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피곤하다.
“그래서 길드장님이 저를 특별히 부르셨어요.”
“오~ 우리 한, 아니 쭌이 씨 꿀 빨았네~. 영원이 공부 잘하잖아!”
“하하, 프린트물도 다 해 오셔서 번거롭지 않았어요. 그래도 알려 드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하더라고요. 각성하고 정신없어서 공부에 손을 놓고 계셨던 거 같은데, 저는 그냥 옆에서 조금 짚어 준 정도….”
나는 격하게 피곤했다. 소파에 둘러앉아 열심히 과자를 씹으며 수다 떠는 둘을 보고 있자니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강영원 저놈은 헤실헤실 웃으며 연신 순진한 척을 해 대고 있었다.
아까 나한테 도끼눈 뜨고 이것도 모르냐고 윽박지르던 새끼는 언놈이었냐….
꺄륵꺄륵 웃음이 터진다. 홍희는 소파에 발라당 누워 다리를 흔들며 과자를 집어 먹었다. 얼굴에 다 묻히고 와작와작 먹는 게 귀엽긴 한데 다 흘려서 여기 청소하려면 귀찮을 것 같았다. 물론 다 해 주겠지…. 부길마가 청소기를 잡아 본 적이나 있으려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넋을 빼놓고 있는데 무언가 얘기하던 둘이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왜?”
“요즘 제일 잘나가는 A급 각성자이신데, 언제 훈련 한번 같이하는 거 어때요? 재밌을 거 같은데.”
강영원이 살포시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강영원은 내 썩은 표정을 보고도 모르는 척 환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같은 길드 소속인데 뭐 어때요! 혹시 쪽팔리거나 그런 일 생겨도 괜찮아요. 우리끼린 자주 대련하고 해서 신경도 안 써요. 저는 해준 형 어떤 헌터인지 보고 싶은데. 네?”
말투가 자신만만하다. 오, 꼭 마치 나에게 쪽팔린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데. 그보다 내가 언제부터 너의 형이었니….
홍희가 옆에서 듣다가 짓궂게 웃었다. 저저, 불안한 웃음 뭐야. 나는 홍희가 한마디 내뱉기 전에 먼저 낚아채듯 대답했다.
“전 됐습니다.”
딱 잘라 말하자 강영원이 홍희 눈치를 힐끔 보더니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저는 해준 형이랑 더 친해지고 싶은데….”
“울 쭌이 씨가 낯을 좀 가리는 편이긴 해. 딱 보면 보이잖아. 친구 없소라고 쓰여 있는 거.”
“나도 친구 있거든?”
“에에~ 거짓말!”
“넌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집돌이에 정체를 숨긴, 잘생겼지만 생각 없이 행동하고 뭐만 하면 몸부터 나가는 문제 일으키기 A랭크를 달성한.”
“거기까지 해라.”
뭔가 상세해서 기분이 나빴다. 여태껏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냐…. 뭐 물론 문제… 라고 할 것까지 없지만 게이트가 내 앞에서만 터지긴 했다. 이게 바로 주인공 특전이라는 거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아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네.
“두 분이 정말 친해 보이네요.”
강영원이 투닥대는 나와 홍희를 보며 말했다. 굉장히 불쾌한 목소리였는데 홍희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당연하다는 듯 소리쳤다.
“우리 한야, 읍-.”
“한야? 는 킹갓제너럴이지.”
나는 다급히 홍희의 입을 막았다. 얘가 주의하는 듯하더니 또 이러네. 하하. 어색하게 웃자 강영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홍희의 입을 틀어막은 손을 짜증 난다는 듯이 바라본 강영원은 잠시 뒤 표정을 바꾸고 해맑게 웃었다.
“저도 친하게 지내요. 해준 형! 대련도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게요. 진짜 별거 아니니까 너무 겁먹지 말고-.”
겁은 무슨? 너나 겁먹지 마라, 애기야.
“퉤퉷! 숨 막혀!”
“과자를 너무 많이 먹길래, 너 그러다가 돼지 된다.”
“아씨 무슨 돼지야! 각성자는 살 안 쪄!”
“헛소리한다, 또. 누가 그러디.”
“진짜거든?”
강영원이 뭐라 말했지만 홍희와 내가 주절주절 말을 이어 가자, 그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는 눈치 없이 구는 홍희와 함께 열심히 투닥거려 주었다. 강영원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저놈이 왜 이러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길드 요주 인물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니까 질투가 나나. 너에겐 상사지만 나에겐 좀 다른 이유로 얽힌 애새끼들이라고.
이걸 설명할 수도 없고. 한숨을 쉬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피곤하다, 피곤해.
“벌써 가게? 한솔이 레슨 끝나려면 좀 더 있어야 되는데?”
“내일 또 올게. 한솔이한테 잘 말해 줘.”
“한솔이 어제도 엄청 짜증 냈단 말이야! 쭌 씨가 안 와서!”
