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진마하
오랜만에 돌아온 내 집. 뭐 깊게 따지자면 ‘차해준’의 집이었지만 나는 너무 반가워 미칠 것 같았다.
역시 집은 집이구나. 모노톤 일색의 집이 이렇게 따듯하게 보일 줄이야. 그리고 드디어 혼자 있게 됐다.
나는 시원하게 샤워부터 하고, 물을 마시려 냉장고를 열려다가 멈칫했다.
아… 분명 식자재가 있었는데 말이지. 벌벌 떨면서 조심히 열자, 다행히 썩은 내는 안 났지만, 기한이 오래된 것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이 정도라서 다행이다. 서둘러 다 치우고 물을 마신 다음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이제야 좀 쉬는 기분이 든다. 역시 사람은 집에 있어야 해. 혼자가 최고야.
사실 지금 당장 시나리오를 읽고 싶었지만, 왠지 좀 망설여졌다.
극강의 고통을 경험하고 오는 사람의 두려움…… 뭐 그런 거랄까. 이미 과하게 아팠던 전적이 있다 보니 자연적으로 좀 꺼리게 된다.
상태 이상이 몰고 올 고통이 떠올라서 짜증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불합리해. 진짜 치트 키를 줬으면 좀 제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또 쓰면 진짜 한 달 내내 빌빌 기어 다니게 되는 거다. 한 달 내내 아픈 건 좀 그렇지 않나.
그 생각을 하다가 시스템을 불러 퀘스트창을 켰다.
[시간 내로 일정 이상 스토리를 진행하지 못할 시, 당신의 수명이 단축됩니다.]
[각성자 차해준의 현재 남은 수명: 355일]
삼 일이 줄어들어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한 건데 말이지.
나는 다시 악몽의 참견 게이트의 내용도 확인했지만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데빌루데스는 관심을 끊지 않고 있었다. 지독한 새끼… 징그럽다.
[‘종전의 기록’ 현재 페이지 수: 20/451
※!주의!※: 종전의 기록에 걸린 저주가 스킬 시전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현재 초전 박살 게이트의 스토리 진행률: 6%]
스토리 진행률도 변함이 없었다. 나름 메인 캐릭터인 백루찬과 붙어 있긴 했다만… 그냥 그거로는 뭔가가 변하는 게 아닌가 보다.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각인 주의: 대상의 각인 상대에게 가지는 감정이 컨트롤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컨트롤 비정상 확률: 50%]
[각인 대상: 백루찬, 정한솔]
각인 대상에 둘의 이름이 보인다. 분명 저번에 뜬 시스템창에선 각인하고, 죽을 위기에서 구하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근데 대체 언제 위험에 빠지냐고, 그 백루찬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온다. 큰 이벤트가 있나.
게이트에서 백루찬의 번개가 삐끗해 다치기라도 하나.
그리고 정희수와 정한솔에 얽힌 문제는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
메인 캐릭터가 둘 중에 한 명인 건 분명한 거 같은데 말이다. 한솔이는… 이미 구했고. 혹시 정희수를 구해야 하나?
고민에 고민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끔벅 잠이 오기 시작했다.
일단 오늘 시나리오를 보는 건 뒤로 미뤄야겠다. 하루만이라도 말이다.
미룬다고 큰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설마.
하, 그만 아프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나는 오랜만에 45도로 꺾어진 학교의 비탈길을 올랐다. 아니 이건 등산이지.
저번엔 상태 이상 때문에 골골댔지만, 오늘은 가뿐했다.
역시 S++급은 좋아. 학생들이 헉헉대면서 힘겹게 올라와 가방을 집어 던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혼자 히죽 웃었다.
등에 멘 전공 책들이 하나도 무겁지가 않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그동안 출석을 못 했던 건 홍희가 힘을 써 줬다고 들었다.
한야의 교주라면 이런 일에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거라며 악당처럼 웃던 홍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내 이름을 쓰긴 했지만, S++급 각성자 한야가 아닌 A급 각성자로 등록을 마치고 모르젠트 소속이 되었다.
