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천새벽
학교 끝나고 어김없이 길드로 출근했다. 이놈의 홍희나 백루찬도 봐주는 게 없었다. 팀 활동은 실습이 끝난 뒤에 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그럼 너무 늦는다고 거절했다. 대체 뭐가 늦냐!뭐가! 나는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빚쟁이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가장의 삶인가…. 물론 케어할 건 나뿐이지만 내가 돈이 제일 많이 든다. 이럴 거면 다치지나 말아야 하는데 다치긴 또 오지게 다치고. 다 치료비로 들어갔다. 랭킹 1위라고 대접은 안 해 주면서-.
“한 달에 원하는 만큼.”
“…뭐?”
“월급 원하는 만큼. 특근 수당 플러스. 한야가 S급이니 계약금 원하는 만큼.”
나는 즉시 대접 안 해 준다는 말을 철회했다. 이게 진짜 내가 모르젠트 기둥 뽑아 가면 어쩌려고 저런 말을…. 그런 생각으로 홍희를 쳐다보는데 홍희가 나를 비웃었다.
“간이 조막만 한 한야는 우리 길드 기둥 절대 못 빼. 울 길드 재산이 얼마인 줄은 알아? 수입이 얼마인지는? 하나도 모르면서. 제발 하나라도 가져가라.”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세계에서 재벌보다 헌터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미친 시한부만 아니면 받은 돈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 텐데.
하필 내 수명은 일 년도 채 안 남았다. 그 전에 세계가 멸망만 안 하면 또 다행이고.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래… 줄 만큼 줘라.”
“물러 터졌지, 하여간.”
“속일 거 아니잖아.”
홍희가 샐쭉하니 입을 모으고 웃었다.
“왜?”
“아니, 이게 한야의 ‘믿음’인가? 아아-.”
“또 이상한 소리 하고 있네….”
홍희가 이마를 짚으며 쓰러지는 척하는 걸 대충 받아 줬다. 하… 제발 오그라드는 소리만 하지 마라.
공략 1팀으로 속하고 첫 게이트 시찰을 나갔다.
게이트는 경기도에 터진 4급이었는데, 모르젠트가 맡은 구역에 있었다. 첫 팀플레이니 서로 성향도 파악하고 이것저것 맞춰 볼 겸 공략 1팀이 출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넌 대체 왜 따라와?”
카메라를 든 홍희가 렌즈를 들이민 채 내 얼굴을 찍고 있었다.
“홍보 영상 제작하려고. 백루찬은 협조 안 하니까 쭌 씨라도 협조해야 해. 무조건!”
그놈이 협조 안 하는 걸 왜 나한테 와서! 냅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니까 홍희가 버럭 성을 냈다.
“아 얼굴이 중요하다고! 얼굴 가리지 마!”
“싫어, 인마! 왜 나한테 그래!”
“아 좀! 각도 안 나와!”
“싫다고!”
아니 가뜩이나 얼굴 팔려서 난감해 죽겠는데 무슨 홍보 영상이냐고!
“하, 치료비가 얼마였더라. 악몽의 참견 게이트 때 힐을 몇 번 때려 박았더라….”
“……원하는 대로 하세요.”
결국 내가 졌다. 조용히 마스크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략 1팀 이유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 왔다.
“두 분, 친해 보이시네요.”
“친하긴요….”
저는 그냥 노예입니다… 노예. 내가 한숨을 쉬자 이유성이 슬쩍 웃는다. 홍희랑 말다툼이 재밌게 느껴졌나 보다. 부길마가 따라온다는 소리에 경직되었던 초반과 달리 다들 조금씩 긴장을 푼 게 느껴졌다. 멀리 떨어져서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강영원만 뺀다면.
나는 놈을 힐끔 보고 고개를 돌렸다. 눈알 빠지겠다, 짜샤….
강원도에 터진 게이트 공략은 아주 빨랐다. 이미 다른 몰젠 길드원들이 1차로 진입을 해서 다 쓸어 놨기 때문에, 보스만 잡으면 되었다. 보스는 넓적한 귀와 코를 가진 이상한 몬스터였다. 내가 나서려 해도 나설 타이밍도 없었다.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강영원이 쌍검을 빼들고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강영원의 몸이 이동하는 중간에 흐릿해지며 순식간에 보스 몬스터의 목에 올라탔다. 곧바로 다리를 걸고 목을 꺾어 쓰러트렸다. 그 뒤로 뛰어든 다른 팀원이 보스 몹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완벽한 체술과 움직임이었다.
