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발화
빌어 처먹을! 우반희는 결국 내 멱살을 붙잡고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아무리 S급이라지만 어? 각성자라고 고소 공포증이 없을 줄 아냐고!
왜 창문인데! 왜!
“씨발….”
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을 짚자 사뿐히 지면을 디딘 우반희가 코웃음을 쳤다. 우린 결국 창문을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면서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10층에서 뛰어내린 여파로 인해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쫄기는.”
휙 고개를 돌려 우반희를 째려봤다. 내 째림에도 우반희는 바로 빌딩 앞 도로에 세워 놨던 차의 시동을 켰다.
“타.”
뭔 놈의 공무원 새끼가 차는 또 졸라 좋아. 검은색 무광으로 빠진 차는 뽑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새 티가 팍팍 났다. 이거 외제 차인가?
씩씩대면서도 차 문을 곱게 닫고 탔다. 혹시 내 힘에 부서지면 어떡해. 나 돈 없다.
우반희는 바로 출발했다. 굉음을 내뿜는 차량이 빠르게 도로를 가로지른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전벨트를 매고 조수석 손잡이를 붙잡았다.
…절대 쫀 거 아니다. 스킬 쓰면 이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고. 진짜야.
나는 빠르게 스쳐 가는 차창 밖을 보다가 말했다.
“류진이, 많이 안 좋아?”
“얼굴도 안 보여 줘서 몰라.”
아니 얼굴도 못 봤으면서 나는 왜 데려가? 어이가 없었지만 송류진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따지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 게이트, 잘 닫혔어?”
“명동? 3일 뒤 닫혔어. 네가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꼭꼭 숨어 있을 때.”
나라고 원해서 숨어 있었던 게 아니라 약물 중독으로 치료받고 있었다, 이 새끼야….
우반희는 운전대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2급으로 측정되었다가, 나중에 2+급, 그리고 1-급까지 올라갔었지. 각본 게이트 관리 부서에서 확인한 내용이야. 알고 있었어?”
“…….”
시스템을 통해서 직접 목격했으니 알고 있었다가 맡겠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우반희는 내 얼굴을 힐끔 보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모르젠트에서 제대로 얘기해 주지 않았나? 하여간 그놈들, 매번 멋대로 굴지. 아주 악질이야.”
“이상하다고는 말해 줬어. 마력 파장이 탐지가 되지 않았다고. 그리고 홍희는 2+급으로 알고 있던데?”
“그야 1-급까지 올라간 건 내가 본 거니까.”
뭐여. 지만 본 걸 몰랐다고 욕한 거냐? 띠꺼운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우반희는 뻔뻔했다.
“뭘 그렇게 봐? 내가 아는 걸 모르는 놈들이 등신이지.”
“…….”
그래 이 새끼야…. 너도 세상이 네 중심으로 돌아가는구나.
그래도 우반희 이놈, 나오자마자 조사하겠답시고 영장 보내고 난리 부릴 줄 알았더니 의외로 그런 부분에선 잠잠했다. 송류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같은 각본이라 이거지.
하 송류진,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인데 이대로 내버려 둔 내가 좀 한심하다.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시스템도 그렇고 시나리오도 엉망으로 떠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진심으로 미안해지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우반희가 대뜸 말했다.
“내가 너 이대로 그냥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아.”
“…뭐 어쩌려고.”
“넌 내가 따로 전담 마크 할 거야.”
“…….”
집요한 새끼.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내 눈빛을 읽었는지, 우반희가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네가 뭐라고 불리든, A급 각성자로 등록을 했든, 나는 네가 누군지 정확히 알아.”
존나 무섭게도 말한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사받을 게 있으니, 몰젠에 숨어 있지만 말고 나와라. 내가 너 꼭 부른다.”
“…뭔, 어디로 나오라는 겨. 지금도 나와 있잖아.”
“각본으로 부른다고.”
“…영장 꼭 챙겨라.”
우반희의 집착 어린 말에 몸에 한기가 돌았다.
