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각성자 차해준의 현재 남은 수명: 310일]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몸무게 확인하듯 본 수명은 팍 줄어 있었다. 제대로 된 뭔가를 한 것도 없이 시간만 훌쩍 지나 버렸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대충 왁스로 정리하고는 전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살폈다.
음… 정장 입은 모습이 많이 낯설다. 매번 검은색 옷이나 입고 다니다 보니 격식 있게 차려입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아, 장례식장.
차해준이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장에 갔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다가, 거울에 창백하게 굳은 내 얼굴을 보고 웃었다. 거울 속 차해준도 웃었다.
한라동 사건이 떠올라 버렸다.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 감정들은 잔인하게도 심장을 옥죄어 드는데 거울 속 차해준은 조금이나마 웃고 있었다.
차해준의 기억이 무겁게 숨통을 조르기 전에, 나는 생각을 그만하기로 했다.
오늘은 교생 실습을 위해 한일 고등학교로 가는 날이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패기 있게 문을 박차고 집을 나왔다.
가는 길은 지하철로 30분 정도 걸렸다. 평소와 달리 머리를 넘기고 정장을 입어서인지 아니면 출근길에 누구 신경 쓸 정신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수군대거나 쳐다보는 시선이 없었다.
정신없이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땐, 교문 앞에서 조하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그래도 첫 교생 실습이라고 정장에 치마를 입은 조하영이 껄렁한 자세로 인사했다.
“…걷는 것 좀 얌전히 걸어.”
“지금 인생 최대의 얌전을 뽐내고 있으니 입 다물어.”
교문을 넘어서자, 운동장 옆 라일락 군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향기로운 꽃 냄새가 진동했다.
커다란 운동장과 함께, 돌계단 위에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고, 빨간 벽돌로 세워진 학교는 연식이 오래되어 보였지만 상당히 감상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학생들을 지나치며 조하영과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일찍 오셨네요?”
친근한 인상을 가진 담임 선생님이 나와 조하영을 번갈아 보더니 씩 웃었다.
“인물이 훤칠하네~. 애들이 아주 좋아서 난리 나겠어.”
“아이, 뭘요~!”
조하영이 손사래 치며 호호호 웃었다. 흠칫 놀라 조하영을 휘둥그레 쳐다봤더니 조하영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퍽 찔렀다. 이 자식이….
“조 쌤은 여기, 김 선생님 따라서 다니면 돼요. 우리 차 쌤은 나랑 다니고. 애들이 고3이라 좀 예민한데, 그래도 착해요 다들. 문제 생기면 바로바로 말해 주고.”
“예, 알겠습니다.”
대답하며 씩 웃으니 담임 선생님이 듬직하다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 담임이 되신 권 선생님은 인상만큼 성격도 푸근하시고 유들유들하셨다. 하긴 그래야 고3 애들 사이에서 버틸 수 있겠지. 난 못 버틸 것 같은데, 으으 벌써 두렵다.
나와 조하영은 권 선생님을 따라 교장 선생님께도 인사를 드리러 갔다.
교장실은 1관 3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계단을 올라가는 우리를 보고 지나가던 학생들이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조하영이 내 옆구리를 다시 쿡 찔렀다.
“뼈 부러지겠다. 그만 찔러라.”
“각성자가 무슨. 다들 너 본다.”
“그래. 너 말고 나 보는 게 낫긴 하지.”
조하영이 말없이 한 번 더 팔꿈치를 내질렀지만, 이번엔 손으로 막아 냈다. 앞서 가던 권 선생님이 조하영과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차 쌤이 각성자라고 했지?”
“아, 예.”
“오 맞아. 모르젠트 길드라고 들었던 거 같다. 아니, 그렇게 큰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데 왜 교생 실습을 나왔어?”
“여러 가지 경험하면 좋으니까요.”
“경험 좋지. 그래도 흠….”
권 선생님은 의문 어린 표정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지만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뭐 각성자도 선생님 할 수 있잖아요….
교장실 앞에 도착한 뒤 권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란 목소리가 들리자, 권 선생님이 문을 열기 전에 나에게 소곤거리며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좀… 이런저런 말 해도 그냥 흘려들어요. 각성자가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네. 알겠습니다.”
권 선생님은 걱정된다는 눈빛을 흘렸지만, 이내 문을 열고 교장실로 들어갔다. 나와 조하영도 그 뒤를 따랐다.
교장은 난을 닦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잎들을 하나하나 닦아 내면서 고갯짓했다.
“앉아요.”
안경 너머로 관찰자처럼 유심히 지켜보던 교장에게 권 선생님이 인사했다.
“이번에 교생 실습 온 한국대 학생들입니다.”
“아아, 교생.”
교장이 앉기까지 기다리던 권 쌤이 소파에 앉자 엉거주춤하며 서 있던 나와 조하영도 앉았다.
“누가, 각성자이신가?”
나와 조하영을 번갈아 보던 교장 선생님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접니다. 차해준입니다.”
일어나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자 교장의 안색이 확 바뀌며 악수를 청해 왔다.
“난 이 학교 교장이자 한일 재단 이사장을 겸하고 있네. 각본하고 길드에 평소에 후원금을 자주 보냈거든. 이리 보니 반갑구만.”
“아하하… 감사합니다.”
나한테 떨어지는 건 없으니 딱히 내가 감사할일은 아닌 거 같았지만, 눈치껏 대답했다. 교장은 내 옆에 있는 조하영은 아는 척도 안 했다. 교장의 안경 너머 눈빛이나 이런 행동들 때문에 썩 좋은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원래 다 이렇게 차별 대우 하나?
