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아니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다. 시스템은 오류라고 말했으니까.
이곳이 2+급 게이트라는 건 말도 안 된다.
S급 정도면 웬만한 독과 약으로는 어림도 없다. 나는 S++급이고 백루찬도 S+급이다. 특수 스킬이라거나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거다. 그때 쓰러지기 전 나는 분명 사방을 뒤덮는 마력을 느꼈었다.
어쩐지, 몸이 너무 무겁고 피곤하더라. 이전 세계에서 꿈꿀 때마다 나는 피로해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꿈을 꿨었다. 상황이 그것과 똑 닮아 있었다.
마력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도, 스킬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다.
그럼, 백루찬의 헛소리는 대체 뭐였지?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옷은 어디 갔는지, 내 몸엔 환자복이 입혀져 있었다. 끈으로 연결된 소매를 보니 구속하기 쉽게 만든 옷 같은데, 소름이 돋는다. 옆구리도 다 트여 있고, 끈으로 묶어져 있다. 이거 그냥 쫙 뜯으면 다 벗겨지는 거 아니냐….
입힌 새끼 변태인가.
나는 일단 우반희와 백루찬이 갇혀 있는 원통 수조 앞으로 갔다. 비틀비틀 걸어가면서 손가락을 움직여 마력을 움직였다. 기름에 꽉 막힌 혈관에 간신히 피를 통하게 하는 것처럼, 마력은 연약하게 움직였다.
그래도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다. 그림자 속에서 한야를 꺼냈다.
다행히 한야를 빼앗기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한야에 검기를 둘러 수조를 내리그었다.
유리인지 뭔지 모를 수조가 쪼개지며 물 같은 액체가 떠밀려 나오고, 백루찬과 우반희가 쓰러졌다. 나는 놈들의 코와 입을 막은 호흡기를 떼어 내고 놈들을 밑으로 끌어 내렸다. 둘의 상태를 살펴봤지만, 겉에는 이상이 없었다.
“백루찬! 정신 차려! 우반희!”
흔들어도 미동도 없다. 이 시키들 지금 이 난장판에 기절이 웬 말이냐! 얼른 일어나란 말이야!
나는 감정을 담아 백루찬과 우반희의 뺨을 찰싹찰싹 치면서 놈들을 깨웠다.
아, 안 되겠다. 내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지만 좀 더 힘을 실어야겠다. 미안 애들아, 내가 다른 사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내가 손바닥을 치켜들었을 때, 백루찬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덩달아 나도 움찔하며 멈췄다. 정신을 아예 놓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다행이다.
난 화색이 돈 표정으로 놈들을 흔들어 깨웠다.
“윽….”
그러나 작은 신음을 내뱉은 백루찬은, 한번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일으켜 앉힌 몸이 스륵 옆으로 쓰러진다. 우반희가 머리를 부여잡더니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황급히 우반희를 부축하며 말했다.
“괜찮아? 정신 좀 들어?”
그러나 우반희도 눈을 뜨지 못하고 다시 쓰러졌다.
하 진짜, 이놈들아, 제발…!
우반희와 백루찬을 챙기면서, 나는 송류진을 찾았다. 원통 수조를 하나하나 살폈지만 송류진은 보이지 않았다.
송류진은 어디 있는 거지? 불안감과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얼른, 게이트를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때였다.
“이런, 깨 버렸잖아.”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나는 목석처럼 굳고 말았다. 목덜미를 타고 작게 소름이 돋았다. 가슴이 선득하다.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벽면에 늘어선 수조 사이의 입구로 보이는 곳에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하게 정리된 검은 머리칼. 그리고 빛을 반사하는 안경.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는 길거리에서 한 번쯤 만나 봤을 법한 평범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미치광이 박사 ‘케이든’과 조우했습니다!]
때마침 시스템창이 남자의 이름을 알려 줬다.
