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티브이는 계속 같은 얘기만 반복했다. 영상도 풀린 게 딱 하나밖에 없는지 각도만 다른 아까 그 영상이었다.
나는 기력 없이 양옆에 미소년과 미청년을 끼고 늘어져 있었다.
안 그래도 우반희를 만나고 너무 힘들었어서 기력이 딸렸다. 배도 고프고.
딱 달라붙어 있던 백루찬이 목덜미에 머리카락을 비비다가, 턱을 어깨에 올려 기대고는 말했다.
“한솔이 우리 길드로 오기로 했어요.”
“뉴스 봐서 알아. 근데 실제 보호자랑은 합의된 사항 맞냐?”
“합의 안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해 줘야죠. 지장도 찍었어요, 이미.”
“…….”
웃는 얼굴은 참 상큼했다. 나는 잠깐 거액을 요구했다던 한솔이의 이모님이 걱정스러워졌다.
그러게 왜 백루찬을 상대로 욕심을 부리셨어요….
“희수는 뭐래?”
“정희수야 뭐… 쉽죠.”
씨익 웃는 얼굴이 참으로 예쁜 빌런 같았다. 못된 놈.
우리 희수… 순진하고 은근히 맹하고 쬐끔 모자라 보이지만 대학생에 나랑 같은 한국대에 다니면 뭐 해.
홍희가 입 터는 순간 홀라당 넘어왔겠지. 상황이 뻔히 그려져서 신음을 삼켰다. 끄응… 남 같지 않단 말이야 참.
백루찬은 앞으로 한솔이가 어떻게 배우고 성장할지에 대해 말했다.
덧붙여서 말하는 이유는, 미성년 각성자는 따로 각성자들만 있는 학교로 가야 한단다.
거기서 남은 중고등 교육을 이수하고 각성자 기초 이론에 대해선 모르젠트에서 배우기로 정희수와도 얘기했다고 했다.
“각성자 기초 이론은 또 뭐야.”
“…등록 센터에서 더 말해 주지 않았어요?”
아… 뭐라 뭐라 더 얘기하시던 게 그 얘기였냐. 너무 길어서 나도 모르게 뇌가 스킵을 했나 보다.
“미성년이 각성할 경우 정말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비각성자와 함께 수업 못 들어요. 그에 관련한 법안 및 기타 등등을 배우는 게 각성자 기초 이론 수업이에요.”
일반인과 함께 못 논다니…. 송류진은 잘만 일반 학교 다니지 않았나.
비각성자로 자신을 숨기고 다녔던 차해준과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
그럼 송류진이 특이 케이스였나 보다. 나는 한솔이의 얼굴을 붙잡고 말했다.
“우리 한솔이, 민형이 보고 싶어서 어떡해?”
“우응, …벼… 별루… 꼬, 꼭 만나야만 치, 친구가 아니, 니까….”
한솔이가 괜찮다는 듯, 하지만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떠듬떠듬 말했다. 나는 순간 감격하며 대견하다는 얼굴로 한솔이를 바라봤다.
처음엔 우응, 같은 대답밖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빨리 좋아지고 있다니 이게 다, 정희수랑 백루찬이 신경 써 줘서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한솔이의 뺨을 잡아당겼다.
“거짓말. 친구 보고 싶잖아.”
“우으으-.”
한솔이가 내 팔을 붙잡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그래, 보고 싶다고? 알았어, 인마. 형아가 언제 한번 자리 마련해 보지. 민형이 잘 나았나 몰라.
백루찬이 그런 나를 보고 묘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리더니 웃었다.
“형은 참 이런 부분에선 눈치가 없어…. 아무튼, 각성자 기초 이론 수업은 형도 들어야 해요.”
“엥? 내가 왜?”
“원래 기초 이론 같은 수업은 각본이 맡아서 하는데, 이번엔 특별히 모르젠트에서 진행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형도 들어요. 형도 알 건 알아야죠.”
“…나 각성한 지 오 년 넘었는데.”
백루찬은 빙긋 웃었다.
“근데 헌터 몸값이 얼마인지도 몰라요?”
“…….”
이게 자꾸 그걸로 우려먹네. 백루찬이 말을 이었다.
“각본에서 진행하면 각본이 자기들네로 영입하려고 갖은 지랄- 을 꾸밀 테니까, 특별히 나선 거다- 라고 홍희가 전해 달라던데요?”
“…엉.”
