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
갑작스러운 말에 할 말을 잃었다. 혹시 메인 캐릭터일 수도 있으니까 잘 보이자라는 생각을 3초 정도 했던 거 같은데….
“너 뭐 되냐고.”
“…글쎄요.”
애매한 대답에 짜증 났는지 카리나는 등받이에 기댔던 상체를 앞으로 숙이곤 내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이건 쳐다보는 게 아니라 노려보는 거다.
부담스러워서 조금 고개를 뒤로 뺐다.
“너.”
“…네.”
“S급이지?”
“…네?”
이건 또… 뭐지? 흠칫했지만 일부러 표정은 단단히 굳혔다. 갑자기 이런 질문 뭐야? 혹시 내가 한야라는 걸 알아챘다든가, 뭐 그런 건가?
“내 길드원에게서 신경을 꺼 주세요.”
어리둥절하게 있는데 백루찬이 끼어들었다. 그는 어딘지 한심하단 표정으로 카리나를 쳐다봤다.
“국피는 빠져.”
“국피…는 또 뭐예요?”
“국산 피카츄 줄임말.”
“…….”
백루찬은 잠시 말을 잃었다. 카리나는 다시 나를 보며 물었다.
“너 S급 맞냐고. 왜 대답을 안 해?”
“…A급 평범한 각성자입니다.”
“평범은 다 얼어 뒤질 소리.”
카리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물어보는 거 보면 확신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주변에 이상한 놈들이 접근한 적 없었어?”
“이상한 놈들이요?”
“음침한 새끼들 있잖아, 왜. 검은색 로브 뒤집어쓰고 다니는 놈들.”
없었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시나리오에서 봤던 장면이 눈앞을 스쳐 갔다. 교법사. 그놈들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는 묘사가 있었던 것 같다. 내 안색이 굳어지자, 카리나가 입천장을 혀로 튕겼다.
“뭔가 아는 눈치네, 너.”
아는데, 알긴 하는데, 그걸 카리나가 갑자기 왜?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자 카리나는 확신한 듯 보였다.
카리나는 무언가를 알고 있나?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시나리오상에선 제대로 나오지 않고 아주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 장면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게이트 앞으로 각성자도 아닌 사람들을 몰아넣으려 했으니까.
카리나는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나를 살피면서 무언가 생각하는 듯 보였다.
뭘… 알고 있는 거지? 이렇다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머뭇대는데,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쭉 밀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뭐. 지금 당장 파헤칠 필요는 없겠지. 너, 내가 지켜본다.”
그 말을 하고 치켜뜨는 눈을 마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왜 이렇게 지켜본다는 인간들이 많냐…?
우반희가 떠올라서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리는데, 마침 딱 맞췄다는 듯 입구에서 각본 요원들이 들어왔다. 마지막에 들어오는 건 우반희였다. 우반희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설렁설렁 걸었다. 그리고 그 뒤로, 송류진이 들어왔다.
이제 괜찮은 건가? 안색이 어둡고 좀 마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어링을 끼고 다른 요원과 대화하던 송류진이 나를 발견한 듯 멈칫했다.
걱정했던 얼굴을 보자니 한숨이 튀어나왔다. 내가 다가가려고 하자, 송류진이 옆에 있던 요원에게 무어라 말을 하곤 등을 돌렸다.
저게, 지금 나 피하는 거야? 나 보고 등 돌린 거 맞지?
갑자기 욱하고 억하심정이 들었다. 아니, 그동안 연락도 다 씹은 게 누군데 지금 피해?
“형.”
“어, 잠깐만 나갔다 올게.”
백루찬이 불렀지만, 지금은 눈앞에서 피하는 송류진이 먼저였다. 금세 눈앞에서 사라진 놈을 쫓아 홀을 빠져나왔다.
***
해준이 다급하게 송류진의 뒤를 쫓았다. 그 모습을 보던 우반희가 피식 웃으면서 모르젠트 테이블로 다가왔다. 테이블을 톡톡 치며 백루찬의 시선을 끈다.
