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어?”
송류진의 눈빛이, 이상했다. 내부는 온통 커튼을 쳐 놨는지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순간 노랗게 빛나는 거 같았다. 마치, 오래도록 기다린 사냥감을 앞에 둔-.
그렇게 생각할 때쯤이었다. 송류진이 뻗은 손이 내 뒤통수를 감쌌다. 순식간에 목덜미가 잡히고, 나는 그대로 송류진에게 붙잡혀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류진아- 큭…!”
방 안엔 다른 가구도 없이 침대만 달랑 있었다. 송류진은 내 팔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넘어트렸다. 졸지에 끌려 들어간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놈이 밀치는 대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송류진이 진심으로 해치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이 불러온 결과였다.
넘어지듯 침대에 밀쳐졌지만, 매트리스가 푹신해서 아프진 않았다. 다만 나는 순간 숨을 훅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송류진이, 그대로 내 위로 올라탄 것이다.
“…류, 류진아?”
눈빛이 영 예사롭지 않다. 기묘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꽉 잡힌 손목이 매트리스에 처박혔다. 힘으로 밀어내면 밀어낼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는 송류진의 얼굴이 너무….
“정말, 그런 거라고 생각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처참하게 구겨진 송류진의 표정은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아니야?”
“차해준, 너는, 정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있는 게 웃기다는 듯, 송류진은 작게 실소했다. 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는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오염된 지하 도시에서 케이든은 송류진을 세뇌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한 것처럼 약물을 썼을 수도 있다. 아니, 이건 백 프로다.
우반희는 송류진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않고 칩거했다고 말했다. 그러면 혹시 모른다. 케이든의 약물에 의한 부작용이 송류진에게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나도 부작용으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류진아, 지금 당장 병원에라도 가자. 너 이대로는 위험해.”
몬스터가 쓴 약물이었다. 세뇌도 위험하지만 그것은 각인이 되면서 깨졌으니까 문제는 없을 텐데, 약물이 문제였다. 그놈이 무슨 약물을 썼는지도 모르는데, 이 상태로 계속 있는 건 위험했다.
그러나 송류진은 내 말에도 미묘하게 구겨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잡힌 팔을 빼 보려 움직여 봤지만 마력을 끌어 쓰지 않는 이상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송류진은 내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너에게 나는 항상 그것밖에 안 되는 거지.”
“…류진아, 무슨-.”
“항상, 친구이기만 한 거야?”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송류진이 어떤 의도로 꺼내는 말인지 제대로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왜? 자꾸 그런 얼굴로 왜?
의문이 나를 집어삼킨다. 그때였다. 송류진은 상체를 숙여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쁜 숨소리와 함께 내 뺨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너는… 왜.”
송류진이 울고 있었다. 순간 목구멍이 턱 막힌 것처럼,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송류진, 너 왜, 왜 우는 거야.
“괴로워, 해준아. 자꾸, 자꾸 환청이 들려. 너를 막- 너를.”
“…류진, 류진아.”
“네 목소리를 들으니까, 네가 내 앞에 있으니까, 더 참을 수가 없어.”
끓는 듯 괴로운 목소리로 송류진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뺨에 떨어지는 것들은 무게가 없는데도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송류진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젖었던 속눈썹이 깜박인다. 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래도 우리가 친구야?”
송류진은 아주 느리게, 내가 얼마든 거부할 수 있는 속도와 힘으로 천천히 입을 맞췄다. 키스도 아닌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눈을 꾹 감아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멍하니 굳어 버렸다. 송류진은 우는 얼굴로, 애써 웃었다.
“이래도?”
아무런 말도,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한껏 당황해서 눈만 깜박이다가, 나는 송류진을 밀치고 일어났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나는 황급히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 내 뒤로, 송류진이 말했다.
“난 친구 싫어.”
그 말에 발걸음이 멈췄다. 천천히 돌아보자, 울어서 엉망인 얼굴로, 송류진이 손바닥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지금은 더욱더, 싫어.”
