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내가 애써서 한솔이에게 주의를 돌리자, 정희수가 다시 한번 나를 붙잡고 물었다.
“근데, 형. 신상이 털리긴… 했어요.”
나는 멈칫하며 정희수가 다시 내민 휴대폰을 유심히 바라봤다. 화면엔 헌헌 베스트 게시 글이 쭉 나와 있었고, 거기엔 한국대 체교과 인터뷰녀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인터뷰녀가 뭐지? 하고 클릭해 보니, 익숙한 얼굴이 화면을 장식했다. 나는 침음을 삼켰다. 조하영 아냐 이거…!
“학교랑 이름 나이까지…. 사실 한국에서 이정도 털리면 다 털린 거라고 봐도 무방….”
옆에서 정희수가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데 나는 갑자기 두통이 오는 기분에 머리를 붙잡았다. 아니 홍희는 뭐 했어. 몰젠은 길드원 신상도 안 감싸 주고 말이야! 저번엔 잘만 막아 주더니 이번엔 이게 뭐냐고!
사실 명동에서 나설 땐 다급한 마음에 후폭풍을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움직이긴 했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퍼질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더군다나 조하영이 나서서 까발릴 줄은…!
“어디, 어디 가세요?”
내가 어두운 안색으로 병실을 나가려 하자 정희수가 뒤따라오며 물었다.
홍희 이놈 찾으러 간다…. 이거 수습해야 할 거 아냐.
“혀엉….”
그때 벌떡 일어난 한솔이가 내 팔을 잡아챘다. 나는 한솔이를 돌아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니.
아… 뭔가 진짜 차해준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조금 시무룩하게 굳어서 한솔이의 말랑한 손을 조몰락거리고 있자 갑자기 병실 문이 활짝 열리며 홍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몸 등장!”
목소리가 아주 쾌활하고 밝다. 홍희는 눈치 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성큼성큼 들어오다가 어두운 내 안색을 보곤 멈칫했다.
“뭐야. 뭐야?”
나는 말없이 다가온 홍희의 귀를 붙잡아 올렸다.
“아야앗! 뭐야! 뭔데!”
홍희가 찌릿한 고통에 비명을 토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드센 홍희라도 내 얼굴이 굳어 있으니 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지켜 준다며? 아니 왜 신상명세서가 전국으로 팔려 있지?”
“내가 언제 지켜- 아니, 아아니!”
홍희가 허둥대며 고개를 뒤로 뺐다. 결국 내 손에서도 도망치기에 성공한 홍희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호소했다.
“인터뷰한 애가 하필 네 동기라서 못 막았단 말이야! 그 애가 그렇게 다 말할 줄 몰랐지! 너랑 길마는 게이트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 있으니까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고!”
“비겁한 변명입니다!”
내가 도망치는 홍희를 붙잡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홍희가 꽥 소리 지르며 정희수 뒤로 숨었다.
“인터뷰를 딴 기자 놈의 목을 쳐야지 왜 나에게 뭐라고 해!”
“조선 시대냐 목을 치게.”
“난 아무 잘못 없다고오!”
“저번처럼 막아 주면 됐잖아!”
홍희는 잔뜩 억울한 얼굴로 버럭 외쳤다.
“그때도 간신히 막았거든? 대한민국 언론사가 얼마나 치졸하고 빠르게 움직이는지 몰라? 신당동 게이트 때도 이미 한야 신상은 공공재였어. 길마가 직접 나서서 몰젠 길드원이라고 못 박아 말했으니까 백루찬 무서워서 다들 입 다물었을 뿐이지….”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며 옆에서 치대는 한솔이를 붙잡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게이트가 터져서 예전보다 못하다곤 하지만 CCTV가 도처에 깔리고 전산망도 멀쩡하게 유지되는 나라 중에 손꼽히는 한국이다. 개인 휴대폰 카메라 SNS 등등 조사하면 사실 누군지 특정되는 건 일도 아니란 소리다. 하긴, 그때 홍희가 아니었으면 더 주목을 받았을 터였다.
그래도 완전 한야라고 들키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나? 아니 근데, 굳이 숨길 필요가….
물론 각본이 쫓고 있는 각성자 1순위기도 하고… 여러모로 일이 생기겠지만.
끙. 그래도 차해준이 숨기려고 애를 썼으니까, 나도 동조해 줘야지. 이미 장렬하게 실패했지만 말이다. 원래의 차해준이 알면 따지고 싶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다 급박하게 흘러갔다고…!
홍희가 정희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그래도 A급 각성자로 알려진 게 어디야…. 우리의 계략이 통했다고.”
“계, 계략이요?”
정희수가 눈이 휘둥그레져 되물었다. 홍희가 흑막처럼 씩 웃으며 정희수에게 설명해 줬다. 한야라는 것을 숨기고 각본의 추적을 피하기로 한 점, 등록 각성자로 좀 더 움직이는 데 편하게 만든 점 등등.
정희수는 멋진 계략이라고 박수를 치며 만족해했다. 왜 네가 그런 반응인데 희수야….