“A급 모르젠트 소속 각성자가 교생으로 온다고 해서 놀랐지 뭔가. 우리 학교가 마력 파장 방해 결계를 비싼 돈 주고 사용하는 학교라서 다른 데보다 안전하긴 하지만 그래도 귀한 각성자가 와서 마음이 든든하네.”
“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대랄 것까지야. 내가 각본에 우, 그 이름이 뭐였더라. 암튼 우 팀장.”
“우반희… 팀장님 말씀이신가요?”
“그래, 맞아. 그 친구하고도 종종 연락한다네. 학교 안전에 대해서도 그렇고 게이트 동향에 대해서도 그렇고 겸사겸사.”
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갑자기 각본 얘기는 또 왜…. 나는 그냥 고장 난 기계처럼 웃기만 했다.
“우반희 팀장이랑 아는 사이인가?”
“…어쩌다가 조금. 얼굴만 아는 사이입니다.”
“그 정도면 다 아는 거지. 우리 차 선생님, 미래가 아주 창창해?”
교장은 그렇게 말하며 부담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뭘… 원하시는 건가요, 대체.
슬쩍 고개를 돌려 조하영을 쳐다봤지만, 조하영은 한껏 비즈니스 미소를 지은 채 경청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눈빛에서 조하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히는 것 같았다. 지금 쟤 욕하고 있다. 백 퍼 장담한다.
교장이 또 무어라 말을 걸며 친한 척 스킬을 시전할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교장이 왔구만- 하고 웃으며 들어오라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들어온 사람은 치렁치렁한 단발머리를 뒤로 묶은 남자였다.
“왔는가? 여긴 우리 상주 헌터 현길용 헌터. 소개시켜 주려고 불렀네.”
현길용이라 불린 남자가 나를 보고 미묘하게 인상을 구겼다가 다시 폈다.
나는 바로 시스템창을 켜서 남자를 스캔했다.
[이름: 현길용
칭호: 날다람쥐 사냥꾼
클래스: 총잡이]
“쿨럭-.”
칭호를 보고 나도 모르게 사레가 들려 버렸다. 힐끗 쳐다보는 시선에 괜찮다고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날다람… 뭔가 불콰한 안색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칭호다. 아니, 어울리나?
“여긴 우리 모르젠트 길드 소속 헌터 차해준 선생. A급 각성자라네. 모르젠트 길드 소속이니 당연히 능력도 출중하겠고.”
“A급이 왜, 학교에…?”
현길용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교장은 현길용의 말을 무시하고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차 선생, 아니 차 헌터. 있는 동안 편-안하게 지내고, 물어볼 거 있으면 바로바로 찾아오게나. 가끔 한 번씩 들러서 차도 마시고 가. 우리 현길용 헌터가 계속 챙겨 줄 거야. 고맙다고 생각 안 해도 돼. 알겠지?”
“아, 네. 알겠습니다.”
난처하게 웃으며 인사를 꾸벅했다. 말하는 것에서 미묘하게 불편함이 느껴졌다.
현길용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학교에 이런 귀한 사람이 오다니, 내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A급 각성자는 잘 만나기도 힘든데.”
“아하하하….”
“앞으로도, 나중에도 잘 좀 부탁하겠네.”
그러니까, 뭘? 나는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고 감정 없이 네네 하고 받아치고는 권 선생님을 따라 교장실을 나왔다. 와 벌써부터 피곤하다.
“A급… 모르젠트. 와.”
교장실을 나오자, 현길용이 입을 열었다. 현길용은 단단히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아주 사랑을 듬뿍 받으시네. 역시 A급?”
시비가 잔뜩 묻은 말에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교장이 하는 짓에 불만이 생긴 거 같은데, 나한테 따지지 말고 교장한테 따져라. 물론 입 밖으로 꺼내서 말하진 않았다.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현길용이 욕지거리를 삼키며 코웃음을 쳤다.
“경비원 노릇이 그렇게 하고 싶으셨으면 말을 하지. 모르젠트면 내가 바꿔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길용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권 선생님이 현길용을 타박했지만 현길용은 아예 권 선생님을 무시했다. 귀를 후비적거리며 손가락을 후 분 뒤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곤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얼마나 능력이 있길래… 이런 외진 곳까지 다 오고. 얻어 갈 게 뭐 있다고 이런 데 와서 남의 밥그릇 위협하고 난리세요? 아, 이런 말 곤란한가?”
밥그릇은 무슨 밥그릇…. 시나리오랑 졸업만 아니면 교생 실습 올 일도 없었다, 새끼야….
“아이, 증말. 오늘 처음 온 선생님들한테 무슨 말이야.”
“아니, 그냥 좀 웃겨서. 이런 변두리까지 내려와서 뭐 하나 싶어 가지고. A급이란 사람이…. 뭐, 본인 뜻은 아니겠지. 잘 부탁해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현길용은 인사를 받고선 기분 나쁜 눈빛을 날리며 먼저 돌아섰다. 권 선생님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덤덤했다. 권 선생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학교 상주 헌터 직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저래. 근데 거기다가 자기보다 높은 등급 각성자가 오니까 기분 나쁘다 이거지. 내가 듣기론 라온 길드 소속이었다는데… 여기로 온 게 좌천당했다고 생각하더라고.”
“그렇군요.”
거기다가 A급 헌터가 오니 이 일자리도 뺏길까 봐 저러는 거야.”
라온 길드… 어디서 들어 봤는데. 권 선생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조하영이 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장휘열이 있는 곳.”
조하영이 속닥거렸다. 그제야 나도 떠올랐다. 실기 수업 때 시비 걸던 모자란 놈. 라온 길드는 대체 어떤 곳이길래 저런 인간들만 모여 있는 거지.
조하영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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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