울음이 섞인 그 말에 나는 차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송류진은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목소리에 떠밀리듯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굳게 닫힌 문을 한참 동안 쳐다봤지만 머릿속이 멍했다.
송류진이 차해준에게 가지는 감정이… 그냥 친구로서가 아니라….
생각할수록 복잡해졌다. 미치겠다. 나는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차해준이랑 송류진이 친구가 아니면 뭐야…. 원작에서도 친구였다고. 물론 나는 다섯 편밖에 보지 못했고, 거기에 송류진에 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그래. 송류진은 차해준에게 과하게 잘해 줬다.
어렸을 적 첫 만남 이후로 송류진은 학교를 뒤져서 차해준을 찾아냈고, 그 뒤로는 그 누구보다 붙어 다녔다. 아니, 송류진이 차해준을 쫄래쫄래 따라다녔다고 봐야지. 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S급 각성자로서 대학 따윈 다닐 필요도 없었는데 송류진은 차해준을 따라 한국대에 입학했다. 상주 헌터를 자처하면서 말이다. 무려 S급이.
그동안 송류진이 보여 왔던 미묘한 행동들이 순식간에 이해 가기 시작했다. 친구끼리라면 하지 않을 법한 행동들을 하고, 유난히 걱정했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이 정도면 차해준이 일부러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송류진은 차해준에게 집착적으로 붙어서 하나하나 신경 쓰고, 걱정하고, 챙겨 줬다.
하, 나는 왜 인지를 못했을까.
그동안 겪은 일들이 스펙터클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세계 존망이 달린 퀘스트가 있었기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류진은 메인 캐릭터였다. 더군다나 각인까지 한.
그러자 생각이 하나로 귀결되었다.
각인. 그게 문제다.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송류진이 진짜로 원해서 저런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각인으로 인해 감정 컨트롤이 잘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송류진은 미묘한 기색으로 티를 내 왔지만, 이 정도로 격해지는 건 각인 때문이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케이든도 한차례 송류진을 자극하기도 했고….
하, 미치겠네. 어찌 되었든 지금 송류진이 괴로운 이유는 나 때문이란 거 아냐.
빌어먹을, 이게 다 이상한 시스템 탓이다. 애초에 각인 같은 걸 왜 만들어 냈냐고! 그냥 메인 캐릭터 딱딱 알려 주고 구해 주기만 하면 얼마나 편해! 무슨 호감도 쌓는 것도 아니고 각인까지 해서 인지해야 하고… 살펴 줘야 하고.
아 복잡하다, 복잡해. 마음도 너무 심란해졌다.
나는 침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밖에서 담배를 물고 기다리고 있던 우반희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눈썹을 꿈틀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럴 줄 알았지.”
“…알긴 뭘 알아.”
네가 뭘 아냐고…. 아오.
속이 답답해져서, 우반희가 피우고 있는 담배를 뺏어서 피우고 싶을 정도였다. 이걸 진짜 어떻게 해결해야 돼.
우반희는 쯧 혀를 차더니 멀리 주차해 놨던 차를 끌고 내 앞으로 돌아왔다. 나는 군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우반희는 송류진이 왜 이렇게 됐는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개코라는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네.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싸맸다.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차는 금방 모르젠트 길드 앞에 도착했다. 길드 앞에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홍희가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 홍희 뒤로는 검은 테크 웨어를 입은 몰젠 길드원들이 잔뜩 서 있었다. 아니 왜 이렇게 다들 나와 있어…. 그새 우반희가 연락을 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모르젠트 길드 로비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입구를 가득 채우고 있던 길드원들이 양옆으로 길을 텄다. 그 사이로 보이는 긴 코트 자락과 그보다 더 긴 다리.
백루찬이었다. 백루찬은 평소처럼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근데… 왜 살벌하게 느껴지지.
눈치란 게 있는 사람은 백루찬 기분이 아주 저조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엔 나도 포함되어 있다.
차에서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내리자 홍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호출기.”
“아, 그거 내가 분명.”
