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기존쎄들
뼈대만 남은 폐건물의 20층. 공사 도중 게이트가 터지는 바람에 폐건물로 남은 곳, 창살 대도 없이 뻥 뚫린 베란다 앞에서 한 남자가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눈꺼풀이 가만히 닫혀 있다가, 천천히 올라갔다. 긴 속눈썹이 눈 밑에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드러난 눈은 검은색과 푸른색. 푸른색을 띤 눈동자 앞에 수식이 얽혀 들며 기이한 문양을 그리다가 홍채로 빨려들어 갔다.
베이비 펌을 한 것 같은 곱슬머리가 바람에 날려 흐트러졌다. 진마하는 슬며시 웃었다. 웃는 얼굴이었으나, 차해준과 있었을 때와는 달리 차갑고 시린 웃음이었다.
“아쉽게 됐네요.”
진마하의 뒤편에 서 있던 남자가 몸을 움찔했다. 원형의 도형에 불꽃 같은 무늬가 그려진 검은 케이프를 두르고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그는 변명하듯 대꾸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제대로 등급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부족해서-.”
“매번 제일 쉬운 변명만 하니까 들어 주기가 짜증 나잖아요. 우리 친구는 말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크흑, 죄… 죄송합니다.”
남자는 진마하의 말에 지나치게 몸을 웅숭그렸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었다.
진마하가 계획한 일을 어그러트렸다는 죄책감을 참기 힘들었다. 길드 ‘검은 해’의 신, 진마하. 그의 말은 곧 법이자 신의 계시였다. 그런 진마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신의 뜻을 저버렸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남자는 불쑥 무릎을 꿇고 진마하의 앞에 부복했다.
진마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무료한 표정으로 아파트 밖의 하늘을 바라봤다.
“게이트를 열어 주고, 네게 그만한 간섭할 권리를 쥐여 줬으면 열심히 좀 하지…. 이렇게 실망을 시키니까….”
몇 주 동안 신경을 써서 게이트를 열었고, 게이트의 중간 보스 역할을 하던 케이든을 보스로 등급을 조정했다. 그동안 들어갔던 품이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 게이트는 ‘한야’를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수고를 감수했다.
끌어들이는 데 성공은 했지. 어그로를 끌다가 말이지. 하지만 결국 놓쳤고.
진마하는 환하게 웃었다. 유명 아이돌처럼 보일 만한 달콤한 웃음이 진마하의 입가에 맺혔다.
“네게 준 그 하찮은 목숨도 날파리보다 못한 능력도 싹 다 죽여서 게이트 너머 지옥에 처박고 싶어지잖아.”
“용서를…! 부디 용서를…!”
케이프를 둘러쓴 남자가 머리를 땅에 박으며 호소했다. 진마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검은 해에서 교법사로 새운 남자는 말은 잘 들었지만 아주 간단하고 사소한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몬스터를 세뇌해서 광폭화시키는 간단한 일조차 말이다. 진마하의 입술이 비틀렸다.
“웃어.”
“용, 용서… 예?”
“웃으라고.”
진마하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의 목에 검은 실선이 생기며 남자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뒤로 넘어갔다.
풀썩 쓰러지는 몸과 분리된 목이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진마하는 감흥 없는 얼굴로 그것을 보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지기 시작한 초저녁, 노을이 지는 하늘은 아름다웠다. 주변이 온통 공사장이라 시야를 가리는 중장비 기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볼만한 풍경이었다.
반면 지상은 현재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로 인해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길게 울리는 사이렌과 경찰차 소리,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 진마하는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세계를 무너트리기에 딱 적합한 날씨였는데, 아쉽다.
진마하는 싱그럽게 웃었다.
***
헌터X헌터 일간 게시 글
[명동 악눈 근처 2급 게이트 열림]
이번에 현세 그룹 매입한 곳. 폐건물 무너트리고 빌딩 새로 짓는다고 했는데 거기서 게이트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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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젠트랑 다해도 와 있고 각본 쫙 깔림;; 악눈 이후로 여기 3급 이상 게이트 터진 거 처음 아니냐. 땅값 또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댓글
-2급인데 뭔 길드들이 또 총출동하냐. 세금 아깝다.
└ㅁㅅㄹ야 길드 세금으로 운영되는 거 아닌데요.
-와, 나 저기 어제 갔는데.
└운 개좋네.