한야가 아닌 A급 각성자 차해준이 말이다.
홍희 말로는 말만 소속이라는데… 음흉하게 웃는 꼴이 영 미덥지 못하다.
그러면서 모르젠트 길드원 정보에 내 정보를 입력했는데, 나는 홍희가 설정한 내 클래스 네임을 보고 사레에 들려 기침을 엄청 하고 말았다.
인마, 아무리 검을 쓴다지만 검귀가 뭐냐 검귀가….
다른 사람들은 이제 이걸로 나를 칭할 텐데 어두컴컴한 인상에 검귀라고 하면…. 나는 좀 웃길 거 같은데.
무협지도 아니고. 그리고 성의 없게 정한 거 너무 티 나잖아. 아무리 가짜라도 엉? 멋있는 게 많을 텐데.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주변을 살피면서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2급 게이트 사건이 아직도 헌헌 베스트 게시 글 상위에 있다.
혹시나 뒤늦게 풀린 사진에 내 얼굴이 있을까 봐 조금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다들 아무렇지 않게 나를 지나쳐 가는 것을 보니 홍희가 잘 처리해 주긴 한 거 같았다.
힘써서 기사를 엄청나게 내리고 사진도 다 샀다고 그랬지….
그거 제 방에 모아 둔다는 헛소리를 들은 거 같지만. 음, 나는 더 생각 안 하기로 했다.
어느새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안이 시끌벅적한 걸 보니 수강 신청한 학생들이 꽤 많은 거 같았다.
나는 수업을 확인했다.
<게이트 생성 과정과 마력의 이해>
오우 X발. 보자마자 욕 나오는 수업 명칭이다.
이거 교양이던데, 차해준은 무슨 생각으로 이 수업을 신청한 거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강의실을 보다 들어갔다.
“…….”
내가 들어가자 웅성거림이 작아진다. 나를 힐끔 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잠시 그러다가 다시 저들끼리 소곤거리거나 떠들기 시작했다.
익숙한 상황이다. 강의실의 존재감 없는 공기가 되는 과정 중의 하나지.
아싸인 차해준은 말 거는 친구도 없었으니까……. 전혀 슬프지 않다. 안 울어. 안 운다고.
그 생각을 하며 나는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들고 온 강의 관련 책을 꺼내 놓고 멀뚱히 앞을 보면서 교수님을 기다렸다.
아, 이어팟이라도 가지고 올걸 그랬나. 하하…. 어색해 뒤질 거 같잖아.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데 저 무리들 사이로 내가 들어온 것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진다.
콕콕 찌르는 듯한 감각은 힐끔대는 시선이다.
저번에도 이렇게 대놓고 나를 쳐다봤었나. 머리를 굴려 봤지만 정말 완전히 무시당했던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책상 위로 아이스커피 하나가 툭 올려졌다.
이거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저번에 전공 수업에서 봤던 남학생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마셔.”
벙쪄 있다 나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 나갔다.
“…오다 주웠냐?”
“…내, 내 돈으로 샀다!”
남학생은 벌게진 얼굴로 버럭 소리 질렀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미안한데 나…. 네 이름도 몰라.
같은 과 학생인 거 같은데… 갑자기 이렇게 커피를 사 주다니요? 너 천사니? 등에 날개 숨기고 있어?
나는 서서히 차오르는 감격에 눈물이 주르륵- 은 아니고 감격에 겨워 남학생을 보면서 웃었다.
“와, 진짜 고마워. 이런 것도 사 주고.”
“윽… 그, 사다 보니까… 남아서….”
“아, 그랬구나! 진짜 고맙다, 잘 마실게. 안 그래도 목말랐거든.”
남학생이 더듬대며 말한 것을 바로 이해했다.
뭐가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친절을 나에게 베풀어 줘서 고맙다.
이젠 아예 얼굴이 터질 것같이 붉어진 친구가-먹을 거 사 주면 다 친구, 다 알지- 주춤대며 좀 떨어진 곳으로 가 앉는다.