누가 가나 보자, 새꺄. 절대 안 가. 응.
한참을 달린 차는 서울 성수동에 와서 멈춰 섰다. 주차를 마친 우반희는 내가 내리자 무언가를 던졌다. 얼떨결에 받고 보니, 카디건이었다.
“환자복 너무 눈에 띄니까, 그거라도 입어.”
나는 지금 내 모습을 훑어보았다. 널널하다 못해 큰 환자복에 맨발에 슬리퍼만 신은 내 모습은 갓 병실에서 탈출한 사람 같았다. 이게 다 우반희 때문이다. 저놈이 날 대뜸 끌고 오지만 않았어도. 나는 얼른 카디건을 걸쳐 입었다.
도착한 곳은 으리으리하게 큰 단독 주택 앞 이었다. 2층으로 된 집은 담벼락이 크고 높았고, 대문은 무슨 철옹성처럼 단단히 잠겨 있었다.
나는 주택을 둘러보다 물었다.
“…여기 혹시 송류진네 본가냐?”
“각본에 들어오고 나서 걔 독립했어. 혼자 있을 거다.”
“…….”
독립치고는 사이즈가 너무 컸다.
맞다, 잠깐 잊고 있었지만 송류진은 병원장 아들내미였다. 돈 많은 재벌 2세. 이 중요한 사실을 왜 또 잊고 있었지.
주변을 둘러보는 나를 데리고 우반희는 커다란 대문 앞으로 갔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우반희를 쳐다봤다.
“없는 거 아냐?”
“…너 여기 한 번도 안 와 봤지.”
“…….”
한 번도… 라기엔, 송류진네 놀러 간 기억이 없다. 따지고 보면 한 번도 없는 거 같긴 하네. 내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우반희는 혀를 찼다.
“친구라며. 친구 맞아?”
“…친구라고 다 집 찾아가고 그러냐….”
우반희가 한심하게 쳐다본다. 할 말이 없다. 차해준이 독고다이로 살아온 건 맞으니까.
“요즘 친구라도 각자 사생활에 대한 존중이 얼마나 필요한지 몰라? 그러면 댁은 뭐 활발한 사회생활 하시나 봅니다. 예?”
우반희는 아예 나를 무시하고 초인종을 누르다가, 그래도 답이 없자 대문 옆 담벼락 밑으로 걸어갔다. 뭐야, 또 어디 가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우반희가 갑자기 훌쩍 뛰어서 담을 넘었다.
“…….”
저 미친놈이.
담벼락 반대편에서 우반희가 소리쳤다.
“빨리 와라. 바쁘다.”
뭐 이리 당당하게 범법 행위를 하고 난리야. 아무리 각본이라지만 이래도 되는 거야?
나는 떫은 표정으로 우반희가 넘어간 담벼락을 쳐다봤다. 3미터는 될 거 같은데 이거. 일단 송류진이 급하고 다른 방법도 없으니. 나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열심히 한 다음 손쉽게 담을 뛰어넘었다.
집 안엔 잔디가 깔린 정원이 있었고, 우반희는 익숙하게 그곳을 가로질렀다.
현관문은 아예 잠가 놓지도 않았는지 손쉽게 열렸다. 우반희를 따라 들어가면서도 좀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와도 되나….
집 안은 암막 커튼을 쳐 놓았는지 온통 어두웠다. 각성자의 시야로 사물을 확인하기엔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주변을 살피며 우반희를 쫓았다. 우반희는 아주 익숙하다는 듯, 거실과 가장 가까운 방문을 붙잡고 돌리다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형, 지금은 싫어요.
송류진이었다. 쉬어 버린 건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탁했다.
“류진아, 잠깐만 나와 봐. 얼굴만 보고 갈게.”
우반희는 나에게 눈짓하며 그렇게 말했다. 각성자이니 문밖에 몇 명이 있는지 눈치챌 것 같은데, 송류진은 그런 걸 확인할 겨를도 없이 몸이 아픈지 내가 온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메인 캐릭터인데 이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 신경을 못 쓴 내 탓이다. 명색이 메인 캐릭터인데, 좀 더 챙길걸.
