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거대한 지하 통로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우르릉 흔들렸다. 먼지바람이 잔뜩 일어나는데도 백루찬은 그쪽에 신경 한 톨 쓰지 않았다.
지금 백루찬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재밌었다. 흥분한 차해준을 보는 이 상황이.
백루찬은 싱그럽게 웃었다. 홀딱 젖은 얼굴과는 상반되는 웃음이었다.
“징그럽게 웃고 난리야.”
어느새 정화석을 부수고 게이트 입구로 나온 우반희가 웃는 백루찬을 보고 질색했다. 송류진도 정화석을 부쉈는지 파랗게 빛나던 게이트 입구가 순식간에 붉게 변했다.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단 신호였다.
“끝이네요.”
백루찬은 해준을 둘러업고 게이트를 향해 갔다. 그때, 이제 막 입구에 도착한 송류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내려놔.”
“뭘요?”
“차해준, 내려놓으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백루찬이 어이없다는 듯 받아쳤다.
“이제 말도 막 놓고-.”
백루찬은 제 목을 끌어안은 차해준의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안으며 송류진을 바라봤다. 송류진은 그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없다는 듯 백루찬을 향해 매서운 눈빛으로 한 발 다가왔다. 백루찬은 그에 맞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아직 제정신은 아닌가 봐요.”
“정신 나간 건 너 같은데.”
“평소 태자마마답지 않게 굴고 있는 건 당신인데.”
백루찬의 말에 송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가락을 움찔대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송류진은 확실히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혈관이 터져 붉게 물든 눈. 팔뚝엔 시퍼런 혈관이 도드라져 있었다.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진득한 살기가 주변에 흘렀다. 이렇게 함부로 마력을 흘리고 다니는 놈이 아니었는데. 백루찬은 흥미 돋는 표정으로 송류진을 응시했다.
우반희가 피곤에 찌든 얼굴로 다가와 송류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우반희의 시선이 백루찬 품에 있는 차해준에게 닿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정상이 아닌 건 확실한 거 같고.”
우반희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백루찬에게 던졌다. 주먹만 한 돌덩어리였다. 백루찬은 한 손으로 그것을 낚아챘다.
“정화석을 깨트리니까 안에서 떨어졌어. 해독주다.”
각본이 길드에게 게이트 부산물을 넘기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우반희는 감정 스킬이 있어 감정사를 따로 찾지 않아도 아이템의 정보를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우반희는 떫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필요할 거 같은데, 아니야?”
백루찬은 손에 쥔 해독주를 보다가 우반희를 보고 눈썹을 씰룩였다. 차해준의 상태가 이상한 걸 우반희도 눈치챘다. 자신 아닌 다른 이에겐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백루찬은 코트로 차해준을 덮었다.
“나중에 따로 갚죠.”
“갚을 거면 두 배로.”
“하하, 후려치는 건 여전하시네요.”
“원래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건 두 배야.”
우반희는 이상한 논리를 펼쳤다. 짧게 대화하는 사이 지하 통로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먼지바람에 눈을 가늘게 뜬 백루찬은 젖은 코트에 들어 있던 미니 파우치를 꺼냈다. 곧이어 기다란 우산을 파우치 안에서 꺼내 들었다. 송류진이 움찔하며 백루찬을 막아서려 했지만 우반희가 강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우반희의 말에 송류진이 휙 고개를 돌려 우반희를 쳐다봤다. 마주친 시선이 날카로웠다. 우반희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백루찬은 우산을 활짝 펴 들었다. 순식간에 살짝 붕 뜬 몸이 게이트 입구로 빨려 나갔다. 송류진은 입술을 깨물며 당장 따라가려 했으나, 우반희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멈춰 섰다. 우반희는 송류진의 손에 다른 해독주를 쥐여 주었다.
“너도 정신 차릴 필요가 있어.”
냉정한 말에 송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속에서 울컥하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조급함, 초조함, 불안함, 그리고……. 우반희는 다 안다는 듯 송류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따로 얘기하자. 안에서 있었던 일은.”
“…….”
“류진아.”
“…네, 형.”
송류진이 작게 대답했다. 우반희는 한숨을 쉬고 게이트 입구로 걸어 나갔다. 송류진은 무너지진 지하 통로를 돌아봤다.
안에서 있었던 일…. 무엇을 말해야 할까. 자신이 몬스터의 세뇌에 당해서 차해준을 덮쳤던 것?
미칠 것 같은 욕구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
‘잡아먹어. 네 거야.’
‘S-23.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케이든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를 간지럽힌다. 송류진은 비틀대다가 귀를 틀어막았다. 틀어막아도, 케이든의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환청처럼 머릿속을 잠식했다.
“으흣…… 윽….”
