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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61화 (61/201)

61화

길드 회동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모르젠트 길드로 향했다. 오늘은 5대 길드 비공식 회동이 있는 날이었다.

보통은 길드 수뇌부만 참석하는데, 우반희가 나를 혼자 부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회동을 열었으니 나도 가야 했다.

비공식 회동은 기자들 앞에서 길드장들이 간담회 비슷한 것을 한 뒤 따로 열린다고 했다. 거기까지도 따라가야 하나.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되겠지. 나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왔어요?”

도착해서 백루찬 사무실로 가자, 평소의 편안한 복장이 아닌 정장을 입은 백루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먼저 튀어나왔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회색 슈트를 입은 백루찬은 매번 대충 넘겼던 머리도 만져서 넘긴 상태였다. 하얀 머리카락을 왁스로 정리해 놓았는데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칼이 백루찬을 더 분위기 있게 만들었다.

가슴팍에 모르젠트 상징 마크가 은색 배지로 달려 있었다. 삼각형 안에 날개를 편 비둘기가 있는 형상이었다.

백루찬은 살포시 웃었다. 상큼한 눈웃음까지 더해지자 시상식에 나가는 연예인 같았다. 이놈 진짜 얼굴 하난 진짜 끝내준다.

“마음에 들어요?”

“내 마음에 들어서 뭐 하냐.”

“형한테 잘 보이고 싶은데.”

“그러니까, 나한테 잘 보여서-.”

백루찬이 성큼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길래 나는 최대한 고개를 뒤로 뺐다. 하, 코앞에서 얼굴 공격 하지 말라고. 내가 뭐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내 팔을 붙잡고 당긴다.

“아, 또 왜 이래.”

“기왕 칭찬하는 거 잘생겼다고 해 주든가.”

“잘생겼어. 됐지?”

“진심이 없는데.”

“얼마나 담아야 해, 진심?”

“루차니 사랑하는 만큼?”

어이가 없어 눈을 부라렸다.

“장난 그만해라.”

“왜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빤히 쳐다보는 눈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손을 들었다. 그렇게 원한다면 못 해 줄 것도 없다. 나는 차마 완벽하게 정리된 놈의 머리를 건들지 못하고, 한쪽 뺨을 툭 건드렸다.

“우리 루찬이, 오늘 너무 예쁘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백루찬은 진짜 멋있고, 잘빠진 모습이었다. 백루찬 오늘 기자들 앞에서 사진발 좀 받겠네. 헌헌 반응이 벌써 궁금해진다.

백루찬은 내 말에 잠깐 넋을 놓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씩 웃었다. 그만 웃어라, 이놈아. 조명 때문이 아니라 네 얼굴 때문에 후광이 비치니까.

나는 호출기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6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간담회는 7시에 시작한다고 했으니까, 스킬 써서 날아갈 거 아니면 지금 출발해야 했다.

“이제 가자.”

“형도 갈아입고 와요.”

“응?”

백루찬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상자를 들고 왔다. 검은색으로 치장된 상자에는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달려 있었다.

나 학교에서 바로 와서 정장 차림인데? 굳이 갈아입어야 하나?

“왜, 지금 없어 보여?”

옷에 생활감이 있긴 하다. 그래도 이것도 비싼 돈 주고 산건데.

백루찬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쁘지 않은데 더 좋은 거 입으면 좋으니까.”

“시간도 없다.”

“루찬이 소원.”

이게 이제 시도 때도 없이 루찬이~ 하면서 스킬 쓰네. 미인계 스킬. 내가 넘어갈 거 같으냐.

“…어디서 갈아입으면 되냐.”

“저쪽 칸막이 있는 곳에서요.”

…무참히 진 나는 군말 없이 백루찬이 건넨 것을 받았다. 칸막이가 쳐진 곳으로 가 상자를 펼치니,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정장이 들어 있었다. 더블 재킷 형태로 된 것은 검은색에 가까운 네이비였는데 클래식하고 멋들어지고… 비싸 보였다. 이거 대체 얼마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셔츠부터 하나씩 갈아입었다. 넥타이를 매고 바지까지 입는데, 칸막이 사이로 백루찬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다 입었어요?”

“어. 괜찮네.”

백루찬은 다 입은 내 모습을 보고 슬쩍 웃더니, 이내 나를 불렀다. 커프스단추를 채우다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백루찬이 손을 뻗었다.

“형.”

“응.”

“넥타이가 삐뚤어졌네요.”