케이든은 입꼬리를 찢어 씩 웃었다. 묘하게 오싹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케이든은 둥근 안경을 쓱 올리더니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다가왔다.
놈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흔들거렸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시스템창이 빨갛게 뜨며 화살표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작은 창이 붉게 깜박인다.
[정화석]
…미친, 보스가 아예 가지고 있으면 어떡하라고.
[케이든이 ‘차해준’이 깨어난 것을 아쉽게 여기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오류로 인해 게이트 보스, 케이든의 등급이 재조정되었습니다.
A-> ???]
그리고 다시 뜬 시스템창에, 절로 입 안이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등급 재조정…. 이래서 오류라고 한 건가. 물음표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 S++? 설마 나보다 더 높을까?
아우라도 없는 평범한 남자가 느긋하게 다가오는데, 나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짓누르는 압박감. 진하게 느껴지는 마력.
적어도 동급. 아니면 더 높다.
…아니 이런 오류를 해결하라고 던져 놓냐. 어떻게 하라고, X발….
케이든이 느긋하게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내가 놈에게 한야를 겨눴기 때문이다. 칼끝이 시퍼렇게 번쩍였다. 케이든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검을 바라봤다.
“오- 이거, 드래곤 본으로 만든 검이구나. 신기하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던데, 역시 강한 인간은 다른가 봐. 한 방을 숨기고 있고.”
칼날에 손가락을 댄 놈이 그것을 옆으로 밀었다. 날카로운 끝이 상처를 냈을 텐데, 놈의 손은 하얗기만 할 뿐 갈라지지도 않았다.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팔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미약하게 퍼지는 마력을 붙잡아 모아 봤지만, 자꾸 흩어졌다.
케이든이 관찰자의 눈으로 나를 살펴봤다.
“내 특급 약물에 절여졌는데도, 아무렇지 않나 보네.”
“…뭐?”
“여러 가지 실험을 좀 해 봤거든. 몸뚱이가 좀 튼튼해 보여서. 이것저것.”
“…….”
“잘 버티던데, 차해준?”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저놈은.
케이든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굉장히 흥미롭다는 눈초리가 나를 훑는다. 시선이 마치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인 실험체를 보는 것 같다.
좀 더 다가오려는 놈을 나는 한야를 휘둘러 막았다. 미친놈, 미치광이라더니, 사람에게 뭔 짓을 한 거냐.
송류진은 왜 안 보이는 걸까. 이놈이 혹시… 무슨 짓을 한 걸까.
내가 긴장한 눈으로 놈을 보자, 케이든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왜 이렇게 초조해할까? 근육 이완제도 같이 넣어서 흡입시켰는데, 약발이 안 도는 건가? 하긴, 차해준 너는 치사량을 투여해도 잘 안 통하더라고.”
너무 태연하게 지껄이는 말에 기가 막혔다.
“…뭔 짓을 한 거야.”
이를 꽉 물며 말하자 케이든은 내 말을 무시하고 내 주위를 빙 돌며 나를 빤히 관찰했다.
무방비한 모습에, 쉽게 베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검을 쥔 손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애써서 한야를 꽉 쥐고 놈에게 휘둘렀다. 약하게 검기가 일며 날아가는데 케이든은 목만 까닥하며 손쉽게 피해 버렸다.
“와오, 마력을 쓸 수 있다니, 굉장해. 마력 분해 시약도 흡입시켰는데. 역시 흡입기보단 정맥에 놨어야 했던 걸까?”
케이든이 눈을 희번뜩하게 치켜뜨며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놈은 내 뒤에 쓰러진 백루찬과 우반희를 보더니 한야를 겨눈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마, 개새끼야.”
주춤거리며 케이든의 앞을 막아섰다. 케이든은 조금 짜증 난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반항은 적당히 하는 게 좋아. 너무- 귀찮아서.”
순간이었다. 케이든이 몸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더니, 내 목을 움켜잡고 들어 올렸다.
“큭-!”