어쨌든 A급 각성자로 알려진 거니 굳이 더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야 사칭 소리 듣는 건 좀 기분 나쁘긴 하지만 뭐 어쩌겠어.
일단 이 얘긴 나중에 더 하기로 하고, 나는 홍희에게 명동역 게이트가 어떻게 됐는지를 물었다.
“게이트는 잘 닫혔어. 웨이브로 튀어나온 몬스터들 때문에 재산 피해랑 다친 사람이 좀 있긴 했지만….”
“많이 다쳤어?”
홍희는 조금 고심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내 등을 퍽 때렸다.
“그래도 잘했어! 그 정도면 양호하지! 기죽지 마!”
“쿨럭-.”
등가죽을 내려친 손힘이 너무 세서 절로 기침이 나왔다. 아니 기죽으려고 물어본 게 아닌데, 일부러 때린 거지? 이거?
내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고 홍희가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게이트에서 특별한 아이템 같은 건 안 나왔고, 해독주였나 그것만 몇 개 나왔어. 근데, 각본 측과 몇 길드에서 연락이 따로 왔어.”
“연락? 왜?”
홍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말했다.
“게이트 마력 파장이 생성되면 마력 탐지 시스템에 걸려야 하는데, 최근에 이상하게 웨이브가 일어날 때까지 탐지 시스템에 걸리지 않는 게이트가 늘어나고 있단 말이야. 이번에 열린 게이트도 두 번째 제로 웨이브가 있었던 곳이라서 더욱 세밀하게 마력 스캔 하는 곳이었단 말이지. 근데 그런 곳에, 아무도 모르게 게이트가 열린 거야.”
“…마력 탐지 시스템이 놓친 거 아냐?”
“시스템을 위해 몇 개의 위성이 돌아가고 얼마나 많은 인력이 투입되는데! 무엇보다 S급 제작 각성자들로만 꾸려서 만든 거라고! 제로 웨이브 이후로 더욱 심혈을 기울여서 업데이트가 계속되고 있단 말이야. 더 수상한 건 이번에 악눈 주변을 담당해서 점검하던 각성자도 이상하단 얘기를 했다는 거야.”
마력 탐지 시스템을 통해서 각 지역마다 각성자를 통해 마력 파장을 점검하고 게이트가 터질 곳을 예상한다. 지금 홍희가 말하는 것은 이 세계가 내가 직접적으로 보는 시스템창이 없어도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자세한 건 차해준 기억에도 없었는데, 이런 식이었구나.
이상하다고 얘기했다는 각성자는 각본 소속이었다. 홍희는 그가 게이트 관리팀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각본에서도 연락이 왔었어.”
“…뭐라고 했는데?”
“인위적으로 마력 파장을 숨긴 흔적이 있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수가 있나? 내 의문에 홍희는 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력 조작 스킬을 사용한 거 같다는데, 이러면 좀 아주 많이 귀찮아지긴 하거든. 일일이 발로 뛰어야 하고, 우리 같은 길드들이 각본 뒤치다꺼리도 해 줘야 하고, 공략보다 수색 위주로 팀도 꾸려야 하고, 아주 일거리가 쌓인다니까. 한야는 거기서 뭐 본 거 없어?”
“따로 본 건 없었는데.”
대답하며 같이 악마의 눈동자를 살피러 명동에 갔던 동기들을 떠올렸다. 거기서 진마하 그놈이… 무척이나 수상쩍은 말을 꺼냈었다.
조하영과 김수민을 구하고 나서도 정신없었어서 잊고 있었다. 그다음엔 게이트 때문에 또 정신없었고.
게이트가 딱 터질 때 봤던 놈의 표정은 너무 이상했다. 마치, 게이트가 열릴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런 표정으로 웃었다, 그놈은.
진마하. 말하는 거 들어 보면 흑염룡이 심장에 사는 중증 중이병 놈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것 외엔 조별 과제로 처음 만나서 아는 게 없었다.
시스템창을 불렀는데 칭호도 스킬도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때 처음 봤다. 일반인들도 비각성자라고 뜨는 시스템창인데.
무엇보다 한야를 사칭하면서 내 앞에서 그 이름을 꺼낸 것도 수상쩍고 말이다.
혹시 내가 한야인 것을 알았던 걸까?
“아무튼 조만간 각본이랑 한번 회동은 해야 할 거야…. 한야, 듣고 있어?”
“어, 어.”
홍희가 한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쩍고, 각성자 같은 기운이 잔뜩 느껴졌던 놈이었다. 진마하에 대해 홍희에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과민하게 생각해서 찾아갔더니, 평범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면?
그냥 한야를 사칭하고 다니는 중이병 걸린 관종이라면?
그러기엔 또 과하게 수상쩍은 행동을 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찝찝한 구석이 많았다.
아무래도 일단 한 번 더 진마하를 만나 보고 결정해야겠다. 수상쩍다는 말을 꺼내면 홍희뿐 아니라 각본에서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혹시 , 시스템창에 아무것도 뜨지 않았던 놈이니 다른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알아봐야 한다. 나에겐 세계 멸망을 막아야 하는… 빌어먹을 퀘스트가 있으니까.