-헌터 랭커들 떴음. 각본 S급 두 명 출동함. 근데 아직도 게이트 안 닫힘. 백루찬 송류진 우반희도 들어갔다던데 A급인가 웬 헌터 한 명이 먼저 달려들어서 구하려고 간 거라 함.
└스급 몇 명이 들어간겨;; 거기에 꼽사리 낀 이 급은 뭐냐.
└민폐 오진다 구하려고? 이 급 주제에 왜 나대고 난리임. ㅅㅂ 존나 빡치네.
└스급 세 명이 들어갔는데 세 시간 넘었는데 게이트 안 닫혔어요ㅠㅠ 난 진짜 이럴 때 눈물 나 사람들 구하려고… 찡.
-송류진 백루찬 게이트 터지지도 않았는데 튀어나온 몬스터 잡으려고 겁나 뛰어다님. 내 눈으로 봄; 그리고 커피 먹다 습격받아서 오천팔백 원짜리 내 커피 쏟을 뻔했는데 컵 잡고 살려 준 잘생긴 그 오빠 내가 기억한다.
└그 헌터 누군지 궁금.
└명동 걷다가 건물로 피신했는데 창문으로 나도 봤다. 젊은 청년이 사람들 구하면서 몬스터랑 싸우고 애쓰고 있던데 그거 보고 아직 인류애가 남아 있구나 느낌…. 그리고 잘생겼다.
└ㅈㄴ 존잘이었음…. 몬스터 개징그러웠는데 그 남자 얼굴만 기억남.
└윗댓 그 이 급 아님?
└몹 잡는데 잘생 이 지랄; 한국 망했다;
└이미 좆망한 세상에 한국 망했다 이 지랄;
-백루찬 스킬 존나 소름.
-이것도 짜고 치는 쇼다. 게이트가 명동에서 또 열린다는 게 말이 되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데 국회에 있는 놈들은 뭐 하길래 매번 이렇게 난리가 나도 수습한다는 말이 없는지…. 살기 팍팍하다 팍팍해.
└현세 그룹 주주임?
[명동 생존자 인터뷰 나옴+이 급 존잘남 아는사이]
한국대 체교과래. 조별 과제 하다 게이트 터진 거 발견한 거라 함.
댓글
-명문대 존잘남. 그것도 헌터. 지렸다.
-조별 과제가 문제다.
-조별 과제 ㅅㅂ 개어이없어. 말만 들어도 개빡친다.
-이래서 학교를 포기했지.
└학교가 너를 포기한 게 아니고?
-인터뷰한 애 졸라 웃김ㅋㅋㅋㅋㅋ 내 꿈은 각성자래ㅠㅠ 언니 정신 차려.
-교수님한테 보여 주게 영상 달라고 하고 있엌ㅋㅋㅋ 저기요 님 지금 죽다 살았어요ㅠㅠㅠ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제 점수 대신 챙긴대. 시발 존나 야물딱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챙겨야지 그럼. 맞지.
└마지막 브이가 화룡점정.
-에이급 헌터 이름 차해준이래. 이름도 존나 잘생겼네.
-에이급이 2급 들어간 거 뭐냐; 스급 다 들어가게 만들어 놓고 짜증 남. 좀 죽으려면 혼자 뒤지든가. 우리 형을 왜 험한 곳에.
-이 급 헌터 ㅅㅂ 주제 파악하고 적당히 나대야지 사람 구하다 보니까 진짜 영웅이라도 된 줄 아나.
-명문대 존잘남 신당 5동 게이트에서 생존자 챙긴 각성자 아니야?
└거기 생존자 중 한 명이 내 친군데 저 사람이라고 했음. 검까지 존똑이라는데.
└뭐고 이건;
└그거 S급 애기가 각성해서 구한 거 아녔어?
└거기 아직도 안 닫혔잖아;
└그 게이트 졸라 미스테리함. 근데 이 존잘남이 그기서 각성했다는겨?
└각성은 모르고.
└검증되지 않은 얘기는 자제 좀.
카리나는 한쪽 다리를 분주히 떨며 게이트를 노려봤다. 이것들이 게이트에 들어간 지 벌써 세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나오질 않고 있었다.
그사이 기자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고, 모르젠트 길드에서는 들어갈지 말지 각본과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각본이 틀어막은 입구를 어떻게 뚫었는지, 한 기자가 카리나에게 다급하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다해 길드장!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S급 헌터 세 명이 들어갔다는 얘기가 있던데! 같이 들어간 A급 헌터는 누구입니까! 한마디만 해 주세요!”
