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그어어억.
몸체에서 뚝뚝 떨어지는 검은 물질. 왕관을 쓴 놈들은 앞서 덤비는 놈들보다 몸체가 컸다. 옥상을 가득 채우는 낯선 냄새가 느껴진다. 유황 냄새 같은 것.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칼날을 시전하고 동시에 얼음 나무 숲을 전개했다. 변이체 12개체보다 먼저 튀어나온 것들이 바닥에서 튀어나온 얼음 칼날에 꿰어졌으나, 놈들은 고통도 느끼지 않는지 철푸덕 넘어지면서도 나를 향해 기었다. 망설임 없이 한야를 휘두르며 놈들의 목을 날렸다.
그때, 마력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듦과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몸을 띄웠다. 발밑을 스치고 지나가는 보라색 결정이 있었다. 그건 내 뒤의 입구 쪽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치자 파지직 소리를 내며 결정을 생성해 냈다.
이건 또 무슨 스킬이냐. 꼭 흑마법 같았다. 나는 그대로 공중을 한 번 더 박찼다. 맨 뒤에 서 있는 왕관을 쓴 변이체의 눈으로 보이는 곳이 보랏빛으로 일렁거린다. 놈들의 발밑에 거대한 원형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마법진 위로 보랏빛을 띤 무언가가 위로 쏘아졌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것은 검보라색을 띤 액체였다. 몸이 관성으로 떨어지면서 발끝에 액체가 닿았다. 순식간에 치직 소리를 내며 밑창이 녹아내렸다. 미친, 이건 또 뭐냐.
[어둠의 포식(Lv.99)]
당황해서 스킬을 전개했다.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내 몸이 잡아먹히고, 나는 옥상 난간 쪽에 아슬아슬하게 선 채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난간을 밟자마자 또 스킬을 전개했다.
일단 얼음 나무 숲에 발이 붙잡힌 놈들부터 처리하기 위해 이형환위로 놈들을 휩쓸었다. 한야를 휘두르며 놈들을 베어 냈다. 얼어붙은 칼날에 닿은 면부터 얼어붙어서 갈라진 놈들은 점성이 강한 액체로 변해 바닥을 채웠다. 또다시 얼음 나무 숲으로 바닥에 깔린 것들을 싹 다 얼려 버렸다.
[제한 시간: 13:53]
맨 뒤에 있는 변이체가 나에게 느리게 손을 뻗는다. 그 손끝에서 보랏빛 연기가 일렁이며 마법진이 떠올랐다. 나는 한야에 흐르는 검은 액체를 털며 놈들에게 몸을 날렸다. 총 12개체. 마법을 쓰는 건 그중 한 놈이고 나머지는 기어 다니던 몹들과는 다르게 빨랐다. 아, 마법을 쓰니까 너무 귀찮네.
코앞에 날아오는 무언가를 어둠의 포식 스킬로 삼켜 버리고는 덤벼드는 변이체 놈들을 피했다. 몸을 틀며 잡으려는 듯 뻗은 팔을 자르고, 그다음엔 목을 베어 냈다. 마치 피처럼 튀는 액체들이 온몸에 철썩철썩 들러붙었다. 짜증 난다. 이거 비싸게 주고 산 옷인데…!
나를 향해 한 번에 덮쳐드는 놈들에 가운데서 한야를 꽂아 넣고 그 힘으로 물구나무서기 하듯 몸을 띄운 다음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곤 그대로, 어둠의 포식을 전개했다. 내 밑에 있던 놈들은 어둠의 포식을 이용해 삼켰던 마법을 맞고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 그어-!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른다. 보스 몹의 마법에 당했으면서도 놈들의 뼈대는 남아 있었다. 마치 타르에 적셔진 스켈레톤 같았다. 나는 다시 마법을 시전하려는 보스를 보며 다시 스킬을 전개했다.
[속삭이는 밤(Lv.99)]
눈앞의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무채색으로 물든 세상에 보스 몹이 손을 뻗는 게 아주 느리게 재생되는 영상처럼 보였다. 나를 붙잡으려 뻗어지는 변이체들의 몸부림을 피하면서 보스 몹에게 검기를 날렸다. 놈의 몸에 틀어박히는 새파란 검기가 보인다.