역시 소리 없는 발자국. 클래스가 나이트 워커였나. 어쌔신 느낌이 강한 놈이었다.
이유성이 보스 몹 마무리를 하고 난 뒤 뒤에 있던 탱거 역할을 하는 김한울이 게이트에 있는 남아 있는 몹을 쓸어버렸다.
서로 뭘 할 줄 알고 미리미리 움직이는 게 오래 함께 맞춰 온 티가 났다. 여기에 내가 끼어들 필요가 있나…. 설렁설렁 가만히 서 있자니 강영원이 나를 쳐다봤다. 입꼬리를 올리고 쳐다보는 표정이 넌 X발 왜 가만히 있냐? 하는 표정이길래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니들이 다 해치웠잖아….
그때였다. 보스 룸 천장에 숨어 있었는지, 강영원의 뒤쪽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뚝 떨어졌다. 보스보다 몸집이 작은 몬스터는 긴 단검을 들고 강영원에게 칼을 날렸다.
이유성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영원아!”
강영원이 살기를 느끼고 돌아보는 순간은 아주 짧았지만, 몬스터가 아주 조금 더 빨랐다. 날아오는 검이 강영원의 목에 꽂히기 전에, 나는 몸을 움직였다.
몬스터가 던진 검을 손으로 잡아채고 그대로 다시 몬스터에게 되돌려 줬다. 던진 단검이 몬스터의 이마에 손잡이까지 박혀 들어갔다.
-케엑!
몬스터가 눈을 까뒤집으며 절명했다. 어휴, 놀라라. 큰일 날 뻔했다.
“괜찮아요?”
검날을 잡아 손바닥이 화끈했다. 아무래도 베인 거 같지. 강영원이 눈을 크게 뜨고 말문이 막힌 채 나를 쳐다봤다. 배서윤이 놀라서 다가왔다.
“독이라도 있으면 큰일 나요.”
배서윤이 급히 해독 포션과 치료 포션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손을 붙잡고 콸콸 부었다. 아, 떨어지는 거 아깝다. 그냥 바르면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영원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쓸데없이, 왜 끼어들어서.”
내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자기도 좀 그랬는지 휙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하, 고맙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야….
어휴, 말을 말자. 솔직히 학교에서 긴장 잔뜩 하고 있다 와서 반박하기도 지쳤다.
“쟤가…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배서윤이 서서히 아무는 내 상처를 보면서 힐끔 내 눈치를 봤다. 원래 저런 애는 아니었겠죠. 그죠.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줬다.
멀리 있던 홍희는 여전히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는 것이…. 어째 영 불안하다?
“…맨날 따라다닐래.”
꺄아아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와 덥석 껴안는다. 그래, 교주로서 한야의 첫 전투를 직관한 소감이 어떠냐…. 좋아 죽는 얼굴을 보자니 뭐라 할 기운도 안 났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들러붙는 홍희를 밀어냈다.
“역시… 뭐가 하나 있긴 한가 봅니다. 그걸 그 빠른 순간에 캐치해서 끝내시다니.”
김한울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이거 칭찬이냐? 솔직히 뒤에 기습 생각 안 하고 긴장 풀고 있던 강영원이 실수한 거였다. 너무 나를 의식하느라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야, 뭐….
엄지를 들고 찡긋 웃으며 이를 드러내는 김한울은… 성격이 호탕해 보였다. 연신 굿, 굿을 연발하며 내 어깨를 팡팡 내려쳤다. 이 새끼 이거 일부러 때리려고 이러나.
이번 게이트는 손쉽게 해결하고,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마나 파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한 후 우리는 길드로 복귀했다.
시간은 벌써 밤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씻고,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야, 시스템. 나와.”
절반쯤 감긴 눈으로 시스템을 불렀다.
[(=´∇`=)차해준 님의 소소한 활약! 잘 보았습니다!]