백루찬은 우반희를 힐끔 보곤 무섭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어쩌나. 버림받은 개 같네.”
살살 놀리듯 꺼내는 말에 즐거움이 가득 묻어 있다. 미미하게 짜증이 일었다. 차해준이 망설임 없이 송류진을 따라간 것부터 해서, 우반희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말을 거는 것까지.
“뭐야, 한, 아니, 어디 갔어?”
홍희가 차해준을 찾았지만 백루찬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우반희가 옆에서 실실대며 카리나에게도 말을 걸고 있었다. 카리나와 대화를 하지만 자신을 힐끔 보며 빈정대는 게 아주 수준급이었다.
백루찬은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생각했다.
꼭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고, 백루찬은 천천히 제 속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뼛성을 생각했다.
송류진을 따라서 나간 차해준.
내 손에서 놀아나야지, 왜 자꾸 다른 곳에 한눈을 팔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다.
백루찬은 짜증을 숨기고 느긋하게 웃었다.
***
“헉….”
숨이 막힌다. 송류진은 다급하게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두통이 일고, 구역감이 올라왔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류진아.’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잠식한다. 환청은 자꾸만 소리를 키워 갔다. 종내엔 자신을 삼켜 버릴 것처럼. 송류진은 그게 무서웠다.
분명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차해준을 보니까 어김없이 튀어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대고 있었다.
‘류진아.’
부르지 마.
‘송류진.’
자꾸 부르지 말라고!
귀를 뜯어 버리고 싶다. 송류진은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삼키며 호텔을 나와 구석진 곳으로 빠졌다. 기자들이 주변에 잔뜩 진을 치고 있었다. 이렇게 힘없고 파리한 안색을 들키면 무슨 소리가 나올지 뻔했다.
‘송류진.’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송류진!”
목소리가 실체가 되어 나타났다. 송류진은 눈을 부릅뜬 채 빠르게 몸을 돌렸다. 뒤따라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목덜미를 붙잡아 벽으로 훅- 밀쳤다.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핏발 선 눈이 상대를 노려봤다.
“큭- 야…!”
아- 하필, 차해준이었다. 송류진은 부릅뜬 눈을 깜박이다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왜…막지도 않고.
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송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왜, 왜….
“너 괜찮아?”
차해준의 물음엔 걱정이 가득했다. 방금까지 제 목덜미를 틀어잡은 놈이 누군데 본인은 생각도 안 하고. 송류진은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뒷걸음질 치는 송류진을 따라 성큼 다가온 차해준이 눈을 가늘게 뜨곤 송류진의 안색을 살폈다. 훑어 내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프다. 계속 아찔한 기분이 연속으로 들면서, 어지러웠다. 무엇보다 저 시선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다.
“아직도 아픈 거야? 넌 인마, 병원장 아들이면서 왜 병원을 안 가. 힐러는 불렀었어?”
“해… 해준아.”
“각본이 따로 뭐 안 챙겨 줘? 하 씨, 우반희 그놈은 잘난 척하더니 애가 이 지경인데 안 챙기고 뭐 하는 거야.”
차해준은 송류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에 뜨끈한 온기가 닿자, 송류진은 화들짝 놀라며 그 손을 쳐 냈다.
“…아.”
해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송류진, 너 왜 그래.”
지나친 과민 반응이었다. 송류진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잠깐 닿았는데도,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네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가 뇌를 주무르는 것 같았다. 자꾸만 이지를 어지러트린다. 가쁘게 몰아쉬던 호흡이 점점 가라앉는다.
‘네 거야.’
“송류진, 그땐 네가 먼저…. 하, 아니다.”
차해준은 말을 꺼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단박에 눈치챘다. 그날을 말하는 거겠지. 울면서 매달리고, 벗어나지 못하게 붙잡고 입을 맞추던 날. 송류진은 멍하게 숨을 몰아쉬다가, 계속 피했던 차해준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차해준이 눈썹을 까닥였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처럼, 표정이 굳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귓가에서 온 신경을 자극하던 환청이 크게 소리쳤다.