그리고, 나는 처음 써 보는 스킬을 떠올렸다.
[폭야(Lv.99)]
스킬을 전개하자, 내 몸이 아주 익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손목을 돌려 한야를 등 뒤에 세웠다가, 다시 위로 치켜들며 바닥에 꽂았다.
순간이었다. 사방이 검게 뒤덮이고, 보스 몹까지 잡아먹었다. 마력이 쥐어짜지는 느낌과 함께, 검게 물든 사방이 요란하게 터져 나갔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사방이 온통 폭탄 터진 것처럼 엉망이 되었다. 다행히 바닥은 괜찮은데, 옥상 난간과 벽까지 통째로 터져 나가 버렸다.
이거….
이 무슨 개 사기 스킬이냐….
얼떨떨한 얼굴로 짜부라진 보스 몹의… 형체였던 것을 바라봤다.
눈앞에 시스템이 번쩍이며 존재를 알렸다.
[へ[ ᴼ ▃ ᴼ ]_/¯ 따… 따다다라란다단단!! 클리어런스가 오류를 바로잡았습니다!
게이트 ‘은하 변방’의 보스 몬스터 ‘변이체 12개체’가 터져 죽어 버렸네요!
게이트 폭발을 성공적으로 막아 냈습니다!]
[‘은하 변방’의 레퍼런스가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남아 있던 제한 시간: 12:20]
[ .∵・(゚Д゚)…. 클리어런스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 중]
…너도 당황했냐?
우후죽순으로 뜨는 시스템창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야, 사실 나도 당황했어.
이 뭔… 역시 랭킹 1위답다, 한야…. 하하하… 하하하….
옥상에 열렸던 게이트의 마나 파장이 점점 요동을 멈추며 옅어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닫히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매번 기절만 해 가지고….
나는 게이트가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한야에 묻은 검은 액체를 털어 다시 집어넣었다. 온몸에도 폭야의 영향에 검은 액체가 피처럼 튀어 있었다. 뺨을 문지르자 손등에 검은 게 주륵 묻어 나왔다. 하… 세탁 어떡하지.
그런 고민을 하며 뒤로 도는데, 멍청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강영원과 눈이 마주쳤다.
저 새끼 들어오지 말라니까 강제로 문을 땄네. 일전에 보스 몹 때문에 결정 같은 게 가득 생겼는데, 그것까지 부수고 문을 연 것 같았다. 그래도 A급이라 이거냐.
“뭐….”
“뭐.”
“뭐… 뭐 이런….”
강영원은 상당히 감격한 듯 입을 틀어막았다. 저 새끼 저거 왜 이래. 눈살을 찌푸리며 놈에게 다가갔다. 아차, 옷이 엉망인데. 얼굴에도 다 튀고.
진득하게 튄 액체를 털어 내려고 머리를 쓸어 올리자 강영원은 움찔하며 한 발 더 뒤로 물러났다. 눈썹이 꿈틀했다. 이놈 왜 이래, 진짜?
“너 어디-.”
“형, 기다려 달라니까.”
강영원에게 다쳤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등 뒤로 백루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예의 우산을 든 백루찬이 옥상에 사뿐히 착지했다. 하얀 코트가 바람에 휘날린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잖아요.”
옥상은 새까만 액체로 뒤덮이고 부서지고 난리가 났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술만 달싹였다. 이게 내가 일부러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백루찬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우, 야. 다가오지 마. 더러워져.”
“상관없어요.”
내 말에도 백루찬은 검은 액체가 묻은 내 뺨을 문질렀다. 백루찬의 하얀 손에 거뭇한 게 묻어 나온다. 으, 얼굴이 얼마나 엉망인 거지. 소매로 닦아 내려 했는데 백루찬이 내 팔을 붙잡더니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턱 끝을 붙잡고 살살 볼을 문질렀다.
눈을 내리깔고 정성스럽게 닦아 주는데, 가만히 받고 있자니 어색함이 몰려왔다.