“한솔이면, 이번에 우리 길드로 온 S급 초딩…이 아니라 꼬마 친구 말하는 거죠? 와, 저도 한 번도 못 봤는데-.”
홍희가 성내는 것을 듣고 중간에 끼어든 강영원이 눈을 빛냈다. 홍희가 투덜거렸다.
“한솔이가 쭌이 씨를 너무 좋아해.”
“아….”
나를 힐끔 보는 강여원의 눈빛은 아주 질투에 불타고 있었다. 홍희는 그게 보이지도 않는지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맨날 오라고, 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바쁘다고 생까고, 하여간 성질 나빠. 바람둥이야. 못됐어. 여기저기 홀리면서 잡은 물고기한테 밥도 안 줘.”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밥을 안 주긴 누가 안 줘. 만나면 맨날 맛있는 거 같이 먹거든? 물론 내가 산 적은 별로 없지만….
“난 간다…. 영원 씨 고마워요.”
“가지 마아~!”
“갈 거야.”
“아, 진짜아….”
노려보는 놈 못 본 척해 주기도 피곤하다, 야. 강영원의 뜨거운 눈빛에 타들어 갈 거 같다고. 나는 냉정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
오늘도 어김없이 수업을 위해 등굣길 등산을 했다. 하- 하루하루가 급박하게 흘러가는 이때 시험공부에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게 불안하지만, 뭐 딱히 방도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서울 인근 고등학교 개수부터 검색하는 것과 폐아파트가 있는 지역을 확인하는 것뿐…. 오늘 시간 나면 고등학교라도 쫙 돌아봐야지.
송류진은 여전히 전화를 안 받았다. 부재중만 벌써 몇십 통을 넘겼다. 너 인마… 그렇게 애절하게 해 놓고 이렇게 코빼기도 안 보이면 내가 불안해…. 우반희에게 따로 연락을 하기엔 내가 너무 찝찝한 게 많아서 못 하겠다…. 송류진 이놈도 찾아가 봐야 하는데.
나는 쯧 혀를 차며 이마를 쓸어내렸다. 진짜 할 일 너무 많아!
조하영과 김수민과 함께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챙겨 먹으니 벌써 시간이 오후 2시가 훌쩍 넘어갔다. 도서관에 가려고 교정을 걷고 있을 때, 홍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왜.”
-할 말 있어~~ 길드로 좀 와.
“전화로 하면 안 돼?”
-안 돼! 오늘은 한솔이가 한야 꼭 부르랬단 말이야! 와서 공부해. 내가 식혜도 주고 피자도 사 줌.
“오. 먹을 걸로 꼬셔 보시겠다?”
-와서 공부하라고오~!
“왜 이렇게 집착적이야. 아무리 내가 좋아도 곤란하다. 나에게도 사생활이란 게 있어요.”
내 말에 옆에서 조잘대던 조하영이 풉 비웃었다. 야, 비웃냐, 엉? 나는 조하영의 머리를 꾹 누르며 통화를 이었다.
-할 말 있어. 아주 중---요하고 중차대한 일이야.
“…피자 더블 치즈 크러스트 추가해 놔.”
-콜.
결국 도서관을 포기했다. 그렇게 모르젠트로 갔는데… 나는 가서 엄청난 소식을 듣고 말았다.
“…거길 내가 왜 가?”
중차대한 발표를 한 것치고는 어울리지 않게 단호박 식혜를 원샷 한 홍희가 말했다.
“각본에서 따로 한야만 소환했는데, 혼자 가서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거 대신 이번 회동에 참석하는 것으로 딜 봤어. 혼자는 절대 안 되고말고!”
“…그건 알겠는데… 근데 왜 하필 정기 길드 회동에 가야 하는 건데?”
“이해 못 했어? 하아, 나의 깊은 뜻을 못 알아듣다니…. 한야에게 각본에서 소환장이 왔단 말이야. 근데 거길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 내가 아예 길드 정기 모임으로 잡아 버렸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길드 정기 모임에 내가 왜….”
내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백루찬이 목으로 웃었다. 백루찬은 단호박 식혜가 담긴 잔을 들고 있었는데, 저놈이 드니 꼭 무슨 위스키나 와인 같았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가 길드 정기 모임에 왜 가냐고!
내가 뚱하게 반문하자 홍희가 가슴을 퍽퍽 치며 답답해했다.
“그러면 혼자 각본 가서 싹 다 탈탈 털리고 오려고?”
“탈탈… 뭐?”
“각본 측에서 조건을 제시했거든. 개인 소환 대신 길드 모임 때 한야도 오는 것으로. 소환장이 오면 게이트법에 따라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 솔직히 한야는 숨기는 것도 많고, 감춰야 할 거투성이잖아! 가서 우반희가 주도하는 대로 한야라는 거 들키고 철컹철컹 당할래?! 애초에 혼자 가면 일단 철컹철컹부터 시작이라고!”
각본이 무슨 80년대 군사 독재 정권도 아니고 설마…. 내 표정으로 생각을 읽은 홍희가 코웃음을 쳤다.