나는 우반희의 옆에서 서서히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봤다. 문틈 사이로 초췌한 안색을 한 송류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 저는 진짜….”
송류진은 우반희만 온 줄 알았는지, 우반희를 보며 무어라 말하려다가 나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송류진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언뜻 비쳤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 류진아. 괜찮아?”
걱정한 기색을 가득 담아 물었지만, 송류진은 나를 빤히 보더니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어라… 뭔가 좀 싸늘한 반응인데. 기분 탓인가.
“어… 이분 따라왔어. 네가 걱정돼서.”
내 말에 우반희가 작게 실소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송류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전히 반도 열리지 않은 문에 나는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송류진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 버렸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당황했다. 뻗은 손이 뻘쭘하게 문 앞에 닿았다. 우반희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 네가 원해서 데려와 줬잖아! 지금 뭐 하는 거야!”
-…가요.
“송류진!”
-…가, 해준아. 제발.
거절당한 것은 난데, 마치 송류진이 거절당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우반희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문고리를 부술 것처럼 잡고 돌렸다. S급이면 이런 방문 따위 종이 접듯 부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남의 집이고, 집주인이 거부하니 참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깊게 쉬고 우반희를 말렸다.
“그만하고, 먼저 가.”
“야-.”
나는 우반희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류진이랑 따로 얘기해 볼게.
우반희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척이나 못마땅한 듯 보였지만 우반희는 천천히 손잡이를 놓고선 뒤로 물러났다.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소리쳐.”
우반희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집을 나섰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내가 무슨 일을 당하기라도 할 것처럼 얘기한다.
나는 방문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혹시 각인 때문인가. 우반희의 반응을 보니 송류진이 나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 확실한 거 같은데.
시스템상 각인 대상은 각인 상대에게 갖는 감정을 잘 컨트롤하지 못하게 된다.
각인으로 느끼는 감정이 좋은 감정일지 나쁜 감정일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각인으로 느끼는 감정이 혹시, 분노라든가… 살의라든가. 그런 거라서, 송류진이 이러는 걸까.
오랜 친구였던 이에게 그런 감정이 든다면 아마 무척이나 난감할 것이다. 더군다나 송류진은 차해준을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평생 지낼 수는 없는 거 아냐. 송류진은 메인 캐릭터다. 송류진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든, 혹시나 그게 살의라도 나는 송류진 옆에 붙어서, 송류진이 죽을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꼭 의무가 아니라도 송류진은 나의 유일한 친구다. 이대로 둘 순 없었다.
나는 잠시 방문 앞에서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류진아.”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말해 봐야 할 것 같다. 오염된 지하 도시에서 케이든에게 세뇌당해 나를 덮치려 했던 그 일. 혹시 그것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아 진짜 이게 아니라 각인 문제면 어떡하지.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류진아, 혹시 케이든의 세뇌 때문에, 게이트에서 벌어진 일로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라면 자책하지 않아도 돼.”
귀를 기울이자, 송류진의 숨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불안한 듯 거칠어진 숨. 정말 이 일 때문일까.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괜찮아. 그땐, 우리 모두 케이든에게 당했었잖아. 나도 그래서 그동안 너 피한 게 아니라, 약물 중독 치료를 받았어.”
혹시나 내가 일부러 피했다고 생각할까 봐 급하게 덧붙였으나 안에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
“우리가 이런 걸로 어색해지는 건 좀 그렇지 않냐. 그땐 진짜 다급했고, 너도 그렇고 나도 힘든 상황이었고, 나는 진짜 괜찮아.”
이것 때문에 내가 불편한 걸까. 나는 다시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몇 년 지기 친구인데. 응? 아니면 혹시 다른 문제가 있는 거라면-.”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까맣게 죽은 얼굴로, 어둠 속에 잠긴 송류진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송류진은 다 쉬어 버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정말 그런 거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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