챙겼…. 환자복 상의 앞에 하나 달린 주머니를 열심히 뒤지다가 멈칫했다.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홍희를 피했지만 백루찬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으니까.
“하하….”
“웃음이 나오지?”
홍희가 내 옆구리를 퍽퍽 찔렀다. 아야, 야 이건 찌르는 게 아니라 주먹으로 후려치는 거 아니냐? 옆으로 조금씩 밀리면서 내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열심히 피력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백루찬의 웃음이 더 짙어지고,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깔았다.
아니 근데 내가 왜 쫄아야 돼? 갇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순간 든 생각에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다시 마주친 백루찬의 얼굴을 보고 눈을 깔았다. 웃고 있는데도 번뜩이는 눈이 꿈에라도 나올까 무서웠다.
그래… 환자가 10층 높이 창문을 열고 그것도 사이가 차마 좋다고 할 수 없는 각본 소속 헌터 놈과 함께 갔으면 문제지. 그럼 문제고말고.
“각본 일 처리가 점점 더 마음에 안 들어지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백루찬이 차에서 내리는 우반희에게 말했다. 우반희는 피식 웃으며 느긋하게 차에 기댔다. 우반희는 전혀 걸릴 게 없다는 듯 굴고 있었다.
“그걸 왜 나한테 따지나.”
“우반희 팀장님이 주관하신 일이니까? 이렇게 막 남의 길드에 함부로 쳐들어오시고, 남의 길드원을 납치하듯 데려가니까 기분이 나쁘잖아요.”
“차해준 헌터를 그렇게 생각했다니 몰랐네. 아주 애지중지하는데? 각성자는 널리고 널렸는데 왜 하필 차해준만 그렇게 챙기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가는데?”
“우리 길드원을 제가 챙기는 건 당연한 거죠. 방문 시 협약에 따라 공문을 보낸 후 수락을 받아야 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인데, 왜 그걸 이렇게 대놓고 어기셨을까? 나는 그게 이해가 안 가는데?”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살기가 어리는 환상이 보였다. 아니 환상 맞나…. 나는 둘 사이에 껴서 말싸움하는 것을 정통으로 맞고 있었다. 슬금슬금 몸을 빼려 하니 홍희가 씁- 하면서 나를 노려봤다. 아 왜….
“오늘 일 각본 본부장에게 정식으로 항의해도 되겠죠? 우반희 팀장님께서 허락도 없이 남의 길드에 쳐들어왔으니까.”
백루찬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길드원 몇이 우반희와 같이 왔던 각본 요원들을 범죄자처럼 끌고 나와 우반희 앞에 세웠다. 하나같이 얼굴이… 처참하다. 우반희는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곤, 처맞기만 했냐?”
“…팀장님.”
뺨이 붉게 터진 요원 하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우반희는 그들을 무시하고 백루찬에게 말했다.
“공무원들을 죄다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으면 공무 수행은 누가 하나? 우리 백루찬 길드장이 대신 뛰어 줄려고 그러나?”
“일반인들이 주로 있는 병동에서 난리 치고 있길래, 우리 길드원들이 손이 잘못 나갔나 봐요.”
“일반인? 내가 봤을 때 일반인은 없던데. 우리 길드장 먼저 병원에 가 보셔야 하나 봐.”
“멋대로 쳐들어와서 난리 피운 건 문제 삼지 말라는 얘기인가요. 그러기엔 내 기분이 너무 더러운데. 어떡하지.”
우반희와 백루찬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불꽃이 튈 것 같다. 말로만 싸우는데 왜 이렇게 서로 죽일 듯이 노려봐. 우리 그래도 같이 게이트 들어가서 죽다 살아 나온 전우 아니었어?
“둘 다 그만하고-.”
“넌 닥치고 있어.”
“형은 이리 와요”
괜히 중재하려고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그래도 이것들아… 사람들 시선이 있는데 이러는 건 너무 쪽팔리잖아.
우반희는 혀를 쯧 차고는 기대고 있던 차에서 몸을 뗐다.