“어허, 진짜 좀. 여러분 여기 앞에 2급 게이트예요!”
뒤따라온 각본 소속 헌터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기자의 앞을 막아섰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카리나는 입김으로 앞머리를 후 불어 넘기다가, 씩 웃었다.
“스급 세 명이 들어간 건 맞는데, 위험한 상황은 전혀 아니에요.”
“A급 헌터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그놈…이 아니라 그 헌터는 모르젠트 소속으로 알고 있고요. 근데 한마디만 해 달라며. 한마디 끝났는데 더 대답해야 하나?”
카리나가 고개를 위협적으로 꺾으며 위압감을 조성하자 기자가 바짝 굳었다. 그사이 각본 요원 중 한 명이 기자를 끌고 바리케이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언니 왜 이렇게 초조해해?”
“몰라. 그냥 짜증 나. 내가 들어갔으면 이 정도 시간도 안 걸렸을 텐데. 이것들이 진짜 안에서 뭐 하는 거야?”
카리나의 옆에 붙어 선 후드 티를 입은 소녀, 부길마 유하늘이 풍선껌을 후 불었다가 터트렸다.
“같이 들어간 A급 헌터 때문이야? 그때 신당동에서 봤던 그 남자?”
카리나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맞다는 표정이었다. 표정만으로도 대강 알아들은 유하늘은 방실방실 웃었다.
“에에이 언니가 도와줬으면서.”
“궁금해서 그랬지.”
카리나는 게이트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때 느낀 마력, 진짜 그놈 것인지.”
“우리 신경 안 쓰기로 했잖아. 사이비 놈.”
유하늘이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카리나는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신경 안 쓰기로 했는데, 쓰여. 자꾸.”
무언가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놈. 신당동 게이트에서 피 철철 흘리며 사람들을 구했던 그놈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놈은 A급이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게이트에 들어간 걸까. 그리고 그 기다란 검. 언뜻 봤지만 익숙했던 그놈의 무기가 떠올랐다. 그거 분명 어디서 많이 봤던 거였는데. 어디서 봤더라.
인상을 잔뜩 구기자 유하늘이 카리나의 팔에 매달려 얼굴을 부볐다.
“지금 배고프지?”
“어? 엉.”
“그래서 그래, 언니.”
유하늘의 말에 카리나가 잠깐 인상을 풀었다가 다시 찡그렸다. 어쩐지 예민해지더라.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이러고 있으니 그랬다. 생각하니까 더 화가 난다. S급 세 명이서 고작 2급 게이트를 질질 끌고 있고 말이야!
그냥 내가 들어가서 뒤집고 보스 잡고 나와 버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움찔하는 사이, 게이트의 마력 파장이 무섭게 요동 쳤다.
공사장 인근에 있던 모두의 이목이 게이트로 쏠렸다.
호출기가 삑삑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서 울리기 시작했다. 마력 탐지 시스템이 게이트 웨이브를 예고하는 소리였다. 카리나가 표정을 굳히고 바로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 준비했다.
그러나 준비는 필요 없었다. 마력 파장이 한차례 더 요동치더니, 검은 우산이 툭 튀어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활짝 편 우산을 든 백루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루찬은 누군가를 안아 들고 있었는데, 코트로 덮어 모습을 가려 놔 누구인지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웠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플래시를 터트렸다. 거참, 사진 그만 찍어요! 각본 헌터가 소리를 빽 질렀지만 기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벌써 대문짝만 하게 속보 붙은 기사가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백루찬 씨! 게이트 안은 어땠습니까!”
“2급 게이트였다고 하는데 S급 세 명이서 들어간 이유는 뭔가요!”
“게이트 발견이 늦은 이유 좀 알려 주세요!”
“몬스터 웨이브로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책임을 지실 건가요!”
인터뷰를 요청하기 위해 목청 터져라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백루찬은 활짝 웃었다.
“여기도 엉망진창이네.”
바리케이드를 밀치고 모르젠트 길드원들이 길을 트고 있었다. 멀리서 홍희가 손을 흔들었다.
공사 패널을 넘어설 만큼 가득 모인 헌터와 사람들을 보면서, 백루찬은 제 품에 안긴 이를 다시 추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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