“그러니까 형도 꼭 들어요. 형도 있어야 한솔이가 더 안심하고 배울 수 있을 거예요. S급은 육체 능력도 비각성자와 차이가 많이 나니까, 형도 마찬가지고, 배워야 돼요.”
그래, 알았다 인마…. 이런저런 이유 그만 갖다 대라.
그러면서 백루찬은 내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각본이 아직도 형 노리고 있는 거 알죠? 그거 잘 막아 줄 테니까, 얌전히 붙어 있어요. 알겠죠?”
“…오냐.”
일단 넌 떨어져라. 입김에 소름 돋아서 움찔 떠는 내가 재밌는지 백루찬이 쿡쿡 웃었다.
귀에 대고 웃지 말라고 이놈아! 간지럽잖아!
***
백루찬이 또 피자를 시켜 줬다. 이번엔 소고기가 깔린 피자였는데 끝이 치즈크러스트로 되어 있어 미친 맛이었다.
“한솔이가 피자도 좋아하긴 하는데, 다음엔 더 영양가 있는 걸로 시켜 줘라. 애 키 커야지.”
내 말에 백루찬은 잠시 나를 빤히 보더니, 싱긋 웃으며 턱을 괴었다.
“형이 좋아해서 시켰다고는 생각도 안 했나 봐요.”
“엉?”
뭐라고? 먹느라 제대로 못 들었다. 입에 든 걸 우걱우걱 씹으며 새 피자 조각을 꺼내 들고, 백루찬을 바라보자 백루찬은 싱긋 웃었다.
“아니요. 드세요.”
싱겁긴.
피자를 아주 맛있게 먹고는 배를 두들기며 소파에 앉아 티브이 채널을 돌려보았다. 아주 한량 같고 좋아. 흠.
한솔이는 졸린지 내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끔벅끔벅 졸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잘 잠들 수 있도록 등을 다독여 주거나 어깨를 쓸어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곤히 잠든 한솔이가 고롱고롱 소리를 낸다.
아휴, 누구 아들내미길래 이렇게 귀엽냐. 응. 찰떡 같은 뺨을 꾹꾹 눌러 주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나는 간신히 욕망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개를 허벅지 대신 놔주고, 백루찬이 가져다준 담요를 덮어 주었다.
내가 기절하고 깨어난 곳은 모르젠트 길드 빌딩 최상층에 있는 백루찬의 펜트하우스였다.
어쩐지 눈을 뜬 곳이 과하게 넓고 좋더라니, 이유가 있었다.
나는 이 펜트하우스를 한번 둘러보고 백루찬을 믿고 맡긴 정희수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곳은 한솔이가 머물 방 하나 빌려주는 것쯤이야 너무 쉬웠다. 응접실도 따로 있을 만큼 넓으니까.
이제 나는 내 집으로 가야겠다. 2급 게이트를 나오고 한동안 못 돌아갔으니 좀 썰렁하고 그렇겠지만….
먼지가 쌓이진 않았겠지. 냉장고에 식자재가 뭐 뭐 있었더라. 나는 기억을 곱씹으며 과연 냉장고를 열어도 될지, 열면 혼돈의 무언가가 보일지를 걱정했다.
무엇보다, 확인해야 할 시나리오가 있었다. 분명 페이지 수도 넘어갔겠다, 다음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빨리 메인 캐릭터를 찾아야 한다.
어째 매번 잊어먹는 것 같지만…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그래도 백루찬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널따란 응접실을 빙 돌며 어딘가로 사라진 백루찬을 찾았지만, 놈은 보이지 않았다.
아오, 집이 넓으니까 이런 건 귀찮네. 갈 때 가더라도 인사는 하려고 했는데. 나는 포기하고 그냥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을 향해 난 복도를 지나는데, 갑자기 중간에서 팔이 툭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백루찬이었다.
어디 있었나 했더니, 이쪽 방에 있었냐.
“나 이만 갈게. 잘 쉬고 간다.”
“어디 가요?”
“집에.”
“…집 여긴데?”
“…무슨 소리야. 내 집 말이야, 내 집.”
백루찬은 흐음 소리를 내며 턱을 매만졌다. 나를 보는 눈초리가 무언가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인데.
뭐야, 뭔데 저런 눈으로 쳐다봐. 백루찬은 짧은 시간 동안 나를 가만히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그냥 여기 있어요.”
“…저기요. 나도 개인 생활이 있어요.”