“본부장에게 찌르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고, 나는 분명 공문 보냈습니다. 잠. 깐. 들르겠다고 말이야. 그런 것도 이해를 못 해 주나. 하여간 속이 좁아?”
껄렁껄렁 대꾸하던 우반희는 갑자기 내 팔을 붙잡아 당겼다. 나는 뚱한 얼굴로 우반희를 쳐다봤다. 왜 인마.
“곧 각본에서 정식으로 연락 넣지. 명동 게이트 사건은 물론 신당 5동 게이트 사건까지 관련해서. 그동안 있었던 게이트와는 양상이 다르잖아? 보스 몹 레벨 업에 대해 참고인으로 소환할 테니까 알아 둬.”
“…그래.”
“근데 너 말이야.”
“뭐.”
“이제 한야라는 거 숨지기 않을 생각인가 보네?”
귀 옆에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말에,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뭔 개소리야.”
절대 숨길 생각이거든요. 앞으로 절대 안 드러낼 거거든요? 내 애검이 좀 특정되긴 하지만 워낙 사짜도 많으니 더 들킬 염려도 없다. 이미 나는 A급 각성자로 등록도 마쳤다고!
게이트 안에서 내가 싸우는 걸 우반희가 직접 봤지만, 그때 일은 자세히 꺼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S급으로 들어가서 몹에게 당했다는 말을 어떻게 당당하게 해. 그것도 말하자면 내 손으로 구해 준 거고. 너 인마 생명의 은인에게 이러는 거 아니다.
내 띠꺼운 눈빛에도 우반희는 꿈적도 안 하고 고개를 돌려 백루찬에게 말했다.
“백루찬 길드장도 소환장 맞을 준비는 하고 계시죠.”
백루찬은 그런 우반희 앞으로 다가와 우반희가 잡아챈 내 팔을 휙 빼냈다.
“시간 나면, 생각해 보고요.”
“아하.”
나를 제 뒤로 보내며 하는 말에 우반희는 싱긋 웃었다. 하여간 재수 없게도 웃는다. 그 얼굴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자 우반희가 손가락으로 제 눈을 찌르고 나를 가리켰다. 지켜본다, 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켜보긴 뭘 지켜보냐, 씨발……. 아오, 가뜩이나 송류진 생각 때문에 머리 터질 거 같은데 우반희 저 새끼도 나서서 살살 긁어 대니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우반희는 제가 데리고 온 요원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홍희는 데려왔던 길드원들을 데리고 ‘오늘 특별 훈련이다!’ 소리치며 길드로 들어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등 뒤에 산처럼 쌓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들어가려고 걸음을 옮기자 백루찬이 뒤따라왔다.
병실로 되돌아가 나는 내 옷과 간단한 짐을 챙겼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들고 온 것도 없으니 가지고 갈 것도 없다. 나는 환자복을 훌렁 벗고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백루찬이 아직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해요, 형.”
“집에 가려고.”
“흐응.”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막지도 마라. 형 피곤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럼 이만 나갈래?”
옷 좀 갈아입자, 이놈아. 백루찬은 그런 나를 빤히 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다 본 사이에, 내외하는 거예요?”
“…나가.”
아주 짜증이 치솟았다. 이 변태 새끼가 진짜! 침대 위에 있던 베개를 집어 던지자 가볍게 잡은 백루찬이 그것을 소파에 내려놨다.
그 여유로운 모습을 보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차피 다시 올 테니까, 막진 않을게요.”
백루찬은 병실 밖으로 나가다 말고, 나를 돌아봤다.
“그런데 막 함부로 이상한 사람 쫓아가진 마요. 솔직히 아까 진짜로 화가 났는데 참았어.”
“…넌 나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냐.”
“몰랐어요, 형?”
백루찬은 싱긋 웃었다.
“나 형에게 딴 맘 있잖아.”
“…뭐?”
“집까진 데려다줄 테니까 나와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백루찬은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쳤다.
다들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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