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정신 사나운 통화가 종료되고, 나는 한솔이와 함께 홍희가 가져온 도시락을 먹었다. 홍희는 소파에 늘어져서 일하기 싫다 노래를 부르다가 결국 찾아온 모르젠트 길드원에게 붙잡혀 나갔다.
정희수도 한솔이를 찾아왔다.
“오늘 검진 받는다고?”
“네. 스킬 활용도도 체크하고, S급이라도 각성자마다 신체 능력은 다양하잖아요. 한솔이는 어떻게 특화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아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야 나중에 공략도….”
정희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모르젠트 이놈들, 아무리 S급이지만 중학생도 안 된 애한테 게이트 공략을 시킨다고?
내 얼굴을 본 정희수가 무언가 알아챘는지 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뇨. 바로 나가는 게 아니라, 준비하는 거예요. 저도 형처럼 놀라서 물어봤거든요. 커 가면서 등급이 더 오를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능력을 키워 가자는 의미로 하는 검진이래요. 걱정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무리 그래도 좀 못마땅하긴 하다. 좀 더 시간을 줄 수는 없는 건가. 물론 S급 각성자의 수가 많지 않아서 그런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내 옆에 붙어 있던 한솔이가 내 표정을 보고 기쁜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목을 감싼 팔의 온기가 따뜻했다.
“한솔이는 괜찮아?”
“나, 나는 좋아. 그래야 하루라도 빠, 빨리 형을 지켜 줄 수 있으니까.”
어깨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리는 소리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귀여운 놈. 아직도 내가 쓰러져서 나온 걸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건 내 잘못이 크다. 명색이 랭킹 1위인데, 제일 강한 놈이 툭하면 쓰러지기나 하고 말이야…. 스킬 사용이나 이런 것을 좀 더 연습을 해야 할까. 그러면 좀 더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직 완전히 ‘차해준’처럼 나탈리스를 잡을 정도로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는 거 같아서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럼 형, 한솔이랑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형아, 기, 길마 형은 오지 못하게 해.”
한솔이가 신신당부하듯 내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한솔이 다 알고 있어. 부끄러움이 급 몰려왔지만 애써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어 줬다. 하 한솔아… 백루찬 그놈을 누가 막을 수 있겠니….
한솔이가 정희수의 손을 붙잡고 병실을 나간 뒤, 나는 또 혼자 남겨졌다.
진짜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데, 홍희에겐 내일 퇴원하겠다고 말해 놨으니 오늘까진 좀 참아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소파에 널브러져 TV를 틀었다. 김수민과 조하영이 말한 긍휼의 기사… 라는 명칭이 어떻게 붙었는지도 궁금하고.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게 더 빠르겠지만, 헌헌엔 왠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면 꼼짝없이 엄청난 현실을 목격하게 될 것만 같다…. 내 신상 정보가 뜬 게시 글을 본다거나… 혹시 한야로 의심하는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회피를 하고 있었다. 상황 파악하려면 보긴 해야 하는데, 진짜 보기 싫다. 한숨이 나오네.
주변이 조용해지고 뉴스에선 아나운서의 목소리만 들렸다.
나는 아까 통화했던 내용이 떠올렸다. 진마하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두 사람.
왜 나는 진마하를 기억하는데 같이 다녔던 둘은 기억을 하지 못할까? 혹시 게이트에 다녀온 후 내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걸까.
하지만 나는 그때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시스템창을 통해서 봐도 이름 외에 아무런 정보도 뜨지 않았던 진마하를. 그 이후 나를 사칭하고 수상하게 웃었던 그 얼굴도. 아니, 얼굴?
…그놈 어떻게 생겼었더라?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아 기억을 열심히 되감아 보는데, 갑자기 병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구 높으신 분이라도 왔나. 왜 저러지. 억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구둣발 소리가 요란했다.
뚜벅뚜벅 걷는 발걸음이 내가 있는 병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찾아온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병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러다 저 문 부서지는 거 아니냐. 제발 올 때 다들 살살 좀 열어, 좀!
“차해준, 얼굴이 반질반질한 게, 그동안 편했나 보다?”
검은 제복과 가슴에 은색 흉장을 단 남자가 구둣발 소리를 내며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질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필 우반희가 올 게 뭐람. 내 표정을 보고 우반희가 비죽 웃는다. 그의 뒤로 제복 차림을 한 각본 요원들이 병실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와 홍희야, 모르젠트 길드 빌딩에 각본이 이렇게 쳐들와도 되는 거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병동에서 왜 이러세요!”
각본 요원에게 가려졌지만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이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이놈들 억지로 뚫고 들어왔구만. 하긴, 몰젠 길드에서 대놓고 각본 요원들을 들여보내진 않았겠지.
물론 우반희도 나름 S급이라서 막기가 어려운 건 알겠지만….
“이래 봬도 정식 요청하고 들어온 거야. 길드장 허락은 아직 안 떨어졌지만.”
“세간에선 그걸 불법이라고 불러요.”
“우린 분명 요청했고, 시간 내에 안 보내 준 건 길드인데 불법은 아니지.”