“우반희가 설마 한야를 그냥 보낼 거라고 생각해?”
홍희의 얼굴이, ‘그렇다면 순진함을 넘어 바보 같은 건데….’라는 듯했다.
단번에 이해했다. 예상 밖의 또라이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죠…. 네….
“어차피 길드 회동이 필요하긴 했어. 모든 길드가 다 모이는 것도 아니고 상위 길드 몇만 모이고, 한야가 가서 딱히 할 것은 없어. 할 일은 유능한 이 부길마님께서 다 처리한다.”
“…정말 믿음직스럽다.”
“그치?”
내 억지 미소에 홍희가 상큼하게 웃었다. 우반희가 조만간 소환한다고 했던 게 이거였나. 나는 그냥 단호박 식혜나 먹기로 했다.
머리 아픈 건 알아서 해라. 안 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해 준다니 넙죽 받아먹어야지.
“근데… 너희는 왜 이렇게 나에게 신경을 써 줘?”
“킹갓엠페러제너럴충무공마제스티 넘버원 한야에게 신경을 안 쓰면 대체 누구에게 신경을 써? 더군다나 우리 길드잖아.”
“…길드 가입한다고 한 적 없는데.”
“에에. 갚아야 할 돈을 내가 정확하게-.”
“길드의 일꾼입니다. 이 시대의 참된 일꾼이죠.”
벌떡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홍희는 흑막처럼 웃었다. 으으, 하여간….
내가 뚱하게 다시 앉자 백루찬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하얀 머리카락이 실타래 같다.
“넌 또….”
“응?”
백루찬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이놈아….
내가 슬슬 몸을 빼자 백루찬은 웃으면서 따라붙었다. 이제 이놈도 부담스럽다. 스킨십 사건도 있었고, 솔직히 그때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아서 그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송류진이 갑자기 다른 감정을 보이니까 그것 때문에도 더…. 뭔가 마음이 걸리고.
백루찬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른하게 나를 보다가, 이내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아, 또 왜 이래.
떨궈 내려고 놈의 팔뚝을 미는데, 때마침 문이 벌컥 열리고 한솔이가 들어왔다. 수업 때문에 뒤늦게 온 한솔이가 내게 붙어 있는 백루찬을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씩씩대며 다가와 소리쳤다.
“형한테서 떨어져!”
“싫은데….”
“변태! 형한테서 떨어져!”
한솔이의 외침에 백루찬이 상처 받았다는 표정으로 윽- 하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하, 애랑 놀아 줄 줄도 아네…. 아무튼 한솔이가 냅다 백루찬과 내 사이에 끼어들어 앉는 바람에 자동으로 백루찬과 떨어지게 되었다.
으이구, 귀여운 놈. 한솔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자, 어딘지 뾰로통한 표정을 한 한솔이가 내 팔에 매달렸다.
“혀, 형. 길마 형이랑 놀지 마….”
“웅, 웅. 그래. 안 놀아. 나는 한솔이랑만 놀 거야.”
“형! 나, 나! 보여 줄 거 있어.”
“뭔데?”
흐뭇하게 웃으며 되묻자, 한솔이는 발그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웃고는 벌떡 일어나 양 손바닥을 붙이며 모았다가, 꽃이 피는 것처럼 천천히 펼쳤다.
그러자 손 안에서 작은 나비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금세 수십 마리의 나비가 팔랑이며 사무실 안을 채웠다.
예전에 봤던 육식 나비와는 다른, 아주 예쁜 나비였다. 내가 감격한 표정으로 박수를 짝짝 치자 한솔이가 수줍게 웃더니 이번엔 또 다른 걸 소환했다.
크릉-.
“…….”
“봐봐! 멋있지!”
그다음에 소환된 것들은 두 마리의 짐승이었다. 한 마리는 뿔이 달리고 갈기가 검은 불꽃처럼 흩날리는 말이었고, 한 마리는 아주 사납게 생긴 거대한 호랑이였다. 호랑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크르릉거렸다. 둘 다 이마에 여러 색으로 빛나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거….
“하하….”
“멋있지! 새로운 친구들이야.”
“그, 그래….”
마수 같은데, 다. 육식 나비들도 그렇고 어째서 이런 험상궂은 놈들이 우리 한솔이에게…. 나는 품 안에 안겨 오는 한솔이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찍어 닦았다. 한솔이는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하, 우리 애가…. 이거 다 테이밍 하라고 저 길드 놈들이 꼬셨겠지. 못된 놈들, 우리 애한테 지금 마수를 몇 마리나 붙여 놓은 거야!
내가 눈을 흘기자 홍희가 자신이 한 게 아니라는 걸 어필하면서 손으로 엑스 자를 그리고 어깨를 으쓱한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놈아, 변명 소용없다.
한솔이는 내 목을 끌어안고 환하게 웃었다.
“이제 내가 형 지켜 줄게.”
나지막하게 속닥이는 그 목소리가 참 가엽고 착하고 예뻤다. 크흐흑 우리 한솔이가 다 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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