백루찬이 셔츠 옷깃을 건드리며 넥타이를 바로잡았다. 고개를 내려 정리하는 손길을 보고 있자니, 백루찬이 한 발 더 다가온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너무 가까운 얼굴에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등 뒤로 딱딱한 벽이 닿았다.

백루찬은 오묘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훑어보더니 넥타이를 정리하고, 재킷의 단추를 하나씩 잠가 줬다. 손짓이 너무 느긋해서 이상한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뭔가… 은근히 긴장되는 이 기분은 뭐지.

단추를 채워 주는 백루찬을 힐끔 쳐다봤다. 내리깐 눈에 속눈썹이 길게 늘어져 있고, 색체가 빛을 못 받은 식물처럼 연했다. 머리카락이 숙인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다가, 백루찬과 눈이 마주쳤다.

“…왜.”

백루찬은 대답 없이 가느다랗게 웃었다. 최대한 신경을 끄고 있었는데, 백루찬과 단둘이 있다 보니까 그날이 생각났다. 오염된 지하 도시 게이트에서 나왔을 때.

정신이 없었지만… 백루찬 품에 안겨서 헐떡대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덕분에 떠오르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뒤로 기절해서 어디까지… 이놈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기억도 나질 않지만, 그래서 더 민망했다.

나는 큼, 목을 가다듬고 백루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백루찬이 내 어깨를 뒤로 밀었다. 등이 벽에 닿고 백루찬은 더 가까이 다가와 몸을 붙였다. 숨결이 다 느껴지는 거리였다. 나는 바짝 굳어 버렸다.

“형 요즘 왜 이렇게 바빠요?”

조곤조곤 물으면서, 시선은 뺨을 훑고 밑으로 떨어졌다. 당황해서 연신 눈을 깜박이다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학교생활 때문에 그렇지. 졸업해야지.”

“졸업 안 해도 내가 먹여 살릴 수 있는데.”

“웃기는 소리-.”

“형.”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백루찬이 나지막이 불렀다.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여서 부르는 것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거 같았다. 고개를 옆으로 빼자 백루찬이 턱 끝을 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진짜 미인계 스킬이라도 있나. 꼼짝도 못 하겠다.

“내 눈 피하는 건가?”

“…안 피해.”

“기억은 하고 있어요?”

“뭘.”

“그날 있잖아.”

그날. 언제를 말하는 건지 너무 잘 알겠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야, 왜 또 그 얘길….

“기억 안 나.”

턱 끝을 붙잡고 있는 백루찬의 손을 떼어 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백루찬이 입술 끝을 약하게 들어 올렸다.

“기억나게 해 주고 싶네.”

“시간 없어. 간담회 안 갈 거야?”

“시험해 볼까요.”

백루찬은 내말을 무참히 씹고 말했다.

“그때랑 똑같이 해 보면 기억나지 않을까?”

백루찬이 몸을 더욱 바짝 붙여 왔다. 비싼 정장들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살짝 튼 백루찬이 천천히 다가왔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미친… 이건 또 어떻게 반응을 해야 돼…?!

코끝이 서로 부딪치고 입술이 거의 맞닿을 때쯤, 나는 숨을 멈추고 백루찬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근데 이놈이, 밀쳐졌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몸을 붙인다.

“와아. 너무해.”

또 작게 속삭인다. 나는 숨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가까이서 마주친 얼굴은 차마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무결해 보여서 어쩔 수 없이 눈만 내리깔았다. 백루찬이 목을 울리며 웃는다. 아, 계속 말리는 것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이놈이….

그때였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구두도 챙겨 왔지롱!”

- 쾅-!

순간 들린 목소리에 백루찬을 세게 밀어 버렸다. 벽을 기역 자로 막고 있던 칸막이가 백루찬과 함께 뜯겨져 나갔다.

“…….”

아 이런, 나도 모르게 힘이 잔뜩 들어갔다. 칸막이가 덜렁대며 뜯어졌다.

“…하, 진짜.”

“엥?”

칸막이 위로 넘어진 백루찬이 웃겨 미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큭큭댔다. 새꺄 넘어지고도 웃음이 나오냐…. 나는 주저앉은 놈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웠다. 홍희가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운 채 나와 백루찬을 번갈아 봤다. 와, 미치겠다. 낯 뜨거워서.

분명 얼굴이 시뻘게졌을 거다.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애꿎은 넥타이만 매만졌다.

“…에엥?”

홍희의 눈이 무언가 눈치챈 듯 가늘어졌다. 아 이 녀석 진짜 쓸데없이 눈치는 더럽게 빠르지. 나는 홍희가 들고 온 구두 상자를 낚아챘다.