점점 지면에서 떨어지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목을 움켜쥔 놈의 손을 붙잡았다. 핏줄이 단단히 선 손은 긁어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친, 무슨 힘이…!
나를 보는 케이든의 눈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진짜 죽여 버리고 싶단 말이야.”
“컥…!”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목을 옥죄는 손의 힘이 더 세지기 시작했다. 몸을 비틀며 어떻게든 마력을 모아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케이든이 쿡쿡-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광기에 찬 눈이 번뜩이며 나를 바라봤다.
“죽일까? 죽일까? 죽고 싶어? 아냐. 내가 쓴 약물이 너무 아까워. 너에게 들어간 게 몇 개인지 잊어버릴 정도라고. 응? 차해준. 원하는 반응을 보여 줘야지. 왜 아직도.”
숨죽이듯 내뱉은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내 목을 움켜쥔 손등에 검게 핏줄이 서고, 케이든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빠르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정신이 멀쩡하지? 큭-큭. 정말 모범적인 실험체야. 내 흥미를 자극하잖아?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고 싶단 말이야. 이대로 죽여? 아냐, 아냐!”
점점 몸에서 힘이 빠진다. 놈의 팔을 뗄 수가 없다. 나는 멍해지는 머리와 가물거리는 시야에 버티려 애썼다. 미친놈처럼 중얼거린 케이든이 말을 멈추고 시선을 맞추더니 느리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번뜩이는 눈에, 올라간 입꼬리가 완벽한 미친놈을 보는 것 같다.
케이든은 물건을 던지듯 가볍게 나를 던졌다. 책상에 등을 부딪치며 떨어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통이 엄습했다.
내 위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시약병들이 툭툭 떨어져 깨졌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고개를 땅에 박고 헛구역질하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미친, 보스라 이거지. 이렇게 무력하게 당한 게 처음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저런, 저런 새끼를 어떻게 없애냐고…! 뭐라도 줘야 할 거 아냐, 개 같은 시스템아! 나타나!
내가 간절히 속으로 외쳤지만, 눈앞에 시스템창은 뜨지 않았다. 절망적이다. 아니, 이거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래, 죽이면 안 되지. 아직도 할 실험은 많이 남았는걸. 차해준은 굉장한 실험체라고, 저놈에게 할 수 있는 504가지의 실험을 잊지 마, 케이든. 그래,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아-! 맞아!”
케이든이 눈알을 바쁘게 움직이며 광기에 차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입구로 가더니 버튼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엘리베이터 문처럼 보이는 철문 하나가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자욱하게 빠지는 연기는 냉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연기 사이, 검은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송류진…!”
얼음 결정이 덕지덕지 붙은 피부로 검은색 혈관이 도드라졌다. 얼어붙은 것같이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던 송류진이, 내 목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번쩍 떴다.
“…미친.”
주춤대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새 놓쳤던 한야가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 내 손에 잡혔다.
“야, 송류진! 류진아!”
초점 없는 눈이 멍하게 앞을 응시한다.
재차 송류진을 불렀지만, 송류진은 손가락을 움찔 떨 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케이든을 노려봤다.
“미친 정신병자 새끼가….”
케이든은 아주 기대가 된다는 듯 두 손을 맞비비며 송류진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놈이 흥분에 차 깊게 숨을 들이켜고 크게 내뱉었다.
“소개하지. 실험체 S-23. 나의 새로운 귀염둥이야.”
케이든은 황홀하다는 눈으로 웃었다.
“아, 아쉽다고 생각하지 마, 차해준. 504가지 실험이 끝나면, 너에게 가장 앞 번호를 줄 테니까.”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오른다.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놈이었다!
차게 식은 내 눈이 송류진의 상태를 훑었다. 송류진은 멍하게 서 있다가, 나를 인식하더니, 고개를 느리게 옆으로 꺾었다.
케이든이 열기가 담긴 목소리로 신호탄을 날렸다.
“제압해.”
그 말에, 송류진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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