‘차해준을….’
입술을 한없이 씹어 가며 자꾸 치밀어 오르는 것을 삼켰다.
미칠 것 같은 두통이 인다. 웃음소리가 게이트 안을 가득 채운 것처럼 웅웅 울렸다.
가장 소중한 존재인데, 그 존재를 먹어 치우라 한다. 범하고, 쓰러트리고, 내 멋대로 흐트러트리라 말한다. 그것이 맞다고, 그것이 맞는 거라고-.
송류진은 머리를 쥐어뜯듯 움켜쥐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게이트를 바라봤다.
‘애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 하고 싶은 대로. 송류진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
게이트를 벗어나자마자 눈을 못 뜰 정도로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에 백루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거 출동한 모르젠트 길드원들이 다가오려는 기자들과 각본 요원들을 막아섰다.
“길드장님, 저에게 주세요.”
“괜찮아요.”
부슬부슬한 머리를 털며 다가온 공략팀 헌터가 백루찬이 들고 있는 사람을 보고 말했지만 백루찬은 가볍게 웃으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모르젠트 소속 헌터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백루찬은 그를 눈으로 훑었다. 모르젠트 공략 1팀 소속 강영원. A급 물리계 헌터였다. 슬쩍 눈웃음을 쳐 주자 강영원은 쑥스럽다는 듯 코밑을 훔쳤다.
“게이트 사후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보고, 보고 따로 받을 테니 책임지고 상황 대처 해 주세요, 강영원 헌터.”
“아, 넵. 맡겨만 주세요!”
강영원이 순간 화색이 도는 얼굴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백루찬은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고 그를 지나쳤다.
“야 피카츄! 왜 이렇게 늦었어?!”
카리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백루찬을 타박했다.
“안이 좀 복잡하더라고요. 보스 몹 스킬도 거지 같은 게 걸려서 말이죠.”
“뭐? 뭐였는데? 아오, 그냥 내가 들어갈걸!”
“글쎄요. 그럼 제가 꽤 화가 났을 것 같은데….”
“뭐라고?”
카리나가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며 백루찬을 흘겨봤지만 백루찬은 가볍게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카리나가 제대로 설명하고 가라며 버럭 외쳤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안 그래도 환각 스킬에 당해 머리가 좀 아픈 상태였다. 전신의 모든 감각이 주변 상황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미는 기자들이 거슬렸지만 백루찬은 애써 날카롭게 서는 신경 줄을 붙잡으며 공사장 밖으로 향했다.
홍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백루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희는 백루찬이 끌어안고 있는 물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거.”
“희야, 일단 빨리 가자.”
“응, 응 알겠어!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나는 쉽게 끝낼 줄 알고 마음 놓고 있었더니!”
홍희는 잔뜩 투덜거리며 주변에 손짓했다. 모르젠트 길드원들이 백루찬과 홍희 주변을 감싸며 둥글게 섰다. 전파를 방해하는 스킬을 가진 몰젠 소속 헌터 한 명이 홍희의 눈짓에 손을 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번쩍이던 플래시 세례가 잦아들었다.
“이거 왜 이래?”
“꺼졌어!”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는 겁니까! 범용 스킬 사용은 허락 없인 불법입니다!”
“뭔 허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구 허락?”
홍희가 코웃음을 쳤다. 모르젠트 길드원들은 아무도 기자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아우성을 쳐 댔지만 백루찬은 말끔히 무시했다. 홍희는 미리 준비해 둔 밴으로 백루찬을 안내했다.
그들 뒤로 또다시 소음이 커졌다. 우반희와 송류진이 게이트를 벗어나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백루찬에게 몰려왔던 기자들이 이번엔 우반희와 송류진에게 관심을 돌렸다. 우르르 몰려가는 그들을 보며 혀를 차던 홍희가 떨어지려는 코트를 잡아 차해준에게 다시 잘 덮어 주었다.
“하, 설마 했지. 길마랑 한야가 나섰는데 이런 불상사가 생길 줄 전혀 예측도 못 했네. 힐러도 길드에 두고 왔단 말이야.”
백루찬은 홍희의 투덜댐을 들어 주며 차에 올라탔다. 스킬을 이용하면 더 빠르겠지만 안전하게 가려면 차량을 이용하는 게 더 나았다. 게이트에서 몬스터에게 당한 이후로 마력이 불안정하기도 했다. 백루찬은 품에 차해준을 끌어안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마치 사이좋은 연인처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며 홍희가 실실 웃었다.
“차니차니 루차니~ 아주아주 응?”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혼자 음흉한 눈길을 보내는 홍희를 보며 백루찬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반희가 건네준 해독주가 떠올랐다. 백루찬은 주머니에 넣어 뒀던 붉은색 홍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잠시 보다가, 홍희를 불렀다.