“나, 나 주려고 가지고 온 거지?”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서 상자를 열고 구두를 갈아 신었다. 여전히 등에서 따끔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백루찬은 아예 상체를 접고 몸을 떨면서 웃어 댔다. 그만 웃어라, 이놈아. 다 너 때문이잖아…!

***

어찌어찌해서, 기자 간담회가 열리는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앞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많았다. 중간중간 엄청난 크기의 렌즈를 들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기자는 아닌 거 같고….

백루찬이 먼저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신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백루찬, 여기!”

“모르젠트 길드장님!”

아… 아이돌이냐. 열성적으로 소리치며 사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일반인들도 잔뜩 몰려와 있었다. 환호성과 비명 소리가 난무한다. 비밀 회동을 위해서 간담회를 열어 시선을 분산시킨다고 하지만… 이러면 소용 있나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백루찬이 내린 반대편으로 내렸다. 백루찬이 내리면서 사람들 시선이 다 그쪽으로 쏠려서 내가 내릴 땐 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차해준!”

풀어 놨던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경호원들이 즐비한 사이를 지나가려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살펴봤지만 보이는 건 카메라 렌즈와 동영상 찍는 핸드폰이 번쩍이는 빛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어수선했다.

누가 불렀지? 기자가 부른 건가….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내 앞에 있는 모르젠트 소속 경호원을 따라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 로비를 지나서 준비된 홀로 가자 기자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홀의 앞 단상 밑으로 둥근 테이블이 있었고, 각각 길드 표식을 달고 길드원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워후, 생각보다 많이 왔네. 길드장들 모임에 꼽사리 껴서 괜히 눈에 띌까 봐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은 따로 안 해도 될 듯했다.

나는 백루찬을 따라 모르젠트 자리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옆에는 다해 길드 자리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아직 오지 않은 건지 비어 있었다.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연신 플래시가 터진다. 백루찬과 홍희는 익숙해 보였다. 홍희 옆에는 보좌로 따라온 길드원이 있었는데 처음 봐서 꾸벅 인사했더니 허둥지둥 놀라며 맞인사를 해 왔다.

단상에는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공식 석상은 처음이지?”

내가 앞에 놓인 물병을 따서 마시자 홍희가 말을 걸어 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각 길드마다 꽤 강해 보이는 이들을 데리고 와 있었다. 나는 물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기 싸움도 하냐?”

서로서로 안 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힐끔대면서 기세를 피워 올리는 게 느껴졌다. 따가운 시선도 다분히 느껴졌고. 내 말에 홍희가 여유롭게 웃었다.

“당근이지. 원래 이런 자리에서 얕보이면 끝이라고.”

“별게 다 끝나겠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데…. 사방엔 카메라가 있고, 적대적인 시선까지 더해져서 불편함이 가중되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작게 한숨을 쉬고 있는데,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간담회 홀로 들어온 것은 다해 길드장이었다. 예카테리나. 오늘도 레이싱 슈트를 빼입고 온 그녀의 옆엔 후디를 입은 여자가 한 명 있었다. 홍희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이름: 유하늘

칭호: 진실의 판별자

클래스: 하이브리드로]

오… 능력이 뭔지 전혀 모르겠는걸. 두 가지가 결합된 것? 예카테리나의 옆에 붙어 있으니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상태 이상 때문에 초월자의 눈을 켜기가 무서웠다. 아, 상태 이상만 아니면 이 주변 싹 다 스캔해서 메인 캐릭터일 만한 각성자를 찾는 건데.

홍희를 힐끔 보자 홍희는 눈을 부릅뜨고 유하늘을 보고 있었다. 유하늘도 홍희를 보더니 싱긋 웃는다. 둘 사이에서 파지직 스파크가 튀는 환상을 보았다. …백루찬이 스킬 썼나.

카리나는 성큼성큼 걸어와 옆 테이블 의자를 하나 빼더니, 갑자기 그것을 들고 내 옆으로 와 털썩 앉았다. 나는 가만히 있다 봉변당한 사람처럼 흠칫 놀라서 카리나를 쳐다봤다.

한쪽 무릎에 다리를 턱 올린 카리나가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댄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보더니, 이내 무섭게 인상을 썼다.

“야.”

…날 보고 말했으니 나를 부르는 거겠지. 초월자의 눈으로 봤던 카리나의 칭호를 떠올렸다. 불의 여왕이었지… 아마. 찾아봤던 정보로는 칭호만큼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어색하게 웃자, 카리나는 더욱 무섭게 미간을 좁혔다. 기운 때문인지, 꼭 호랑이가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카리나는 대뜸 말했다.

“너 뭐 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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