아니 커피도 사 주는 사이인데 옆에 앉지! 난 아쉬운 표정으로 남학생을 보다가 빨대를 물어 쪽쪽 커피를 마셨다.
캬, 아싸 차해준이 과 친구에게 커피를 얻어먹는 날이 있다니. 이건 기념해야 한다. 나는 연신 실실대며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활발하고 밝은 인상을 가진 교수님은 출석을 한번 부르시곤 바로 수업을 시작하셨다.
게이트 생성과 각성자… 가 아니라 생성 과정과 마력의 이해….
당연하게도 한마디 하실 때마다 한 명씩 고개가 떨궈진다. …너희 이거 왜 신청했냐, 대체.
수업이 중간 정도 진행되었을 때, 교수님은 안 그런 척하면서 졸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 웃으셨다.
그러고는 폭탄선언을 하셨다!
“이번 중간고사는 과제로 대체 됩니다. 특별히 조별로 나눠서, 실제 게이트가 생긴 곳에 가 보고, 생성 과정과 마력 파장이 어떻게 퍼지는지 이해해 보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여러분, 이제 졸지 마시고 조를 짜세요!”
“…누가 이 강의 꿀 빤댔냐.”
“작년까지 과제도 없었다던데.”
몇몇 학생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거 꿀 강의였냐.
근데 이번 연도는 왜 갑자기 바뀐 건데.
조별 과제. 말만 들어도 끔찍한 그 단어에 넋이 나간 몇 학생들이 주춤댄다.
“여러분의 의견을 통해, 조는 원하는 친구들과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를 짜고, 조교를 통해 몇 조에 누가 있는지 말해 주세요!”
호탕한 웃음을 뿌리는 교수님이 마지막 말을 마치고 나가셨다. 학생들은 다들 멍청하게 그 뒷모습을 보다 한숨을 내쉬곤 저들끼리 조를 짜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눈치를 살폈다. 누구… 누가 나를 끼워 줄래…. 불쌍한 나를…….
“병길이랑 지미랑… 이렇게만 해도 될 듯?”
“야, 나도 끼워 줘!”
하나둘씩 조가 완성되어 가는데, 나는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주변을 살폈다.
아니, 뭔가…. 끼어들면 안 될 거 같다…. 말을 거는 애도 없다….
아까 커피를 준 남학생은 나를 힐끔 봤으면서 자신을 부르는 다른 조로 냉큼 갔다.
뭐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주변이 말려서 못 들었다.
내가 그렇게 어둠의 자식 같니……. 차해준 이 아싸 새끼야. 본래의 나는 아싸 아니었다고. 하, 억울하다 진짜.
나는 교수님이 설명해 준 과제 내용을 생각했다.
게이트 생성된 곳에 직접 가고, 현장을 방문까지 하고, 리포트를 쓰고 마력 파장이 어떻게 퍼졌는지 써라….
이건 각성자들은 들을 필요 없는 수업이다. 그러니 교양이겠지만….
아무래도 혼자 하거나 아니면 재껴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애들도 몇 명 있는 거 같았다.
나는 이 수업이 학점이 몇 점이었는지 떠올리려 애쓰다가 관뒀다.
하,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나에게 다가오는 한 남학생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쪽으로 걸어오는 남학생을 쳐다봤다.
“…….”
눈썹이 움찔 떨렸다. 남학생은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었고,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가졌다. 살짝 처진 눈꼬리인데, 어째 안경을 썼음에도 인상이 묘하게 날카롭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한 남학생은 내 옆자리 의자를 빼고는 털썩 앉았다.
“혹시, 같이할 사람 있어?”
잘생긴 얼굴.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모른다.
나를 쳐다보는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웃는 얼굴이 참 예술인 놈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표정 없이 남학생을 쳐다봤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오묘하다.
그리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해. 훅 느껴지는… 마력 기운 같은 거.
“…아니.”
“그럼 나랑 같이할래?”
나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며 슬쩍 웃었다.
“그래.”
아, 이 새끼, 각성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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