백루찬은 살짝 웃으면서 강영원에게 말했다.
“강영원 헌터, 밑에 내려가서 게이트 닫았으니 뒤처리해 달라고 각본에게 전달해 줄래요?”
상냥한 말이었으나, 강영원은 대답이 없었다. 아차, 저놈 질투 엄청 하는데. 나는 백루찬의 손을 밀어내고 강영원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흠칫 놀랐다. 왜… 왜 저래, 표정이.
“…왜 그래?”
아주 넋이 빠진 얼굴이다. 내 물음에 강영원이 화들짝 놀라더니 다시 또 멍청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바보 같네.
백루찬은 강영원을 보고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팔을 둘러 나를 끌어안았다. 옷에도 검은 것들이 잔뜩 묻었는데, 흰옷 입은 놈이 왜 이래.
“루찬아, 다 묻는다.”
“괜찮아요. 형 무리했으니까. 반대편 건물 위에 헬기 불러 놨어요.”
백루찬은 강영원을 아예 무시하기로 결정한 듯했다. 나를 잡아끄는 놈을 따라 내려가려는데 강영원이 나를 붙잡았다.
“잠, 잠깐만요. 혹시! 호옥시… 하, 한야?”
강영원의 말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하… 이젠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뭘 보고 눈치챈 거지. 스킬?
게이트를 앞에 두고 스킬도 숨기고 뭐고 할 정신이 없었다. 솔직히 누가 그런 걸 숨기고 다녀. 차해준 같은 놈이 아니면 누가 숨기냐고.
시크릿 아이덴티티고 뭐고 숨기는 건 이제 됐다. 포기다.
나는 떫은 표정으로 강영원을 쳐다봤다. 내 눈빛에 움츠러들면서도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반짝거리는 눈빛을 쏴 대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한야?”
일단 모르는 척 한번 해 주고.
“맞… 맞죠? 헐.”
“…….”
“허어어얼.”
강영원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가 안절부절 난리 법석을 부리더니 양손을 가슴팍에 모으고 나를 쳐다봤다. 우와… 개부담스러운 눈빛.
“미친 거 아냐…. 진짜 한야?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그 한야? 미친! 형 저 형 팬이에요! 옛날부터 존경했어요!”
강영원이 내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볼을 붉히면서 감격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흔든다. 놈의 뒤에서 꼬리가 흔들리는 환영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백루찬의 표정이 어쩐지 짜증스럽게 변했다. 강영원은 이제 대뜸 나를 껴안으려 팔을 벌려 왔다. 나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이것들이 더러워진 거 안 보이냐…! 그때였다. 가만히 있던 백루찬이 강영원의 뒷덜미를 붙잡아 떼어 냈다.
“들러붙지 말고, 내려가서 각본에게 전하라니까.”
웃는데 살벌함이 느껴진다. 그제야 정신 차린 강영원이 바짝 굳어서 바로 섰다. 백루찬은 또 상냥한 웃음을 지었다.
“전하세요, 강영원 헌터.”
“…넵!”
강영원이 묵례를 하고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나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가요, 형. 헬기 준비해 놨어.”
…너 인마 어째 대우가 티 나게 다르다? 그렇다고 환한 얼굴에 뭐라 하기엔 좀 그래서, 나는 군말 없이 백루찬을 따라갔다.
***
용현역 디지털 단지에 뜬 게이트 ‘은하 변방’에 대한 기사가 잔뜩 떴다.
<1급 게이트가 왜 디지털 단지에 열렸나? 감지 시스템의 먹통과 명확한 한계>
<모르젠트 A급 헌터 몬스터 싹쓸이!>
<모르젠트 긍휼의 기사 단독으로 게이트 공략 완료!>
기사에는 영상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홍희가 찍은 차해준의 영상이었다. 교묘하게 스킬을 사용하는 장면은 편집되었고, 몬스터를 해치우고 피처럼 묻은 검은 것을 털어 내는 차해준의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옷을 털다가 고개를 드는 차해준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헌터X헌터 사이트는 뒤집어졌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6)============================================================
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