학교도 다니고, 집도 있고, 멀쩡하다고. 근데 내가 왜 남의 집에 있어야 하는데?
내가 떫은 표정으로 반박하자 백루찬은 아예 몸으로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다 대 줄 텐데. 원하면 나도.”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개소리니. 대 주긴 뭘 대 줘….
“너 내가 그 얼굴로 의미심장한 대사 내뱉지 말랬지.”
등짝을 때리는 농구 선수 감독 같은 표정을 지으며 놈이 뻗은 팔을 치워 냈다.
내가 놈을 지나쳐 가자 백루찬이 내 팔을 붙잡아 당기며 킥킥 웃었다.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야지. 데려다줄 테니까 잠깐 기다려요.”
백루찬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가지고 나왔다. 흰 코트가 아닌 그냥 반팔 티 위에 입는 얇은 카디건이었다.
추위를 많이 타나. 이제 봄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백루찬이 가자고 불러서 나는 백루찬을 따라 집을 나섰다.
모르젠트 길드장 전용 엘리베이터는 속도도 빨랐다. 발밑까지 투명해서 이전 세계에서 고소 공포증이 있던 나는 좀 움찔했지만, 다행히 잘 탈 수 있었다.
순식간에 1층에 도착해 로비로 나서는데, 이상하게 주변이 웅성거리며 소란스러웠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로비 정문 쪽을 바라봤다.
모르젠트 소속 헌터들이 누군가의 앞을 막고 있었다. 뭐야, 무슨 소란이야.
내가 고개를 빼고 살펴보려는데, 정문 쪽을 보던 백루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곤 갑자기 불쑥 내 앞을 가로막고 나를 돌아봤다.
“…왜?”
“형, 진짜 갈 거예요?”
“내가 너처럼 직장인도 아니고. 나 아직 학생이다. 졸업 못 하면 네가 책임질래?”
“여기서 가면 되잖아요. 전용 차로 모실게.”
“개소리 작작 하고. 나 옷도 갈아입고 이것저것 좀 챙기고 좀 집에 가서 쉬자. 왜 이래 자꾸?”
“여기서 쉬는 건 쉬는 게 아니에요?”
“그 소리가 아니잖아.”
“그럼 뭔데.”
“그냥….”
그냥 집에 가고 싶은데. 할 일도 있다고. 이걸 다 말할 수도 없고….
나는 곤란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백루찬은 숫제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미친, 이놈이 또 미인계 쓰네. 이제 안 넘어간다, 이놈아!
“아니, 그냥… 좀 집이란 게 그런 거지? …막 밖에 오래 있으면 가고 싶고… 어?”
나는 떠듬대며 백루찬에게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
안 넘어가기는 개뿔…. 진짜 곤란하다, 저 얼굴. 아오.
백루찬은 그런 나를 빤히 보다가 씩 웃더니 불쑥 손을 뻗어 내 귀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성가셔하며 고개를 빼자 끝까지 따라온다. 이게 진짜….
“형 집에 가면 냉장고 열면 안 돼요.”
“…카오스가 펼쳐져 있을 거란 건 알겠다.”
“알면 가지 말자.”
“가야 그 카오스를 치우겠지?”
나는 한껏 짜증을 담아 만지작거리는 백루찬의 손을 치워 냈다.
얘가 아까부터 계속 들러붙어 대.
백루찬은 그런 내 손짓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더니, 정문 방향을 힐끔 쳐다보곤 또 나를 보고 웃어 댔다.
“뭐가 좋아서 웃고 난리야?”
“형이 좋아서.”
“…너 진짜 그 얼굴로 그딴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내가 세 번 말했다.”
“보들보들해요. 말랑말랑.”
백루찬이 고개를 내 쪽으로 고개를 쑥 내밀어 속삭였다. 나는 질색했다.
이 새끼가 뭔 소리야 또!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였다. 백루찬에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빠르게, 내 손목을 잡아 오는 손길이 있었다.
S++급 감각이 기민하게 반응하려 했지만, 순간 여기에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닫고 나는 손을 쳐 내려는 걸 멈췄다.
잠깐 멈칫한 몸이 잡아당기는 손길에 휙 돌아간다.
몸을 돌려진 순간,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팔목을 으스러트릴 것처럼 꽉 붙잡은 남자가 잔뜩 충혈된 눈으로 백루찬을 노려보고 있었다.
“송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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