‘네 뜻대로 해도 된다고. 네 거야!’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계속 차해준을 피하기만 했던 송류진은 차해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번엔 차해준이 뒷걸음질 쳤다.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것에 주춤대며 물러난 차해준의 등이 벽에 닿아서야, 송류진은 걸음을 멈췄다.
동공이 확장되는 느낌과 함께 혈관의 피가 빠르게 도는 것 같았다.
송류진은 가만히 차해준을 응시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눈꺼풀을 깜박인 해준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미간을 좁혔다.
“류진아,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어. 괜찮아.”
“…그럼 좀 물러서 봐.”
“왜?”
“좀… 좀 부담스럽다, 야.”
귓가에 한발 늦게 도착하는 것처럼, 해준의 목소리가 뒤늦게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송류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차해준은 송류진을 밀어내지 않았다.
송류진은 오히려 더 가까이 붙어 섰다. 해준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긴장감에 해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송류진은 느리게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류진아, 너, 지금 좀… 이상하다. 왜 이렇게….”
“해준아, 그날은 미안해.”
‘네 멋대로.’
해준이 당황했다.
“어? 아니… 어. 괜찮아.”
“그날은 내가, 너무, 너무 그래서….”
송류진은 셔츠를 뜯어 버릴 것처럼, 제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잔뜩 충혈된 눈이 파르르 떨렸다.
“너… 아무래도 이상하다. 지금이라도 병원으로 가자. 같이 가 줄게.”
해준은 긴장한 얼굴로 바짝 붙어 선 송류진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틀었다. 송류진은 팔을 들어 해준을 가로막았다. 무르고 무른 자신의 친구는, 그런 자신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손을 꾹 움켜쥔다.
분명 거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차해준은 친구라는 생각 때문에 너무 쉽게 거리 안을 허락한다.
‘네 거야. 그러니까-.’
머릿속의 울림은 더욱 커졌다. 급하게 차오른 호흡은 어느새 안정되었다. 빠르게 뛰던 심장도, 지나치게 긴장으로 몰아넣었던 이상한 감각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송류진은 환하게 웃었다.
“해준아, 나는 네 옆에 있는 게 좋아.”
“…갑자기 그런 얘기를.”
차해준은 어색하게 웃다가 송류진의 눈치를 봤다.
“나도… 그래. 우리 친구잖아. 내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송류진은 차해준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당혹감이 어린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 송류진은 옅게 웃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럼 밀어내지 마.”
“무… 무슨 소리야.”
어색하게 입술을 끌어 올려 만들어 내서 웃는 얼굴이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
“내가 괜찮길 바란다면….”
“…야, 송류진.”
“피하지 말아 줘.”
잡은 목덜미를 당겨, 송류진은 해준에게 입을 맞췄다. 순간 놀라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해준이 화들짝 놀라서 송류진을 밀어냈다.
“송류진, 너 미쳤냐. 왜, 왜 이래.”
“…내가 싫어?”
“아니, 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싫어서 그런 거야?”
“류진아.”
“내가 싫어?”
고여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차해준은 펑펑 울기 시작하는 송류진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송류진은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차해준에게 손을 뻗었다. 다시 목덜미를 감싸 쥐는 손을 해준은 피하지 않았다. 해준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너… 실수하는 거야. 이러는 거 다-.”
“…다?”
“…….”
해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미 한번 겹쳐서 깨물었던 입술이 보기 좋게 부풀어 있었다. 이 모양대로 살짝 팬 입술을 보여 송류진은 아주 천천히 입술을 붙였다.
해준은 피하지 않았다. 무엇을 결심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받아 내는 모습에 가슴 깊은 곳에서 만족감이 올라왔다. 고양감과도 같은 것이 전신을 잠식하는 거 같았다. 송류진은 입 안 깊숙이 파고들며 해준을 헤집었다.
‘마음대로 해도 돼.’
환청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머리를 죄던 고통이, 이제야 가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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