부하고 피할 수 없었다.
내 말에 송류진은 정말 기쁘다는 듯, 한편으로는 안도한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받아 줄 거란 걸 아는데, 하지만 조금 불안해서….”
받아… 뭘? 나는 의문이 들어 말하려던 것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어쩐지 예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말을 한다. 내가 어벙벙하게 있자 송류진은 또 나를 보며 웃고는 앞을 주시했다. 여기서 뭐라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송류진은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조명으로 고즈넉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한정식집인데 무슨 대궐집처럼 컸다. 송류진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데리고 한정식집으로 들어갔다.
널따란 마루와 연결된 방들이 많았는데, 직원은 우리를 가장 끝 방으로 안내했다. 이미 애피타이저가 차려져 있었다.
뭔가… 대접받는 재벌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정장 재킷을 벗어 두고, 맞은편에 앉은 송류진을 바라봤다.
송류진은 상당히 벅찬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니.
“우리 이렇게 마주 보고 밥 먹는 거 처음이야.”
“…그랬구나.”
아니 차해준, 거의 10년 다 되어 가는 친구랑 밥도 안 먹었냐? 졸라 당황스러웠다.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송류진은 수줍게 웃었다.
“매번 네가 거절해서… 나는 뭐든 주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주지 못했어.”
“아하하… 그, 그랬지.”
빌어먹을. 조금이라도 받아먹지 그랬냐, 차해준아…. 문뜩 떠오르는 과거의 편린을 보면, 송류진이 건네줬던 것들은 하나같이 부담스러워 받기 힘들기도 했다. 갑자기 대뜸 집을 구해 주지 않나, 물려받아서 다 헌 교복을 보고 새 교복을 열 벌씩 사다 주지 않나. 차해준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부담스러워했던가? 아니, 그보단…….
나는 송류진을 가만히 쳐다봤다.
“항상 너에게 채워 주고 싶었는데, 사실 그냥 네 옆자리를 나에게 조금이나마 내어 준 것만으로도 나는 고맙다고 생각해.”
부드럽게 말하며, 식기를 들라고 눈짓하는 얼굴은 정말로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는 표정이어서….
조금 미안했다. 사실, 차해준은 송류진을 미워했다.
처음엔 그런 마음이 아니었지. 송류진과 처음 만났을 때도 그저 말할 상대가 필요해 말을 걸었고, 그와 친구가 되었을 땐 뿌듯해하기도 했다. 다만, 갈수록 비교되는 사정들이 차해준을 괴롭혔을 뿐이다.
차해준은 송류진을 부러워했다. 그의 완전하고, 사랑을 주는 가족이. 엇나가도 다시 끌고 들어와 품에 끌어안는 가족이.
나는 옅게 웃었다. 그래서 점점… 미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유일한 친구인 존재를 내칠 수도 없었고, 차해준은 침묵하길 선택했다. 송류진의 과한 선물과 우정 공세에도 그냥 묵묵히.
그걸 네가 알았을까. 알았다면… 송류진은 차해준을 좋아할 수 있었을까?
계속해서 애정을 갈구하고 울던 송류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알았다면 더 괴로워했을 테지.
각인까지 되었고, 이젠 내가 살려야 할 메인 캐릭터.
나는 이 애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계속 쓸데없는 생각들이 이어진다. 과거의 파편이 뇌를 찌르는 것처럼 파고들어 왔다. 우울은 좋지 않다.
나는 작게 고개를 젓고는,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하는 송류진의 말을 받아 주었다.
“맛있었어?”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면서 송류진이 물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오랜만에 호강했다. 고마워, 류진아.”
“많이 못 먹길래 입맛에 안 맞나 걱정했어.”
송류진은 내 눈치를 살폈다. 아이고, 걱정도 많다, 이놈아. 실없는 걱정에 픽 웃고는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물론 속이… 영 받아 주지 않아 많이 먹진 못했는데. 아무튼.
한정식집은 외곽에 위치해 있어 가볍게 걸을 만한 산책로가 있었다. 조명이 길마다 박혀 있어 분위기가 꽤나 예뻤다. 우리는 돌아가기 전에 잠깐 걷기로 했다.
해가 길어져서, 식사를 하고 나왔음에도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하는 노을이 보였다. 점점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고 분위기는 센치해졌다.
풍경을 감상하면서 걷는데, 송류진이 내 손을 붙잡고 깍지를 꼈다. 직접적으로 닿는 온기에 기분이 한껏 이상해졌지만 이걸 또 빼내기엔…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따갑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해준아.”
산책로를 걷다 보니 주차장을 벗어나 더 깊은 곳으로 들어왔을 때, 송류진이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눈썹을 늘어트린 채, 나를 보며 미묘하게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이상한 분위기의 흐름 같은 것을… 느끼고 말았다.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조명. 사람 하나 없는 산책로. 멋진 풍경. 어라, 이거… 연인이라면 여기서 뭔가 해야 할 거 같은 그런 분위기잖아!
“어, 말해.”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송류진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아니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송류진이 내 손을 더 꽉 붙잡아 당겼다. 덕분에 피하지도 못하고 송류진을 마주 봐야 했다.
“키스하고 싶어.”
“뭐?”
“해도 돼?”
“아, 아니, 야. 류진아. 잠깐.”
송류진이 내 앞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당황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자, 그림자 진 송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그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너무 순간이라, 목격하고서도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방금 뭐였지?
송류진은 금방 표정을 가다듬었다. 커다랗고 속눈썹이 빼곡히 박힌 눈이 축 처지고, 울먹울먹하며 눈물이 아롱지기 시작한다. 나는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넌 왜 또 울려고 해!”
“네가 날 거부하니까.”
“아… 류진아.”
“친구라면서…. 다 해 주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나는 한숨을 삼켰다. 송류진은 내 손목을 꽉 붙잡고 내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어느새 맺힌 눈물이 톡, 톡 떨어졌다. 아, 진짜… 너 인마….
“나를… 거부하지 않겠다고, 피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인마! 버럭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쳐다보는 눈빛이 또 너무 애달프다.
송류진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내려놓고, 이젠 내 뺨을 쓰다듬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송류진이 조용히, 속삭거리듯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마음 모르는 척해도 괜찮아.”
“…….”
“못 알아줘도, 괜찮아. 내가 아니까. 나는….”
송류진은 뒷말을 삼켰다. 우는 얼굴이 점점 코앞으로 가까워져 온다. 아… 진짜.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인마, 그거 다 각인 때문이라고. 불안정한 네 상태와 네 감정, 다 시스템의 농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고, 감정 자체를 부인하는 건 송류진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그래, 백루찬도 물고 빨았는데, 이미 너도 물고 빨았… 하, 현타가 오네.
한 번 더 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우는 얼굴은 더 보고 싶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것도. 그래 류진아, 받아 줄게. 나는 너를 구해야 하니까. 네가 감정에 매몰되지 않도록 구하는 것도 내 몫이라면.
천천히 뺨을 붙잡고 부딪쳐 오는 입술을 받아들였다. 느릿하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벌어진 잇새로 송류진이 파고들었다. 목덜미를 붙잡은 손이 무척이나 뜨겁게 느껴졌다.
한참을 붙이고 있던 입술을 뗀 송류진이 나를 끌어안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좋아… 해준아.”
“…….”
“나는 너를…….”
가지고 싶어. 내 마음대로.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뭉개져서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혼자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우는 것처럼 몸을 떨고 있는 송류진의 등을 토닥였다. 모르겠다. 나는…. 애들을 다 지킬 수 있을 때까지만, 그래, 그때까지만 받아 주자.
나는 몰랐다. 그때 송류진이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웃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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