“희야.”
“엉?”
백루찬은 해독주를 홍희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아이템.”
“에엑, 겨우 이게 끝?”
“그렇더라고.”
“와 진짜 짜증 나는 게이트네. 몹들도 더럽고.”
“더럽긴 했어. 징그럽고.”
“우엑. 그래도 잘 참았어. 우리 차니 기특해. 아, 그리고 우리 한야는 어땠어?”
“한야?”
“한야는 어떤 활약을 했냐고. 내 눈으로 그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카메라라도 쥐여 줄걸!”
홍희가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 어린 얼굴로 백루찬을 쳐다봤다. 그는 제 품에 안긴 채 바르작대는 몸을 힐끔 내려다봤다.
“여러모로…….”
“여러모로?”
“나쁘지 않았어.”
“뭐야 그게! 더 자세히! 상세히! 빨리!”
“희야 일단 집에 가고 나서. 그리고 그건 희야가 가져.”
백루찬은 말을 돌리며 해독주를 가리켰다.
“에잇, 이딴 거 우리 한야보다 소중하지 않아!”
그러면서도 홍희는 해독주를 품에 잘 챙겨 넣었다.
“다른 말은 나중에 더 듣겠어. 일단 빨리 가자. 우리 한느님 전용 의료진을 대기시켜 놨어.”
홍희의 말에 백루찬은 잠깐 생각했다. 검사는 해 봐야 할 것 같긴 한데… 차해준의 지금 모습을 남에게 보여 주기 싫었다. 하지만 보스 몹이 특수한 놈이라 약물을 워낙 많이 뿌려서 상태 이상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다른 저주가 걸려 있으면 더 위험하니까. 그래도,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봐야 하지 않을까.
백루찬은 끙끙대며 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앓는 소리를 내는 차해준을 바라봤다. 계속 어쩔 줄 몰라 하며 코트 안에서 백루찬의 옷깃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게 느껴졌다.
“일단… 급한 것부터 해결하고.”
“급한 거?”
홍희가 되물었지만 백루찬은 묘하게 웃기만 할 뿐 더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젠트 길드 마크가 달린 차량은 빠르게 도로를 달렸다. 금세 길드 사옥에 도착한 백루찬은 차해준을 그대로 들쳐 안고 차에서 내렸다.
길드 앞에서도 몇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경호원들에게 막혔다.
“저번에 쓰던 개인 병실 비워 놨어.”
홍희의 말에 백루찬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동으로 온 백루찬은 병실로 들어가기 전, 홍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희야, 잠깐 자리 좀 비워 줘.”
“응? 왜?”
“내가 필요하면 부를게.”
홍희가 눈을 껌벅이며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봤지만 백루찬은 씩 웃으며 병실 문을 닫았다. 밖에서 홍희가 뭐야, 뭔데! 나 빼고 뭐 하는 건데! 소리를 질렀다. 저렇게 말해도 자신의 말대로 해 줄 것이다. 희야는 착하니까.
백루찬은 차해준을 덮고 있던 코트를 벗겨 던지고 병실에 놓인 침대에 차해준을 눕혔다. 축 늘어진 몸이 백루찬이 이끄는 대로 쓰러졌다.
“헉… 흐윽….”
귓가까지 붉게 물든 얼굴이 눈을 깜박이면서 백루찬을 바라봤다. 그사이 생리적인 눈물이 맺힌 건지 눈가가 촉촉했다. 덜덜 떠는 팔, 다 풀어진 실험용 의복. 땀에 젖은 머리칼이 들러붙은 이마를 가만히 보다가 백루찬은 침대맡에 걸터앉아 차해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작은 손길이 닿았음에도 차해준이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백루찬의 눈이 기묘한 빛으로 빛났다.
“형.”
백루찬은 허리를 숙여 벌게진 차해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짓은, 형 탓이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가, 축축한 뺨을 쓸어내렸다. 힘겹게 눈을 깜박이던 차해준이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틀었다. 짐짓 괴로운 듯 보였으나, 그 헐떡임이 듣기 좋았다. 백루찬은 환하게 웃으며 차해준의 이마에 입술을 쪽 붙였다가 뗐다.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흣… 윽….”
“나중에 꼭 갚기.”
몹쓸 짓을 하는 건 자신인데도, 은혜를 갚으라는 소리를 떠들며 백루찬은 정말 즐겁다는 얼굴로 웃었다.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손이 차해준의 턱을 붙잡았다. 백루찬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말캉하게 들러붙는 입술을 가볍게 빨고는, 저항 없이 벌어진 잇새로 침범했다.
적막한 병실에 질척한 소음만이 한참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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