소소한 활약. 어이가 없네. 나는 킥킥 웃었다. 그리고 내 수명과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아직 달라진 거나 문제가 되는 건 없었다. 근데… 역시 불안하다. 시나리오대로 무언가 진행되고 있는 거 같은데 미묘하게 불편하고 미묘하게 껄끄럽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각성자 차해준의 현재 남은 수명: 308일]
대폭 줄어든 시간을 보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시나리오가 늦게 터지는 게 내 탓이냐… 수명 좀 어떻게 해 봐.”
[ (*ᴗ͈ˬᴗ͈)ꕤ*.゚]
“이 자식이….”
졸음기 가득한 얼굴로 중얼중얼 말하자 시스템은 되도 않는 행운 기원 이모티콘만 보내고 사라졌다. 할 말이 없다 이거지? 이제 분노도 안 나온다.
그렇게 누워서 해결할 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
-삐삐 –삐삐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미리 일어나 씻고 준비를 다 한 나는 알람을 끄고, 출근했다.
잠을 그렇게 오래 잔 것도 아닌데 몸이 어제보단 가뿐했다. 이게 바로 각성자의 체력인가.
이른 아침에 나오니 매번 붐비던 지하철도 조금은, 정말 조금은 한적했다.
아 하기 싫다….
피곤은 가셨지만 출근해야 하는 한일고 정문을 바라보자니 짜증이 몰려왔다. 나름 무던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나를 싫어하는 걸 티 내는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건 심적으로 조금 힘들긴 했다. 물론 좋아해 주는 아이들도 많았고, 선생님들도 잘해 주셨지만.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계속 깔딱대며 시비를 거는 현길용. 그리고 사람 좋은 척 웃지만 꿍꿍이가 가득한 교장. 마지막으로 반장 지우영과 속 모를 우리 반 아이들이 있다…. 아 꽤 많잖아. 좀 서글퍼졌다. 내가 이러고 산다…… 하.
나는 터벅터벅 걸어 학교로 들어갔다. 라일락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확실히 오늘은 일찍 나와서인지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교정을 물끄러미 감상하는데, 내가 들어온 교문 반대편 교문 쪽으로 들어오는 천새벽을 발견했다.
아는 척이라도 해 볼까. 교실로 올라가는 천새벽을 따라 3학년 1반 교실로 향했다. 천새벽은 줄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인지 뒤따르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작게 허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좋네. 한 번도 못 들어 봐서 몰랐는데.
뒤따르다가 조금 불한당이 된 기분에 나는 계단참에 멈추고 잠시 기다렸다. 교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드르륵하며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3학년 반은 4층에 위치해 있었다.
시나리오에는 천새벽의 성격이나 그런 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행동 묘사로 추측하기에도 너무 적었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다른 애들을 모두 구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그런 애라는 것.
교실 앞에 도착해서 조심히 문을 열자, 창문을 열어 놓고 앉아 있던 천새벽이 움찔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날리는 커튼 사이로 이어폰을 빼내는 모습이 꼭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살짝 웃었다.
“원래 이렇게 일찍 와?”
“아… 안녕하세요.”
조금은 수줍은 듯 웃는 얼굴은 어른스럽기도 하고 소년처럼 맑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천새벽이 좀 신기하게 느껴졌다. 시나리오에 나오는 애랑 이렇게 처음부터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보통 이 시간대엔 미화원분 빼면 아무도 안 계시는데.”
“오늘 눈이 일찍 떠져서. 새벽이 너는 항상 이 시간에 오나 봐.”
이름을 부르자, 천새벽은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천새벽에게 다가갔다.
“우리 반 친구들 이름을 모르면 안 되지. 명색이 교생으로 왔는데.”
“…아실 줄 몰랐어요.”
“응?”
“보통은, 다들 관심이 없으시던데.”
“왜지. 나는 딱 들어오는 순간 너부터 보였는데.”
시나리오에 나오는 애니까, 당연히 천새벽부터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새벽이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 이러니까 어린애한테 작업 거는 아저씨가 된 기분인데….
“감사합니다.”
천새벽은 혼자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나에게 꾸벅 인사했다. 응? 뭐가 감사해. 귓불이 좀 붉어진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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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