우반희가 주머니에서 서류를 한 장 꺼내 흔들었다. 그러니까, 허가든 불가든 말이 떨어지기 전에 쳐들어왔다는 거 아냐. 이게 말이야 방구야. 틈새시장 공략하는 것도 아니고 참나.
“그래서 뭐요.”
“너 좀 띠껍다?”
우반희가 내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꼬고 쳐다보는 시선이 묘하게 강압적이다. 슬슬 좀 빡친다. 우반희에게는 좋은 감정이 없었다. 뭐 게이트에서 그렇고 그런… 아무튼 동지애나 그런 게 싹틀 만했지만, 저놈 얼굴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날아갔다. 우반희는 나를 쓱 훑더니, 미묘한 얼굴로 웃었다.
“왜 웃지?”
“웃으면 안 돼?”
“나가서 웃든가. 왜 내 병실에서 난리야.”
“말이 짧아지네?”
“요.”
쫄아서 그런 거 아니다. 진짜다. 갑자기 저번에 각성자 센터에서 봤을 때가 떠올라서였다. 이놈도 그렇고 나도 아주 제대로 얽혀 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한라동 사건. 그것만 생각하면 골이 아팠다. 무시하고 싶은데 저렇게 딱 버티고 있으니 쉽지도 않고….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뭐, 얼굴 보니 무사해서 다행이네. 꼼짝없이 죽는 줄 알고 나름 걱정을 했거든.”
“…무슨 개소리를.”
“이제 진짜 말 놓겠다 이거지?”
“거참 몇 살 차이 난다고!”
“뭐 딱히 상관은 없는데.”
내가 버럭 소리치려 했지만, 우반희는 정작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아놔 그러면 진즉에 티를 내지 왜 처음에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내고 난리야…. 나는 뻘쭘하게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우반희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병실에선 금연인 거 모르나.”
“구닥다리 같기도 하지.”
“네가 너무 예의를 밥 말아먹었다고 생각은 안 하는 건지?”
“우리 사이에 예의는 무슨.”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저놈을 밀치고 도망간 전적이 있으니,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범죄자와 범죄자 쫓는 형사 사이긴 한데. 겉으론 티를 안 내고 있지만 나는 상당히 쫄아 있었다. 저놈이 한라동 사건을 입 밖에 꺼낼까 봐. 그때도 트라우마처럼 발작이 나서 쓰러졌는데 이번에 또 안 그럴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우반희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가만히 턱을 괴었다.
“송류진, 뭐 하고 있는지 알아?”
“…연락 안 해 봤는데.”
갑자기 류진이 얘기는 왜 꺼내냐. 당연히 오염된 지하 도시 게이트 이후로 갇혀 있다시피 병실에만 있었기에 몰랐다. 연락이라도 해 볼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반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홍희가 나한테 준 것과 비슷한 색과 똑같은 모양을 한 호출기였다. 우반희는 그것을 보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뭐?”
“일어나라고.”
우반희가 성큼 다가와 내 팔을 붙잡고 일으켰다. 아니 왜 이래, 이 양반이.
“나 환자다.”
“환자는 무슨.”
우반희는 콧방귀를 뀌며 나를 데리고 창문 쪽으로 갔다. 어라, 이거 좀 불안한데.
잡힌 팔에 힘을 주고 걸음을 멈추자, 우반희가 못마땅한 기색을 풍기며 나를 돌아봤다. 그러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슬쩍 보이는 화면에 통화가 연결되어 있었다.
“어. 백루찬이 돌아왔다고?”
아무래도 각본이 들어올 때 백루찬이 외출을 했었나 보다. 우반희는 그 말을 듣고 통화를 종료하더니 말했다.
“송류진, 걱정 안 돼?”
케이든에게 당한 세뇌 때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그때는 나도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다만 상태가 여실하게 안 좋았었던 건 기억이 난다. 분명 냉동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피부가 차갑게 얼어 있기도 했었지. 그것 때문일까.
“…류진이에게 무슨 일 있냐?”
우반희는 내 말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야, 나 지금 존나 불안한데.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우반희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걱정되면 직접 가 봐야지.”
“걱정된다고 말 안 했거든?”
“송류진이 널 얼마나 챙겼는데…. 너 막 그렇게 사람 가지고 놀다 버리는 게 취미야?”
“개소리 그만해, 좀! 누가 누굴 버려!”
“그럼 가자니까. 류진이가 지금 좀 아파.”
그 말에 우반희의 손을 쳐 내려던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아프다고? 송류진이?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고 있어. 게이트에서 나온 후 병원에 가지도 않고. 처박혀서 꼼짝도 안 해.”
“…….”
“내가 생각할 때 그 이유에 네가 포함되어 있는 거 같거든? 어떻게 생각해.”
“…가자, 가.”
송류진이 집 밖으로 안 나오는 이유에 왜 내가 포함되어 있는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일단 송류진이 걱정되니 가 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걱정되게 짜식이….
우반희는 내 대답을 듣고 싱긋 웃었다.
“그럼 뛰어.”
…미친놈아, 여기 10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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