그리고 설마…. 그렇게 약해 빠지게 생긴 놈이 설마.
헌터 세계에서 외향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긴 하다. 일단 백루찬이나 송류진… 그리고 차해준을 봐도 그렇긴 해.
일단은 내 몸부터 추스르고 시나리오부터 퀘스트 내용들을 하나씩 다 살펴봐야겠다. 그러려면 이놈들부터 나가야 하는데. 나는 열변을 토하며 정희수와 대화하는 홍희를 힐끔 쳐다봤다.
그때, 내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한솔이가 갑자기 미간을 좁히며 내 팔에 엉겨 붙었다.
“응? 한솔아 왜?”
한솔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묻고 병실 문을 노려봤다. 덕분에 내 시선도 문으로 향했는데,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주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다.
드르륵 열리는 병실 문 사이로 이번엔 백루찬이 등장했다. 그는 손에 피자 박스를 들고 있었다. 어쩐지 죽이는 냄새가 나더라니.
백루찬은 정씨 형제와 홍희를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예쁘게 웃었다.
“다 모여 있었구나.”
“안녕하세요, 마스터.”
정희수가 쭈뼛대며 백루찬에게 인사했다. 희수는 동생도 맡기게 됐는데 왜 이렇게 백루찬을 어색해하냐.
“혀… 형, 잠시만요.”
갑자기 나에게 다가온 정희수가 내 옷깃을 정리해 줬다. 어떻게든 앞섶으로 뭔가를 가리려고 하는 거 같았다.
그런 정희수의 행동에 나는 뒤늦게 떠올리고 말았다. 내 목덜미가 지금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흠칫 놀라 환자복을 여며 봤지만 편하도록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옷은 붙잡지 않으면 늘어졌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
이미 다 봤겠지. 홍희도 봤고, 한솔이까지 본 거겠지. 아오, 왜 이렇게 정신머리가 없냐.
당황한 내 표정을 보고 정희수는 어색하게 마주 웃어 줬다. 그러면서 백루찬을 힐끔 살핀다. 으음, 저 눈은 뭐지….
그때 한솔이가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바짝 붙었다. 그러곤 경계의 눈빛으로 백루찬을 쳐다봤다.
“한솔아?”
목덜미를 가리기 위해 애써서 옷깃을 붙잡고 갑자기 털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하는 한솔이를 불렀다. 한솔이는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인상을 팍 쓰고 경계의 눈빛으로 백루찬을 째려봤다.
정희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병동으로 왔었거든요, 한솔이랑.”
“그랬어?”
백루찬이 피자 박스를 소파 테이블 가운데 펼쳤다. 우왓 때깔 보소. 하…. 고구마 무스와 치즈 크러스트와 새우, 스테이크가 올라간 피자는 예술적으로 보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나에게 찰싹 붙어 있는 한솔이를 달래서 소파에 앉혔다.
한솔이는 불만스럽게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피자를 보고 망설이다가 내가 한 조각을 떼서 쥐여 주자 앙- 하고 물었다.
아휴 귀여워.
슬쩍 웃는데 정희수가 말을 이었다.
“그때, 병실 문을 열었는데… 그… 마스터가…….”
“백루찬? 그래서?”
백루찬이 그래도 나를 버리지 않고 챙겨 줬구나. 나는 피자를 보고 다시 정희수를 봤다. 정희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백루찬 눈치를 보더니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에요.”
“뭐냐, 싱겁게.”
내 맞은편에 앉은 백루찬이 나를 보고 미묘하게 웃었다. 뭐, 왜. 저 표정은 또 뭔데. 뚱하게 바라보자 백루찬이 말했다.
“기억 안 나요?”
“무슨 기억.”
“잊으면 나도 곤란한데.”
“뭔 소리- 잠깐.”
그 미묘하고 이상하게 음흉한 물음에 뭔 소리 하냐고 되물으려는데,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신음 소리. 헉헉대는 숨소리, 달라붙는… 입…. 씨발, 뭐야, 이거 뭐야!
“으아아악!”
내가 괴성을 지르며 입을 턱 가리자 한솔이가 놀라 먹던 피자를 던지고 내 앞을 가리며 서서 백루찬을 째려봤다.
나는 기함했다. 씨발, 세상에!
이 기억 대체 뭔데! 뭔데 이런 19금이 지금 내 머릿속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벌떡 일어나 몸을 뒤로 물렸다. 소파가 내 몸짓에 뒤로 밀려났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게 지금, 정신 나간 송류진이 만든 게 아니라, 내 목덜미가… 내, 내 입술이….
백루찬은 오묘하게 웃었다. 나는 질색하며 양손을 엑스 자로 만들어 내 가슴을 가렸다.
“다행이다. 안 잊었구나. 나만 또 버림받는 줄 알았잖아요.”
팔로 턱을 괴고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얼굴이 불타오를 것 같다. 나는 소파에 있는 쿠션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야이… 변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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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